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시골마을. 천등산 자락, 나지막한 산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시냇물이 있다. 언제인가 제방공사를 한 흔적은 또렷하지만 굽이치는 물길을 따라 흘러가는 자연하천이다. 아흔이 넘은 옆집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시절엔 이 하천에서 팔뚝만한 장어를 잡아다 일본 순사에게 갖다 바치기도 했단다. 지금은 이 하천 옆으로 네모반듯한 논들이 형성되어 있지만 그때만 해도 밀물 때면 무릎까지 물이 차는, 펄밭에 가까운 하천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역사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할지 몰라도 백 년 가까운 어느 한 사람의 일생에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을 하천의 모양새가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바뀌었다.
▲ 자연 그대로의 물길을 바꾼 하천. 사진 왼쪽 시멘트 포장길이 작년까지 하천이 흐르던 자리였다.
▲ 새로 난 하천을 따라가는 하천둑에 잔디를 입혔다. 멀쩡한 하천을 뒤집어엎고서는 애써 잔디까지 입혀야 할까?
수십 년 전, 자연하천 그대로의 모양을 살려 제방공사를 한 뒤로 범람한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위험은 없어 보일 정도로 충분히 너른 물길을 확보하고 있는 하천인데, 영문도 모르는 사이 물길을 바르게 펴고 다리를 새로 건설하고 하천 둑에는 잔디를 입히는 조경공사를 했다. 그 덕분에 우리 집 담장을 타고 흐르던 하천은 저만치 비켜가고 담장 옆으로 새로운 길이 뚫렸다. 허리춤 정도 올라오는 담장인지라 이제는 급하면 담장을 뛰어넘어 길가로 나다닐 수 있게 되었다. 공사를 시작하기 전, 측량을 나온 공사관계자가 말하기를, 하천 부지가 국유지인데 우리 집 담장 안쪽 마당 일부가 국유지에 속하는지라 길을 만들면 일부가 잘려나갈 수도 있다고 했다. 그 일부에 하필이면 10년이 넘은 참다래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 그 나무에서 수확하는 참다래는 작년이 마지막일 줄 알았고 아쉬움을 표하는 글까지 남겼었다. 그랬는데, 막상 공사는 우리 집 담장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은 채 하천만 옮겨 가고 담장 옆으로는 넓다란 시멘트 포장길이 생긴 것. 내 입장에서야 새로운 주차공간도 생기고 참다래 나무도 살릴 수 있게 되었으니 전혀 나쁠 게 없는 셈이다. 덤으로 하천둑에 잔디정원이라는 눈요깃거리까지 생겼으니 무슨 불만이 있을까만 왜 이런 쓸데없는 공사를 벌여 어떤 놈 호주머니 속으로 세금을 축내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도무지 곱게 보아지지 않는다.
어쨌거나 자신이 죽었다 살아난 걸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참다래 나무는 작년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수확을 안겨 준다. 사실 작년까지는 하천 쪽으로 늘어진 가지에 달린 참다래는 수확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기에 버리는 게 제법 많았는데 올해는 어느 가지든 길 위에 서서 편안하게 딸 수 있다. 나무도 1년 동안 더 많이 자랐을 테고 버리는 것도 없으니 수확이 많은 건 당연지사. 큰 소쿠리 하나로는 부족해 작은 바구니까지 힘을 보태어야 할 정도다. 따고 보니 한 상자에 담아 놓고 먹다가는 뒤적이는 게 힘들 것 같아 크기별로 세 박스에 나누는 사치를 부린다. 참다래는 대표적인 후숙 과일인지라 상온에 보관하면서 먼저 익는 것부터 골라먹어야 하는데 한 곳에 담아 두었다간 익은 것 찾느라 한참을 뒤적거려야 할 것 같아서다.
작년 이맘때 수확하고 나서는 일 년 동안, 아무 것도 해 준 게 없는데 또다시 두어 달 먹을 거리를 만들어주는 참다래 나무. 매번 수확할 때마다 내년에는 거름도 좀 해 주어야지 생각하지만 그때뿐이다. 거름을 해 주면 큰 것이 좀 더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옆지기의 바램이 많이 투영된 생각이긴 하지만 어쩌면 아무런 거름도 주지 않는 게 뛰어난 맛의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는 작은 게 많지만 맛은 마트에서 파는 그 어떤 참다래에도 뒤지지 않는다. 필요한 모든 영양분을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스스로 찾아 써야 하기에 충분한 거름과 수분을 공급받으며 '얌전하게' 자란 참다래와는 맛의 차이가 확연하다. 해마다 자랑하지만 이 참다래 먹다 마트에서 사 먹으면 참외 먹다 오이 먹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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