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여름 가뭄에 이은 잦은 비 때문이었을까? 9월 중순에 옮겨 심은 김장배추는 채 새 뿌리가 내리기 전에 공벌레 종류들이 잎줄기를 먹어치우는 바람에 추석이 지나서야 김장배추 심기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누가 공벌레나 쥐며느리는 잎채소를 먹지 않는다고 했던가? 공벌레들이 갓 심은 배추 모종에 떼로 엉겨 잎줄기를 갉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늦게 심은 만큼 자라는 것도 늦어, 12월에 들어서도 텃밭의 배추는 속이 다 차질 않아 김장 날짜만 늦추기를 몇 차례. 크리스마스 이브를 전후해서 일주일 내내 흐린 날씨의 연속이라는 기상청 예보를 확인하고서야 지난 주말부터 배추, 무, 당근을 수확하는 등 김장 준비에 들어갔다. 배추를 절이면서 포기 크기를 보니 작년과 비교해서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들이 제법 많다. 작년엔 배추 40여 포기로 김장을 마무리했는데, 올해는 포기로 따지다간 세 자릿수를 해도 작년만 못할 것 같다.
▲ 2016년 김장 배추. 추석 지나고 심은 탓에 속이 조금 덜 찼다. 개인적으로 속이 꽉 찬 배추보다는 조금 덜 찬 배추를 좋아한다. 작년 배추와 올해 배추의 중간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 2015년 김장 배추. 늦가을 장마 탓에 너무 속이 많이 찼었다.
▲ 배추 절이기는 몇 년 동안 이런저런 방법을 써 본 결과 김장용 봉투가 가장 효율적인 것 같다.
올해 역시 배추 절이기는 김장용 비닐 봉투를 이용한다. 함부로 굴려 찢어지는 불상사만 없다면 다른 어떤 방법보다 효율적이다. 절이는 동안 배추를 뒤집는 등의 추가적인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냥 두어 번 굴려주면 된다. 배추 절이는 동안 김장소에 들어갈 재료인 마늘, 생강, 쪽파, 갓을 다듬어 놓으면 첫날 준비는 끝. 둘쨋날에는 고춧가루를 버무릴 다싯물을 끓이고 찹쌀풀을 쑤어 식히면 김장 준비는 마무리된다. 해마다 고춧가루 5근에 맞추어 재료들을 준비했는데 올해는 4근만 하기로 했다.
우리 집 김장 양념소는 고춧가루와 동량의 멸치 액젓을 사용한다. 고춧가루가 4근이면 2.4L의 젓갈을 혼합한 다음 찹쌀풀과 다싯물을 넣어 농도를 조절한다. 농도를 맞춘 다음 양념소나 절인 배추의 간을 보면서 싱겁다 싶으면 새우젓을 조금 추가하기도 한다. 양념소에 추가하는 부재료는 마늘, 생강, 양파, 쪽파, 갓, 생새우, 청각이 전부다. 많은 사람들이 김치 맛있게 담글려고 양념소에 사과, 배 등의 과일과 무 등을 갈아 넣기도 하는데 우리 집에서는 이런 잡스런 것들은 일체 넣지 않는다. 무채 역시 넣지 않는다. 주재료인 배추와 젓갈만 맛 있으면 다른 재료는 사실 김치 맛을 내는 데 있어 부차적인 존재일 뿐이다. 과일이나 굴, 전복 같은 해산물 등 별도의 재료를 넣어 김치 맛을 좋게 하려는 건 다분히 허례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재료로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을 낼 수 있는 김치가 제대로 담근 김치가 아닐까?
▲ 태양초 고춧가루를 이용한 김치 양념소. 들어가는 재료는 고춧가루, 멸치젓갈, 마늘, 생강, 양파, 갓, 쪽파, 청각, 생새우가 전부다.
배추를 절이면서 양을 가늠해 보니 아무래도 작년보다 적은 듯하여 무 섞박지 한 통을 추가했다. 준비한 김장 양념소에 맑은 멸치액젓이 아니라 여과지로 거르지 않은 걸쭉한 멸치 젓갈을 조금 추가하여 손가락 굵기로 깍둑 썬 무를 넣어 버무리면 무 섞박지가 완성된다. 모양새는 무 깍두기와 크게 다를 바 없는데, 젓갈을 조금 진하게 추가해서 깊은 맛이 나게 만든 김치라고 생각하면 된다. 새우젓을 기본으로 해서 김치를 담그는 서울쪽 사람들 중에는 경상도나 전라도 식의 멸치 젓갈이 많이 들어간 김치를 먹으면 비리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아마도 이 섞박지를 먹으면 틀림없이 젓갈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고 손사래를 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겐 서울식 김치 맛이 심심하기 그지없다. 사람의 혀란 결국 자신의 삶이 속한 테두리 안에서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맛은 결국 취향일 뿐이다.
늘상 하는 소리지만 사실 김장은 양념소 만들어 버무리는 과정보다는 그 전에 준비하는 과정이 더디고 힘들다. 하루 반나절 준비한 재료를 가지고 막상 절인 배추에 양념 버무리는 건 두어 시간 남짓이면 끝이다. 다 마무리하고 보니 작년보다 김치통 분량으로 세 통 정도 적은 것 같다. 해마다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지인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는 김치 양이 이 정도였는데, 올해는 그만큼을 벌써 지난 여름, 가을의 심술궂은 날씨가 삼켜버렸다. 아주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게 배추 농사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틀에 걸친 노동에 대한 보상은 소주를 곁들인 돼지 수육에 갓 버무린 김치로 매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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