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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먹거리

재래식 찹쌀 고추장 담그기(2017)

by 내오랜꿈 2017.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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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전래 초기, 음식이라기보다는 향신료로 쓰이던 고추가 우리 식탁에서 주인공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시기는 빨라도 18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된다. 고추를 이용하는 음식의 대표격은 역시 김치와 고추장일 터인데, 18세기 중엽 이전에는 고추를 이용한 김치 담금법이나 고추장 제조법이 수록된 자료를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 고려때 이미 김치 담금법을 기록한 책도 있고(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조선 초기에는 김치의 어원인 '딤채'라는 말이 쓰이고 있었지만 김치에 고추를 넣는다는 기록은 1766년에 간행된 <증보산림경제>에 처음 나타난다. <증보산림경제>의 초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산림경제>(1715)에는 당시 만들어 먹던 여러 가지 김치류와 김치 담금법 5가지를 상세히 서술하고 있음에도 고추나 고춧가루를 이용한 김치 담금법은 보이지 않는다. <증보산림경제>에는 오늘날 우리가 담궈 먹는 김치 종류가 거의 대부분 등장하는데, 지금의 총각김치나 오이소박이에 해당하는 김치에 고춧가루를 이용하여 담그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고추장 역시 <증보산림경제>나 <수문사설>(1740)에 제조법이 처음 등장하는데 이 책들에서 선보이는 고추장은 오늘날의 막장과 같은 형태의 장으로 지금의 고추장 담금법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고추장용 메주를 사용하고 소금이나 간장으로 간을 맞추는 방법 등 현재의 고추장 담금법과 유사한 형태의 담금법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건 1815년에 간행된 <규합총서>다(윤숙자, <한국의 저장 발효음식> 참조. 자료에 따라서는 <규합총서>의 간행년도를 1809년으로 보기도 한다). 곧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보이는 고추장의 역사는 최대로 잡아도 200년 남짓이다.


다른 장류보다 훨씬 짧은 역사를 가진 고추장이지만 재료를 달리하거나 담그는 방법에서 약간의 변화를 주기만 해도 전혀 다른 고추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름 또한 어떤 재료를 혼합하느냐에 따라 찹쌀고추장, 보리고추장, 수수고추장, 마늘고추장 등으로 달리 불린다. 어떤 부재료를 쓰든 주재료인 메주와 소금, 물 등 각 재료의 혼합 비율이 어느 정도 일정한 된장과는 다르게 고추장은 주재료인 고춧가루와 다른 부재료의 혼합 비율도 일정하지 않다. 심하게 표현하면 담그는 사람 마음 내키는 대로다. 뿐만 아니라 같은 찹쌀고추장, 보리고추장이라 할지라도 담그는 방법이 지역에 따라, 사람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전통적인 재래식 고추장 담금법이 조금 번거로운 탓에 개량식 고추장 담금법이 보급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 2kg의 엿기름을 4~50℃ 정도의 물에 30분 정도 불려서 엿기름물을 내린다. 서너 번 반복하여 25~30L 정도의 엿기름물을 받는다. 식혜를 만들 때는 앙금을 버리지만 고추장 담글 때는 앙금을 같이 넣어도 상관 없다.

▲ 엿기름물에 미리 준비해 둔 찹쌀가루를 골고루 잘 풀어서 50~60℃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면서 당화시킨다. 두세 시간 걸린다. 다 삭으면 표면이 하늘을 비출 정도로 맑고 투명한 빛깔이 된다.


여러 고추장 중에서 찹쌀고추장이 가장 보편적인데, 재래식 담금법과 개량식 담금법의 가장 큰 구분점은 엿기름물을 내리고 여기에 찹쌀가루를 넣어 당화시킨 다음 달이는 과정을 거치느냐 아니냐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재래식 찹쌀고추장은 이 과정을 거친 다음 고추장용 메줏가루와 고춧가루를 혼합하는 방식이다. 개량식 찹쌀고추장 담금법은 엿기름물을 내리고 달이는 과정이 아니라 찹쌀가루를 익반죽하여 둥근 찹쌀떡 모양을 만들어 끓는 물에 넣어 익힌 다음 이것을 찹쌀떡 익힐 때 사용한 물을 첨가하면서 치대어 걸쭉하게 풀어지도록 휘젓는다(요즘은 찹쌀떡 치댈 때 물 대신에 엿기름물을 넣기도 한다). 여기에 고추장용 메줏가루를 넣어 50~60℃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면서 서너 시간 당화시킨 다음 고춧가루를 넣는 방식이다. 말이 개량식이지 이 방법도 꽤나 힘들다. 특히나 익힌 찹쌀떡을 걸쭉하게 풀어지도록 휘젓는 과정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런데 요새는 이 개량식 담그기도 귀찮은지 찹쌀풀을 쑤어 시중에 유통되는 물엿이나 조청을 혼합하는 것으로 찹쌀떡 치대는 과정을 대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물엿이나 조청은 거의 대부분 수입 옥수수 전분을 효소 분해하여 가공한 것이다. 그것도 100% 미국산 GMO 옥수수다. 재래식이든 개량식이든 전통적인 찹쌀고추장 담그기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인위적으로 조청 같은 당분을 넣지 않는다. 엿기름이나 찹쌀가루의 전분이 당화되는 것만으로도 고추장은 충분히 달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도배되어 있는, 물엿 넣어 만드는 고추장 레시피, 특히나 고춧가루 양보다 더 많은 물엿이 들어가는 찹쌀고추장 레시피를 보고 있으면 씁쓸하다. 조금이라도 손이 많이 가는 걸 귀찮아 하고, 점점 더 '달달한' 음식을 선호하는 작금의 세태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 같아서다. 이러다간 조만간 설탕물에 라면스프 넣은 고추장이 탄생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ㅠㅠㅠ


