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멧돼지의 습격
농사 짓는 사람들에게 멧돼지를 비롯한 야생동물 피해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내가 주말농사로 짓고 있는 밭도 멧돼지, 고라니, 조류 등의 피해가 심각한 상황이다. 고구마, 옥수수 등의 농사는 진즉에 포기했고 콩류도 농사짓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
▲ 멧돼지가 습격한 감자밭. 선명한 발자국과 먹다 남긴 감자 조각들.
3월 초 심은 뒤 풀 한 번 매고 방치해 둔 감자밭. 6월 셋째 주에 수확할까 하다가 너무 이른 것 같아 두어 주 미룰 예정이었는데, 그 사이 장마까지 겹치는 바람에 3주나 늦어졌다. 풀 맨 지 한 달 이상 지난 터라 어느 정도 풀밭 수확은 각오하고 갔으나 막상 맞닥뜨린 건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감자 파종한 곳이 150~200평 정도 되는데 거의 전부 파헤쳐져 있는 것. 멀리서 봤을 땐 감자밭에 도둑이 들었나 싶을 정도였는데 자세히 살펴 보니 사람이 아니라 동물 발자국이다. 군데군데 먹다 남긴 감자 조각도 널려 있다. 감자를 먹는 동물?
농사를 짓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멧돼지가 감자를 먹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사실 멧돼지가 다른 건 다 먹어도 감자는 먹지 않는다는 게 얼마 전까지의 정설이었다. 감자에 들어있는 솔라닌 같은 알칼로이드계 독성물질 때문에 멧돼지가 먹을 수 없다는 주장이 대세였던 것. 그런데 근래에 들어와서는 인터넷 카페나 SNS 상에서 멧돼지가 감자를 먹는다는 의견이 점점 더 많이 올라오고 있다. 그럴 때마다 '기다, 아니다'로 논란이 되고 있는 걸 숱하게 보았지만 나 역시 멧돼지가 감자는 먹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농사 지으면서 고구마나 옥수수는 초토화되는 걸 보았어도 감자는 공격 당한 적이 없었기 때문. 그랬는데 이 광경을 눈 앞에 두고서는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만약 멧돼지가 아니라면 다른 어떤 동물이란 말인가?
2. 진화하는 멧돼지
감자를 먹는 멧돼지. 단 한 번의 풍경을 보고 확신하는 이유는 이 밭에서 벌어진 다른 상황 때문이다. 멧돼지가 아니라면 곰이랄 수밖에 없는 풍경을 연출해 놓았기에.
▲ 멧돼지가 쓰러뜨린 복숭아나무. 높은 곳에 있는 열매는 그대로인데 쓰러뜨린 가지의 열매는 깨끗하게 따먹었다.
▲ 감자 이랑 옆에 있던 사과나무도 뿌리를 파헤쳐 쓰러뜨려 놓았다.
▲ 파헤쳐진 생강. 생강도 비교적 멧돼지로부터 안전한 작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감자밭 주위에 있는 과실나무 중에 복숭아 나무가 몇 그루 있다. 열매가 납작한 거반도 복숭아도 한 그루 있는데 열매를 제법 달고 있다. 익을려면 아직 멀었을 텐데 가지 하나를 쓰러뜨려 열매를 따먹고 씨를 뱉어놓았다. 이 모습을 보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건 곰인데 이 산에 곰이 있을 리는 없으니 멧돼지 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이 없다. 옆의 사과나무 뿌리까지 파헤쳐 쓰러뜨려 놓았다.
덜 익은 복숭아 열매를 먹는 멧돼지. 풋복숭아 열매는 아미그달린이라는 청산배당체가 있어 조류를 비롯한 다른 동물들은 먹지 않는다.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먹을 수 있는 동물이라면 감자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멧돼지의 먹이 습성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멧돼지가 점점 더 진화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으나 천적이 사라진 산야에서 누가 이들의 폭주를 제어할 수 있을까? 농사짓기 점점 더 힘들어진다.
▲ 이랑 정리하면서 멧돼지가 남겨준 감자를 줍다. 그래도 다음 농사를 위해 멧돼지가 무너뜨린 이랑 복구하고 풀 정리하고 멀칭하는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 한창 꽃이 피고 있는 참깨는 물론 수박, 참외 등 다른 작물이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3. 야생동물과의 조화로운 삶은 가능할까?
애써 키운 감자를 잃은 것도 마음 아프지만 나에게 더 아픈 건 얘네들이 무너뜨린 밭둑이다. 2년 동안 다듬어왔던 이랑인데 이놈들 때문에 복구하느라 폭염주의보가 내린 뙤약볕 아래서 이틀을 보내야 했다. 앞으로 다른 농사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내버려둘 수도 없으니 풀 정리하고 밭둑의 풀을 베어와 이랑에 멀칭하는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활찍 핀 참깨밭이나 익어가는 수박, 참외 등이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동안 멧돼지 가족들의 파티 재료가 되어 준 감자가 없어졌으니 이놈들이 다른 걸 노릴 건 뻔하니 말이다. 이미 생강밭은 이놈들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상황.
올 가을엔 이 밭에 펜스를 칠지 농사 짓는 걸 포기할지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다. '새 한입, 벌레 한입, 사람 한입'은 이제 옛말이다. 이미 그런 수준은 넘어선 지 오래다. 야생동물과의 조화로운 삶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살아가는 모습 > 농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뙤약볕 속의 토마토 - 잿빛곰팡이병은 극복했으나... (0) | 2016.07.21 |
---|---|
상추, 치커리 저온처리 포트 파종 (0) | 2016.07.12 |
토마토 잿빛곰팡이병 (0) | 2016.07.07 |
파프리카 순지르기와 열매솎기 - 파프리카 이야기 ① (0) | 2016.07.03 |
장맛비 내리는 날의 텃밭 풍경 (0) | 2016.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