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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여행

겨울, 제주에서(1)

by 내오랜꿈 2009.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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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 첫째날 

제주도, 가까운 곳이면서 막상 마음 먹고 가기가 만만찮다.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여름 휴가철이나 연휴 기간에는 비행기표 구하기가 그야말로 장난 아니기 때문이다. 늘 혼자나 둘이 움직이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지금까지 비행기를 비롯한 교통편의 어려움은 그렇게 실감하지 못하고 살았다. 아마도 10여 년 동안 명절에 서울에서 부산이나 울산행 비행기표나 기차표를 별 어려움 없이 타고 다녔던 기억이 크게 작용한 듯 싶다. 왜냐면 혼자 움직이는 것은 사전에 예매하지 않고서도 취소표 나오는 것을 인터넷으로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에 나의 그런 망상 아닌 망상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지난 가을이 깊어갈 무렵, 여수에 놀러온 후배들과 이야기하는 도중 크리스마스 휴가때 제주도 여행계획을 세웠는데, 문제는 비행기표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게 뭐 그리 문제가 되냐?'고 하니까,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들 보는 게 아닌가. 그렇게 해서 내가 총대를 매고 어른 9명 아이 6명의 비행기표를 한날 한시에 구해주겠다고 장담을 해버렸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큰 오산일 줄이야! 12월 한 달 동안 아는 인맥 다 동원해서 구한 것이 고작 8장. 결국 후배들과의 휴가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나 때문에 크리스마스 연휴가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후배들의 원성을 들으며, 이미 예약한 한화콘도를 취소하느냐 우리만 가느냐는 문제만 짊어지게 된 것.
 
우여곡절 끝에 컨택된 것이 대학 동아리 선배 부부. 캠퍼스 커플인지라 부부를 다 잘 알고 있기에 중3 올라가는 아들까지 비행기표 3장을 떠안기며, 몸만 오면 모든 건 우리가 준비한다며 꼬셔서 동행하게 된 것.
 


12월 22일 아침 7시 30분, 간단한 요기를 하고 녹동항으로 출발했다. 여수에서는 비행기편 시간맞추기가 힘든지라 녹동항에서 제주항으로 가는 남해고속 페리호를 이용하기로 한 것. 3시간 30분의 다소 긴 시간을 때우기 위해 가벼운 읽을 거리, 먹거리 등을 준비해서 3등칸에 올랐다. 휑하니 넓은 3등칸 선실 안은 그렇게 붐비지는 않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저들은 무얼하며 시간을 보낼까? 궁금해서 지켜보니, 아니나 다를까, 한국인의 공통 오락은 역시 고스톱이라는 걸 증명하는 분위기로 서서히 변해간다.

파도의 성냄없이 잔잔한 망망대해를 달려온 대형 여객선은 접안에만 무려 30여 분이나 소요되어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다. 주렸던 배를 움켜쥐고 접안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항구를 벗어나 미리 점찍어둔 식당을 찾아 나섰다.



무조건 택시를 잡아타고 각재기국('전갱이'의 제주말)으로 유명하다는 '돌하르방 식당'를 찾았는데, 택시기사도 모르는 곳이라 조금 헤매다가 하는 수 없이 전화로 위치를 물어물어 찾아간 시간이 폐문 직전. 이 집은 아침 10시에서 오후 3시까지만 영업하는데, 기꺼이 마지막 손님을 기다려주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제주에서 다른 좋은 것도 많은데 왜 하필 각재기냐고 했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밑반찬으로 나온 고등어조림, 쌈배추와 함께 젓갈도 맛있고, 싱싱한 전갱이와 속배추를 넣고 끓여낸 국물 맛이 시원하고 개운했다. 이 모든 재료는 칠십이 넘은 주인장 할아버지가 그날그날 직접 새벽시장에서 하루분 씩 장을 봐서 손수 요리를 하신다고 한다.  끝손님에게 마무리 식사를 준비해 주시고는 테이블로 나오셔서 맛있게 비워내는 반찬그릇을 채우는 손인심, 말인심이 보통 후한 게 아니다. 전갱이는 얼마 전 매물도에서 원없이 잡아서 물리도록 구이만 해 먹었는데, 이렇게 씨래기국 비슷하게 끓이는 요리법은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것이다.



늦은 점심을 먹은 뒤 공항으로 가서 카니발을 렌트하여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 비행기로 부산에서 오는 형네 가족을 기다리면서 3박4일간의 주전부리용으로 마트에서 잔뜩 장을 봐서는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어두고 짜투리 시간을 보내러 간 곳이 '러브랜드'.



언젠가 TV에서 소개되었던, 성을 테마로 꾸민 야외 조각공원인 '러브랜드'는 생각보다 입장료가 비싼(7,000원/1인) 편이다. 아마도 왜 저런 걸 돈 주고 봐야 하나, 하는 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리라. 적절히 조명발을 받은 다양한 형태의 조형물들이 외설스럽다기 보다는 재밌고 색다른 구경거리였다. 목 디스크, 허리 디스크를 유발할 것 같이 힘든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적나라한 조각물들에게 약간의 성교육을 받은(?) 시간이었다 할까나. 맹숭한 낮 보다는 밤에 가기를 권하는 바이다. 사진은 게 중 제일 얌전한 것으로....
 
 


시간이 되어 공항에서 형네 부부를 픽업하고 부리나케 식당을 찾았다. 이곳 제주는 9시가 넘으면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닫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항 근처의 장춘식당에서 막차를 탔다. 갈치조림과 성게국. 부드러운 미역을 넣고 성게로 감칠맛을 낸 성게국과 새빨간 양념이 넉넉히 배인 매콤달콤 갈치조림이 안그래도 허기진 일행들의 입 속으로 허겁지겁 들어간다.
 
제주에 갔으니 당연히 제주지방 특산주를 먹어주어야 하겠지만 마땅한 게 없는지라 식당에서는 밥 먹으며 가볍게 소주를 마시고, 숙소에 들어와서는 지난 12월에 오만 출장갔을 때 사온 '글렌피딕'이 선택되었다. 술잔과 함께 형네 가족이 이번 여행을 함께 보내기 위해 애썼던 무용담을 주고 받는 사이, 제주에서의 첫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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