해마다 새해가 시작되면 고추장을 담근다. 나는 찹쌀떡 만들어 치대는 개량식보다는 엿기름물 달이는 재래식 방법을 선호한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로서는 이 방법이 편하기 때문이다. 전통 고추장 중에서 가장 많이 담그는 게 찹쌀고추장인데 나 역시 주로 찹쌀고추장을 담근다. 재래식 찹쌀고추장을 담그기 위한 필수 재료는 고춧가루, 메줏가루, 엿기름, 찹쌀가루, 소금, 물이 기본이다. 이 재료들의 비율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를 터인데 나의 경우는 고춧가루 3kg을 기준으로 할 때 찹쌀가루 4~5kg(찹쌀 2kg으로 찹쌀가루를 빻은 양), 메줏가루 1.5~2kg, 엿기름 2kg, 소금 1~1.5kg, 물 25~30L이다. 이 재료를 가지고 재래식 찹쌀고추장을 담그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자세한 과정은 작년에 쓴 "재래식 전통 찹쌀고추장 담그기" 참조).



▲ 찹쌀가루를 풀어 당화시킨 엿기름 물을 센 불보다는 뭉근한 불에서 달인다. 불의 세기에 따라 4~6시간 정도 달이면 처음 양의 절반 정도로 줄어든다. 나는 처음에 25~30L 정도의 양이 되도록 엿기름 물을 잡아서 12~15L 정도가 될 때까지 달여 준다.

▲ 고추장에 사용할 메줏가루와 소금. 고추장용 메주는 일반 메주가 아니라 쌀가루와 콩을 혼합하여 따로 발효시켜야 한다. 소량의 고추장용 메주를 위해 메주를 발효시키는 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닌데, 다행히도 요즘은 마트에서 고추장용 메주를 따로 팔고 있다. 소금도 가급적 천일염을 정제한 꽃소금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천일염은 불순물이 있기 때문에 고추장에는 적합하지 않다.

▲ 엿기름 달인 물이 약간 뜨거울 때(50~60℃) 메줏가루부터 넣어서 잘 섞어 준다.


1) 엿기름물 내리기. 엿기름은 50℃ 전후로 데운 물에 넣어 30분 정도 불려 고운 체로 걸러 낸다. 이 작업을 서너 번 반복하여 엿기름 물을 모은다. 나는 엿기름 2kg으로 25~30L 정도의 엿기름물을 모은다.


2) 엿기름물에 찹쌀가루 넣어 당화시키기. 엿기름물을 솥에 안치고 찹쌀가루를 풀어 준 다음 온도가 50~60℃ 정도가 되도록 가열하여 찹쌀가루를 삭힌다. 표면이 투명하게 변할 때까지 두세 시간 삭힌다.


3) 당화시킨 엿기름물 달이기. 찹쌀가루가 다 삭혀졌으면 본격적으로 불을 때서 달인다. 너무 센 불보다는 뭉근한 불에 오래도록 끓이는 게 좋다. 25~30L 정도의 엿기름물이 12~15L 정도가 될 때까지 달인다. 불의 세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4~6시간 정도 걸린다.


4) 달인 엿기름물에 메줏가루, 고춧가루 순으로 혼합하기. 다 끓인 엿기름 물을 넓은 그릇에 옮긴 다음 어느 정도 뜨거울 때 메줏가루를 혼합한다. 혼합한 뒤 조금 더 식으면 고춧가루를 섞는다. 굳이 온도를 따지자면 50~60℃ 정도가 좋다. 골고루 섞은 뒤에 실내에서 하루, 이틀 놓아둔 다음 소금으로 간을 한 뒤 항아리에 넣어 숙성시킨다.


