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갈은 열대지방에서부터 냉대지방에 이르기까지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각기 나름의 형태로 전승되어 온 먹거리다. 어떤 재료로 담근 것이든 원재료인 어육의 단백질이 가수분해되어 액체로 된 상태를 말하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흔히들 젓갈의 숙성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바로 어육이 연화, 분해되어 그 형체를 잃고 액체 상태가 되어 구수한 맛을 내는 과정을 일컫는 것이다. 숙성된 젓갈을 한지나 광목천을 체에 받쳐 거르면 맑은 액젓과 건더기로 구분된다. 원칙적으로는 이렇게 걸러낸 맑은 액젓을 '어간장(fish sauce)', 남은 건더기를 '어된장(fish paste)'이라 한다. 어간장("Fish Sauce")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어(패)류를 재료로 하여 만든 조미료란 의미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멸치젓갈이나 까나리젓갈이 숙성되어 액체화되면 젓갈 용기(주로 항아리)에 용수를 박아 맑은 액젓을 얻는다. 어느 정도 맑은 액젓을 얻고 나면 생선 살이나 뼈 찌꺼기가 남는데 이 건더기를 그냥 버리지 않고 가마솥에 넣어 적정량의 물과 소금을 더해 한두 시간 끓이면 다시 한 번 어간장을 만들 수 있다. 먹을 게 부족했던 시절, 젓갈 찌꺼기를 그냥 버린다는 건 있을 수 없었으리라. 요즘이야 언제든 마트에서 상품화된 젓갈을 사 먹는 게 대세인 시대니 집에서 직접 젓갈을 숙성시킨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 의미도 잘 모른 채 '젓갈을 달인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젓갈을 '달인다'는 것은 멀쩡한 젓갈을 무턱대고 달이는 게 아니라 숙성된 젓갈에서 맑은 액젓을 얻고 남은 건더기를 재활용하는 방편의 일환이었다. 상식적으로도 상온에서 잘 숙성된 젓갈을 '달인다'는 건 사실 미친 짓이라 할 수 있다. 그 자체로 온갖 영양분이 들어있는 완전 식품인데 그걸 끓여서 각종 유익한 균을 죽여버리고 먹는다는 게 과연 온전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짓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SNS를 비롯한 인터넷 상에서 '남이 장에 가니 거름 지고 장에 간다'고, 그 의미도 모른 채 멀쩡한 젓갈 달이는 걸 자랑인 양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 멸치 젓갈 달이기. 센 불보다는 은근한 불로 두어 시간 달여야 한다.
며칠 동안 멸치젓갈을 걸러 맑은 액젓을 얻고 남은 건더기를 재활용해서 멸치어간장을 만들기로 했다. 그냥 버리기 아깝기도 하지만 이렇게 만든 어간장은 메주 띄워 만든 간장과는 또 다른 맛을 낸다. 뼈와 묽은 반죽 같은 건더기를 솥에 넣고 20L의 물과 1~2KG의 소금을 더해서 두 시간 가량 은근한 불로 달인다. 보통 멸치젓갈을 담글 때는 소금을 멸치 양의 20~25% 정도 넣는다. 그러니 멸치 20KG 한 통에 4~5KG의 소금이 들어갔을 것이다. 맑은 액젓을 걸러 내고 물 20L를 첨가했으니 어느 정도의 소금을 넣어주어야 할 터인데(만약 물 양을 줄이고 냉장고에 보관할 생각이라면 소금을 넣지 않아도 된다), 이때 소금 양은 만드는 사람이 사용 용도나 보관 장소를 감안하여 알아서 조절해야 한다. 염도가 낮으면 상온 보관은 힘들고 냉장 보관해야 한다. 나의 경우는 액젓 원액은 주로 김치를 담글 때 사용하고, 어간장은 액젓 원액보다 훨씬 덜 짜게 만들어 각종 무침이나 국에 넣을 용도로 만든다.
