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서녘 하늘에 비바람을 잔뜩 실은 잿빛 구름이 몰려오는 와중에도 해는 아침나절을 온전히 자신의 시간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고구마, 생강, 강황 같은 늦은 가을걷이를 하는 농부의 바쁜 손길은 그 한나절의 햇빛조차 고맙기만 한데 이미 예고된 비는 미처 고마움을 마무리할 틈도 없이 밀어닥친다. 늦가을 잦은 비는 누구에게도 환영 받지 못하는 법인데 왜 이리 물색없는 '김여사'마냥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지 모르겠다.
이틀 동안 예고된 비를 피해 봄파종 작물로는 가장 늦게까지 텃밭에 남아 있는 강황을 수확했다.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는 가급적 수확을 늦추는 게 커큐민 함량을 높이는 방법이라 알고 있기에 '언제 캘 거냐'는 옆지기의 채근에도, 노랗게 변해 가는 잎줄기를 보면서도 지금껏 수확을 미뤘었다. 아직도 서리가 내리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남아 있을 듯한데 수확하기 직전에 너무 잦은 비에 노출되는 건 아무래도 오랜 기간 보관해야 하는 강황의 특성상 저장하는데 문제가 있을 것 같아 비 맞기 전에 수확하기로 한 것. 처음 재배하는 것이라 생강과는 다르게 노란 색깔이 비치는 강황을 캐면서도 이 정도면 잘 자란 것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 올래 들어 처음 키워 보는 작물들. 위에서부터 강황, 콜라비, 비트.
강황을 처음 키웠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지금까지 내가 키워 본 작물이 몇 가지나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손으로는 도저히 꼽을 수 없어 종이에 적어 가며 헤아려 보니 금새 오십 가지가 넘어 간다. 이것도 종류만 따진 것이라 같은 종류 안에서 분화하는 품종까지 따지면(예컨대 상추를 청상추, 적상추, 꽃상추, 양상추 식으로 구분하는 것), 백 가지가 넘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농사를 지으면서 천 평이 넘는 땅에, 공부하는 셈 치고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수십 가지 작물을 재배한 터라 웬만한 작물은 한 번씩 키워 본 탓이다. 그런데도 강황은 처음 키우는 작물인 것. 그러고 보니 올해는 처음 키워 보는 작물이 강황 말고도 두 가지나 더 있다. 바로 콜라비와 비트. 새삼 인간이 재배하는 작물 종류가 엄청나게 많다는 걸 생각하게 만든다. 아직도 내가 키워 본 작물보다는 키워 보지 않은 작물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 강황의 뿌리줄기
▲ 스티로폼 박스를 이용하여 내년 봄에 파종할 종자용 강황 저장
강황을 이야기하면서 울금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강황과 울금은 같은 식물일까? 다른 식물일까?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명확하고 통일된 결론이 나 있지 않다. 수많은 책이나 자료는 물론 전문가라는 사람들조차 제각각이다. 심지어 국가기관인 식약청과 농촌진흥청의 견해도 서로 다르다. 식약청은 강황이라는 한 식물의 뿌리줄기(줄기가 변하여 뿌리처럼 땅 속으로 자란 것)를 강황으로, 덩이뿌리(뿌리가 영양분을 저장하기 위해 비대해진 것)를 울금으로 해석한다. 실제로 강황을 캐 보면 생강처럼 생긴 뿌리줄기 사이로 수많은 실뿌리가 나 있는데 그 가운데는 간혹 타원형의 덩이뿌리를 달고 있는 실뿌리가 있다. 농촌진흥청은 (공개적으로 표명한 견해는 아니지만 비공식적으로) 강황은 식물명이고 울금은 이 강황이란 식물을 원재료로 해서 만든 약재명으로 해석한다. 전문가라는 사람은 물론 국가기관조차 이러하니 일반 사람들이야 일러 무엇하랴.
어떤 형태로든 정리가 필요할 듯한데, 내 생각으로는 지금 진도를 비롯해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는 것은 강황과 울금이 다른 식물이라는 걸 인정한다고 했을 때 강황이라고 보는 게 옳은 것 같다(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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