복잡한 것 같지만 단순화시키면 엿기름물 만들어 찹쌀가루 풀어 당화시키고 적정 양이 될 때까지 달인 다음 메줏가루와 고춧가루를 혼합하는 것이 전부다. 단지 각 과정마다 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엿기름물 만드는 것부터 항아리에 넣을 때까지 최소한 2~3일 정도가 필요하다. 1년 동안 두고 먹을 음식 만드는데 이삼일 투자하는 게 그리도 힘들까? 발효 음식을 만들면서 귀찮다거나 하는 이유로 '빨리빨리' 만드는 방법만을 좇는 건 빵 만든다면서 밀가루 반죽을 바로 오븐에 넣어 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메줏가루를 넣고 나서 고춧가루를 섞는다. 된 정도를 보아가면서 매실청이나 찹쌀풀, 청주 등을 이용하여 묽기를 조절해야 한다. 이때 소주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태양초로 만든 고추장은 처음에는 약간 검붉은 듯해도 이삼일 지나면 선홍빛으로 변한다.


▲ 실내에서 하루, 이틀 놓아둔 고추장에 적정량의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춘 뒤 항아리에 담아 숙성시킨다. 메줏가루와 고춧가루를 혼합하면서 바로 소금을 넣으면 고초균의 활성이 떨어져 발효가 잘 진행되지 않는다.


▲ 항아리에 옮긴 뒤 한지나 망사를 씌워 먼지나 불순물의 침투를 방지한다. 맑은 날에는 뚜껑을 열어 햇빛을 쬐어주면서 한두 달 발효시키면 고추장이 완성된다.


고추장 담그는 방법과 관련해서 인터넷에 떠도는 몇 가지 잘못된 상식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건 고추장에 소주를 넣는 것이다. 부패할 위험이나 골마지가 끼일 염려가 없다는 이유, 고추장의 농도를 조절한다는 이유를 내세워서다. 그러나 알콜은 아주 강력한 살균제다. 알콜 도수 16도 이상의 술은 유통기한이 없다. 미생물이 번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효는 미생물이 한다. 고추장은 여러 곰팡이나 세균에 의해 발효가 진행되는 살아있는 발효 음식이다. 여기에 소주를 넣어 미생물을 죽여버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염도를 조절하거나 보관 조건을 제대로 해서 변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지 무턱대고 소주를 붓는 건 해결책이 아니다. 누가 요구르트 먹으면서 유산균을 살균한 다음 먹을까? 농도를 맞추어야 하는 이유라면 찹쌀풀을 쑤어 넣거나 차라리 청주를 넣을 것을 권한다. 청주는 보통 알콜 도수가 10~13도 정도다.


다음으로는 소금을 넣는 시점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고추장을 만들 때 메줏가루와 고춧가루를 섞으면서 곧바로 소금을 넣는다. 고추장 담글 때 메줏가루나 청국장 가루를 넣는 이유는 고초균이 프로테아제나 아밀라아제 효소를 생성시켜 단백질과 전분질을 분해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초균(Bacillus subtilis)은 염분기가 있으면 활력을 잃는다. 이걸 이해한다면 메줏가루와 고춧가루 혼합하면서 바로 소금을 넣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하루, 이틀 정도는 고초균이 충분히 증식할 시간적 여유를 주어야 한다. 따라서 소금은 꼭 항아리에 옮겨 담기 전에 넣는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 고추장은 오래 묵히면 좋지 않다. 해마다 새로 담궈 먹는 것이 가장 좋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장은 오래 묵힐수록 좋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간장을 제외하고는 적용되지 않는다. 흔히들 된장도 오래 묵히면 좋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된장의 유효기간은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3~5년 정도를 '맥시멈'으로 본다. 5년을 넘어간 된장은 이미 산패가 진행되고 있고 지나친 수분 증발로 딱딱하게 변한다. 발효란 건 어떤 발효든지 간에 모두 적당한 때가 있는 법이다. 예컨대 적당하게 발효되어야 술이 되지 지나치게 발효되면 초가 된다. 술을 만드는 입장에서 보자면 식초가 된 술은 부패한 것이다. 초산화되어 가는 술을 못 먹을 이유는 없겠으나 가장 맛있게 발효시켜 먹을 수 있는 술을 굳이 과발효시켜 시큼한 술을 만들어 먹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장도 발효식품이다. 가장 맛있는 때가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고추장을 냉장고에 보관해야 한다는 글들이 많다. 고추장을 냉장고에 보관한다는 건 변질의 위험 때문일 텐데, 제대로 담근 고추장은 항아리에 넣어 바깥에 두어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물론 자주 들여다 보고 항아리를 닦아주는 등의 손길은 필수다. 그리고 고춧가루보다 조청이나 물엿이 더 많이 들어간 고추장 레시피도 돌아다닌다. 이건 뭐 설탕물에 고춧가루 푼 것과 뭐가 다를까? 이런 레시피들은 절대 믿지 마시기 바란다. 고추장은 적정 조건에서 발효 과정이 필요한 발효 식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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