어간장과 관련해서 한 가지 첨언하자면 젓이나 젓갈은 원재료와 소금(재료에 따라 10~35% 사이)만 들어가기에 억지로 양을 늘릴 수가 없다. 문제라면 단지 위생상의 유해 여부가 개입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간장은 가공 과정을 거치기에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양을 대폭 늘릴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물과 소금을 대량 투입하면서 화학조미료를 쓰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진다. 그러니 투명한 액체 상태로 '~액젓'이나 '~어간장'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는 것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우리네 액젓이라기보다는 물과 소금을 혼합하여 양을 늘리는 가공 과정을 거친 '어간장'이 대부분이다. 이런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으면 맛 없는 '액젓', '어간장'이 왜 그리 많이 유통되는지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 광목천을 체에 받쳐 일차로 걸러낸 다음 커피여과지로 한 번 더 걸러준다. 염도도 약하고 상온에서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부유물을 없애기 위해서다.
내 어릴 적, 고향집에서는 멸치젓갈 달이는 날이면 온 집안, 온 동네에 구수한 냄새가 진동했다. 동네 어귀만 들어서도 오늘 어느 집에서 젓갈 달이는 날인가보다 생각할 정도로 그 냄새는 멀리 퍼져 나간다. 하지만 별다른 콩고물이 떨어질 것 없는, 냄새만 요란한 잔칫날이기 일쑤였다. 기껏해야 텃밭에서 남새 가득 뜯어 쌈 싸 먹는 정도랄까. 요즘은 상추 같은 쌈을 먹을 때 된장과 고추장을 섞은 쌈장을 주로 먹지만 내 고향 동네에서는 거의 멸치 액젓 양념장으로 먹었다. 젓갈을 달이는 동안 봄이와 삼순이가 이 구수한 냄새를 못 이겨서인지 하릴없이 코를 킁킁거리며 내 주변을 왔다갔다 하는 걸 보니 저절로 어릴 적 추억이 오버랩된다. 내 오래된 추억처럼, 냄새만 요란했지 막상 지네들에게 떨어질 콩고물이 별로 없다는 걸 안다면 얘네들도 얼마나 실망일까?
젓갈을 달이면서 떠오르는 거품은 가급적 걷어낸다. 이 기름기를 걷어내면 나중에 걸러내는 게 한결 쉬워진다. 불조절도 중요한데 활활 타오르는 불보다는 은근한 불에 끓는 듯 마는 듯 달이는 게 좋다. 식기를 기다려 소쿠리로 거른 뒤 다시 한 번 광목천을 받쳐 걸러내면 액젓 원액보다는 훨씬 밝은 색의 맑은 어간장을 얻을 수 있다. 이 상태로 사용해도 별 문제는 없는데, 염도도 약하고 냉장 보관할 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최대한 맑은 어간장을 얻기 위해 커피여과지로 한 번 더 걸러낸다. 변질의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지만 조금 번거롭다. 깔때기에 커피여과지를 깔고 하는 것이라 오며 가며 한 국자씩 떠 넣는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어간장 10병 만드는 데 사흘이나 걸렸다. 젓갈 거르기 시작한 때부터 따지면 일주일이 넘게 걸림 셈. 시간은 좀 오래 걸렸지만 색깔은 더없이 깨끗하고 붉은 빛이 도는 진홍빛 갈색이다. 일반 간장보다는 훨씬 덜 짜고 젓갈 특유의 풍미가 있기에 된장을 쓰지 않는 무침이나 나물 요리, 국물 요리에 쓴다면 간장보다 한결 깊은 맛을 낼 수 있다.
'삶의 여유 > 먹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래식 찹쌀 고추장 담그기(2017) (0) | 2017.01.03 |
---|---|
늦은 김장, 심플하고 깔끔한 김치 양념소 만들기 (0) | 2016.12.24 |
멸치 젓갈 거르기(2016) (0) | 2016.11.08 |
비파 발효효소액 담그기 (0) | 2016.06.18 |
죽순의 계절 (0) | 2016.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