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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세상

서시빈축(西施嚬蹙) 동시효빈(東施效嚬)

by 내오랜꿈 2016.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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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정치 관련 기사에 '빈축'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황교안 권한대행 때문이다. 대통령급의 의전이나 인사권을 행사하려 하는 것에 대한 견제나 비판 차원에서 나오는 말일 것이다. 황교안은 총리 시절부터 의전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번 논란이 되었다. 올 초에는 서울역 승강장까지 승용차를 몰고 들어가기도 했고("역 승강장까지 차 타고 들어간 황교안 총리 빈축"), 얼마 전인 지난 달 29일에는 KTX 오송역 앞의 버스 승강장을 30분 동안 주차장으로 이용하느라 시내버스를 대지 못하게 한 일도 있었다("시민들 추위에 떨어" 국무총리 의전 차량 '불법주차' 논란). 검사장 때나 법무부 장관 시절에도 의전 문제에 대해선 '더럽게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라고 소문났었다 하는데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졸지에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되었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꼴 사나운 행태를 보일지 자못 궁금하다.


흔히들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위를 두고 '빈축을 산다'는 표현을 쓴다. 기차를 타기 위해 열차 승강장까지 관용차를 몰고 들어가는 황교안 총리의 행위에 대해 신문기사의 헤드라인에 '빈축'이란 표현을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실 '빈축(嚬蹙)'이란 한자어는 상당히 어려운 단어에 속한다. 한글 없이 한자만 적어 놓으면 아마도 제대로 읽지 못할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말에 '빈축을 산다'는 표현은 아주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 빈축이란 단어는 중국 4대 미인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춘추전국시대의 미인 서시(西施)와 관련되어 있다.



▲ 서시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시기로 오월동주, 와신상담 등의 고사를 만들어내는 드라마틱한 시대였다.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도 이 시기에 활약했다. 그래서 중화권에서는 이 시기의 이야기들이 드라마의 단골 소재라고 한다. 사진은 중국 장시위성TV에서 제작한 41부작 <서시>의 인터넷 포스터다.


서시는 사마천의 <사기> 같은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야사에만 나온다. 뜻밖에도 역사책이 아닌 <장자> "천운편"에도 서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아는 '빈축을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맹목적으로 남을 따라 하는 행동의 어리석음을 훈계하는 논조로 서술되어 있다. 중국의 4대 미인은 서시를 비롯하여 한나라 시대 왕소군, 삼국지 시대 초선, 당 헌종 때 양귀비를 일컫는데, 서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사에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서시의 일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지만 춘추시대 말 월나라 왕 구천의 책사인 범려가 훈련시킨 '스파이' 역할을 수행하는 서시의 일생이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생존을 건 투쟁 시기에 오왕 부차에게 잡힌 월왕 구천의 구명운동 일환으로 범려가 부차에게 절세미인 서시를 상납한다. 이 때문인지 어쨌는지 매일 밤 가시나무 위에서 잠을 자며(臥薪) 아버지 복수를 다짐했던 부차였건만 구천을 죽여서 후환을 없애라는 오자서의 충언을 무시한다. 그 댓가는 참혹했으니, 얼마 안 가 밥 먹을 때마다 쓸개를 핥으며(嘗膽) 복수의 날을 준비하던 구천에게 오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우리가 잘 아는 오월동주, 와신상담의 고사가 모두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어쨌거나 서시의 뛰어난 미모는 "오월춘추"로 묘사되는 이 시기의 드라마틱한 요소와 맞물려 여러모로 증폭된 듯하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고사성어와 관련된 왕소군의 별명이 기러기가 미모에 놀라 날개짓 하는 걸 잊어 땅에 떨어질 정도로 예쁘다 해서 '낙안(落雁)'인데, 서시의 별명은 '침어(沈魚)'다. 물 속에서 놀던 물고기가 시냇가에서 빨래하는 서시 얼굴을 보고 너무 예뻐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참고로 삼국지에 나오는 초선은 '폐월(閉月)'이다. 초선의 미모를 보고 달이 부끄러워 구름 속으로 숨었다는 뜻이다. 양귀비는 수화(羞華)다. 양귀비의 미모에 꽃이 부끄러워 꽃잎을 다물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한자어가 가지는 묘미와 중국인의 문학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물고기가 놀라 가라앉을 정도로 예쁜 서시였지만 속병이 있어서 자주 인상을 찡그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속된 말로 예쁜 여자는 뭘 해도 예쁘게 보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찡그린 서시 얼굴이 더 예쁘다는 소문이 났다. 그러자 동네 여자들, 그 중에서도 동쪽에 사는 못생긴 시(施)가 서시를 흉내내느라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다고 해서 '서시빈축(西施嚬蹙) 동시효빈(東施效嚬)'이란 말이 만들어진다. 동시효빈(東施效嚬)의 효는 '본받다'는 뜻이니 동시가 서시의 찡그리는 행동을 흉내낸다는 말이다. 곧, 자신의 본질을 망각하고 맹목적으로 남을 따라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의미하는 게 빈축이란 단어가 가진 본래적 함의다. 이런 함의를 지닌 빈축이 우리 말에 쓰이면서 타인의 인상을 찡그리게 만드는 행위에 대해 '빈축을 산다'는 표현으로 일반화된 것이다. 지금은 단어가 가지는 함축적 의미 때문인지 실생활에서보다는 신문기사의 제목으로 더 자주 접할 수 있는 말이 된 것 같다.


권한대행 된 지 며칠 지났다고 벌써부터 '의전'이니 '빈축'이니 하는 단어가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걸까? 전략 없는 투쟁이 만들어낸 어정쩡한 상황은 생각보다 이상한 방향으로 희화화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투쟁의 동력을 스스로 '스톱'시켜 버리고 '타인'의 결정에 자신의 의사를 맡겨버린 상황. 언제일지조차 까마득한 헌재의 판결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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