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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농사

"작은 고추가 맵다" - 고추 모종 키우기(2)

by 내오랜꿈 2017.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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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있다. 고추의 재배 역사를 생각하면 그리 오래된 게 아니라 조선 후기에 와서야 나름대로 발언권을 얻게 된 속담이 아닐까 짐작된다. 조선 중기에 우리 나라에 전래된 고추가 텃밭 재배식물로 확고히 자리를 잡고 이런저런 품종으로 분화되는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18세기 중엽 이후라고 보는 게 정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품종으로 분화된 고추들 가운데 유난히 매운 맛을 내는 고추들이 생겨났을 테고 그것들은 대부분 다른 고추들에 비해 크기나 무게가 작다는 공통점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경험치가 모여 하나의 관용어구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이 확고한 사회적 발언권을 획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이 어찌 됐던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은 동시대 사람들의 경험치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속담이다.

 

고추의 매운 맛은 잘 알다시피 캡사이신(capsaicin) 성분 때문인데 이 캡사이신은 알칼로이드계 질소화합물이다. 여기서 질소화합물이라는 말은 식물의 생장에 이용될 수 있다는 말과 동의어다. 다시 말해 이 질소화합물이 캡사이신 성분이 되지 않았다면 고추의 생장에 더 많이 투입될 수 있었을 테고, 그 고추는 훨씬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청양고추든, 베트남이나 타이 같은 열대지방의 고추든, 매운 맛을 내는 고추는 거의 대부분 보통의 다른 고추들에 비해 그 크기가 아주 작다. 반대로 매운 맛이 거의 없는 파프리카나 오이고추는 보통의 다른 고추들에 비해 훨씬 더 크다. 매운 맛을 내는 고추는 이처럼 더 큰 생장을 포기하고 열매나 잎에 캡사이신 함유량을 늘린 결과인 것이다. 물론 고추 품종의 분화에서 고추의 크기는 여러 환경적, 유전적 요인들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것이겠지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캡사이신 성분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왜 이런 차이가 만들어 졌을까?

 

 

 

 

 

▲ 일반고추(수비초) 자라는 모습(파종 18일째). 

 

알칼로이드 화합물의 일반적인 효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캡사이신이나 카페인, 니코틴 같은 알칼로이드는 '천연살충제'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고추의 경우 원산지인 안데스 산맥을 벗어나 세계 각지로 전파되면서 유럽인을 따라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같은 덥고 습한 열대기후에서 적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고추는 여러 곰팡이 종류나 민달팽이 같은 곤충들의 공격에 시달리게 되면서 이 공격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캡사이신 함유량을 늘리게 되는 것이다. 고추의 진화, 적응 과정에서 스스로 터득한 이 방법은 적의 공격을 물리치는 데 있어 아주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 텃밭에서 고추를 키워 보면 다른 채소들은 어릴 때부터 온갖 벌레들의 공격에 시달리지만 고추 싹에는 별다른 벌레가 꼬이지 않는다. 고추 씨앗에 많이 함유된 캡사이신 성분은 어린 싹에 고스란히 전해져 벌레들의 접근을 막는 천연살충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고추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많은 양의 캡사이신을 만드느라 그만큼 성장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결과 열대지방의 고추는 대부분 매운 맛이 아주 강하지만 열매의 크기는 보잘것없는 품종으로 진화한다. 이 사실을 안다면 왜 파프리카나 피망 같은 단맛이 나는 고추는 헝가리 등 중부유럽의 추운 지역에서 발달하고, 작고 매운 고추는 타이, 베트남 같은 열대지방에서 발달했는지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자주 쓰는 속담이나 고사성어에는 경험적 사실이 녹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더러 있다. 대표적으로 '귤화위지'(橘化爲枳)의 고사성어다. '강남의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인데, 주위 환경이나 문화에 따라 사람이 달라진다는 고사성어로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나 식물학적으로는 근거 없는 소리다. 귤과 탱자나무는 처음부터 전혀 다른 나무다. 탱자나무보다는 차라리 유자나무와 귤의 식물학적 유사성이 더 가까운 편이다.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는 귤이 추운 지방에서 자라면 '탱자'가 된다는 소리는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고추가 추운지방에서 자라면 '가지'나 '토마토'가 된다는 소리와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소리다. 그럼에도 이런 근거없는 주장들이 의외로 많이 유통되고 있다. 강황과 울금에 관한 이야기도 그 중에 하나인데, 인도 같은 더운 지방에서 자라는 것은 강황이고, 우리나라 같은 추운 지역에서 자라는 것이 울금이라는 글이 인터넷에 떠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강황을 재배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울금을 재배한다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헛소리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우리나라든 인도든 대규모로 재배하는 건 거의 대부분 강황이라는 식물이다. 제발, 스스로 판단할 능력도 안 되면서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엉터리 글들 함부로 좀 옮기지 말았으면 한다.

 

 

 

 

 

▲ 청양고추 자라는 모습(18일째). 수비초에 비해 떡잎의 크기가 작다.

 

고추 모종 키우기 시작한 지 20일이 지났다. 고추를 키우는 사람은 일반고추, 청양고추, 오이고추는 잎만 보고도 금방 알아챌 정도로 어느 정도 자라면 잎줄기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특히 청양고추는 떡잎 때부터 일반고추와 크기가 다르다. 작고 가냘프다. 아마도 캡사이신은 떡잎 때부터 일반고추보다 훨씬 더 많이 함유되어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제 겨우 본잎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언제 고추다운 꼴을 갖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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