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의 학명은 "Daucus carota L."다. 여기서 종소명 'carota'는 겔트어의 celtic에서 유래한 것으로 색깔이 붉다는 뜻이라고 한다. 영어명 'carrot'도 여기에 어원을 두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근의 색깔을 연상하면 주황색부터 생각하지만 원래 당근은 보라색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근의 원산지는 아프가니스탄의 힌두쿠시(Hindukush) 지방이라는 설이 다수의 의견인데, 이 지역에서는 아직도 보라색, 주황색, 노란색 등의 다양한 변종이 재배되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주류를 이루는 주황색 계열의 당근은 유럽 지역에서의 재배가 일반화되는 15세기 이후에 이루어진 품종 개량 덕분이다. 직접 기른 채소가 사 먹는 채소에 비해 맛과 향이 뛰어남은 당연하지만 당근은 특히 더하다. 식감과 향이 마트에서 파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텃밭에서 한 번 재배하기 시작하면 여간해서는 빠뜨릴 수 없는 작물이 당근이 아닌가 싶다.
▲ 여러 가지 모양과 색깔을 보이는 당근. 사진 출처 : 국립원예특작과학원(http://www.nihhs.go.kr/farmer/technology/Newcrops_list.asp)
당근 파종한 지 110일이 지났다. 8월의 지독한 가뭄으로 파종일을 잡지 못하다가 9월에 들어서면서 겨우 파종할 수 있었다. 예년보다 20일 정도 늦게 파종한 셈이다. 대부분의 작물은 수확적기를 표현할 때 파종 후 70일이라는 식으로 씨앗을 뿌린 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당근은 파종일이 아니라 발아일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옳다. 당근은 파종기의 온도에 따라 발아편차가 아주 큰 작물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당근의 발아 가능 온도는 4~30℃ 범위지만 4~10℃ 정도의 저온에서는 30일까지 걸리기도 하고 25~30℃에서는 일주일 정도면 발아한다. 그러니 파종일을 기준으로 할 경우 발아일수에 따라 실제 성장이 20일 가까이 차이날 수도 있는 것. 당근의 성장일수가 중요한 이유는 항암, 노화 억제, 항산화 효과가 높다고 알려진 베타카로틴 때문이다. 당근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채소 가운데 베타카로틴 함유량이 가장 높은 채소다. 카로틴이라는 이름 자체가 당근 뿌리에서 붉은색 결정을 추출한 뒤 붙인 이름이기도 하다. 당근 뿌리에서 이 베타카로틴 착색이 피크가 되는 시기는 발아후 70~100일이라고 한다. 100일이 지나면 뿌리가 더 굵어질 수는 있으나 카로틴 착색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 더러 뿌리가 갈라진 게 보인다. 뿌리 형성기(발아 뒤 20~40일)에 수분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뿌리 표면이 거칠어지고 갈라진다.
당근을 키워 본 사람은 알겠지만 다른 작물에 비해 초기 생장이 아주 느린 편이다. 발아한 뒤에도 처음에는 도대체 자라고 있는지 아닌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더디게 성장한다. 그러다 한 3주 정도 지나면 잎줄기의 성장이 눈에 띄게 변화하는데 이때부터 뿌리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6주 정도 지나면 본격으로 뿌리가 비대해지기 시작한다. 교과서적으로 표현하면 발아 뒤 20~40일 사이를 뿌리 형성기, 40~100일 사이를 뿌리 비대기, 70~100일 사이를 카로틴 착색기라고 한다. 그래서 당근의 수확적기는 발아 뒤 100일이라는 계산이 나오는 것. 여름 파종은 대부분 열흘 이내에 발아할 테니 발아일에 대한 걱정보다는 그 지역의 늦가을 기온을 고려하여 파종일자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영하로 내려가기 전까지 생육일수가 최소한 100일은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1월 초가 되면 영하로 내려가는 중부내륙 산간지역은 늦어도 7월 말 이전에 파종하는 게 영양분이 제대로 갖춰진 당근을 수확할 수 있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당근은 상명종자로 분류될 만큼 씨앗의 수명이 오래가는 편인데, 잘만 보관하면 5년 정도까지 발아력이 보존된다. 씨앗 한 봉지를 사면 텃밭에서는 아껴 쓰면 3~4년 정도는 사용할 수 있다. 이 생각만 하고 있었던지 지난 봄 씨앗 준비를 할 때 당근은 생각도 않았는데, 막상 파종하려고 보니 씨앗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필요한 씨앗은 인터넷에서 주로 구입하는데 당근 1봉지만 따로 구입하기가 어색해서 읍내에 나갔다 다이소 매장에서 파는 당근 씨앗 1봉지를 샀다. 파종시기도 늦었고, 가뭄도 심해서 제대로 자랄지도 의문스러웠던 시점이라 시험 삼아 다이소 매장의 1,000원 짜리 당근 씨앗을 사온 것. 거의 40일 가까이 만에 내리는 비에 맞추어 씨앗을 파종했는데 발아는 5~6일 만에 아주 잘 된 편이었다. 뿌리가 본격적으로 비대기에 접어들 때까지는 겉으로 자라는 모습도 전에 키우던 품종과 별다른 차이를 못 느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잎줄기가 눈에 띄게 우거졌다. 지금까지 키운 당근은 다 자란 뒤에도 잎줄기 부분이 뿌리보다 조금 긴 정도였는데, 올해 키운 당근은 잎줄기가 사람 허벅지에 이를 정도로 자라는 것이다. 그제서야 씨앗을 잘못 샀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때는 이미 씨앗 봉투를 버린 지 오래되어 품종이 무엇인지조차 알 길이 없을 때이니 수확할 때까지 기다려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 뿌리 길이는 20~25cm인데 잎줄기는 70cm가 넘는다. 지금까지 키웠던 당근은 뿌리부와 지상부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지난 주말, 파종한 지 110일 만에 당근을 수확했다. 미끈하게 자란 것도 있고, 뿌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 것도 있다. 당근 뿌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는 것은 땅의 상태 등 다른 이유도 있지만, 같은 조건에서라면 뿌리 형성기에 수분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난 여름의 가뭄이 당근 뿌리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제대로 자란 것은 뿌리 길이가 20cm를 넘어가는 것을 볼 때 올해 키운 당근은 지금까지 키웠던 5촌당근이 아니라 6촌당근이 아닌가 싶다. 무성하게 자란 잎줄기 탓에 지상부와 뿌리부의 비율이 3:1이 넘는다. 6촌당근은 처음 키워 보는 것이라 뿌리와 잎줄기의 비율이 이게 정상적인 게 맞나 싶기도 하다. 6촌당근 전체가 아니라 이 품종만의 특성인지도...
겨울 같지 않은 날씨 탓에 12월 중순, 말에 당근, 무를 수확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12월 초에 파종한 한지형 마늘이 보름 만에 싹이 올라오기도 한다. 확실히 이곳 날씨는 내가 아는 겨울날의 그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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