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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농사

파프리카 순지르기와 열매솎기 - 파프리카 이야기 ①

by 내오랜꿈 2016.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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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프리카(paprika)'란 단어는 원래 헝가리어로 '후추(=pepper)'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고추가 유럽의 식탁에 안착하기 전, 후추는 유럽인의 음식문화를 지배하던 향신료였다. 아메리카 대륙 탐험 이후 전해진 감자나 옥수수가 대량으로 재배되기 전까지 유럽인들은 겨울이 되기 전에 키우던 가축들을 도살하여 염장한 다음 이듬해 여름까지 주식으로 먹어야 했다. 밀은커녕 귀리나 수수로 끼니를 떼우는 게 일상일 정도로 식량이 부족했던 시대니 겨울에 가축을 먹일 사료가 있을 리가 없었을 터. 아무리 염장했다고는 하나 도축한 지 몇 개월이 지난 고기를 주식으로 먹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향신료가 필요했을 터. 예컨대 귀족을 비록한 상류층은 후추, 하층계급은 허브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때 후추가 금값보다 비쌌다는 기록이나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후추의 안정적 공급을 위한 새로운 인도항로 개척의 우연한 결과였다는 것은 이런 유럽 음식문화를 이해했을 때라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헝가리에서 후추를 의미하던 파프리카가 고추의 한 종류를 지칭하는 단어로 통용되기 전까지 고추는 '투르크의 파프리카' 또는 '이교도의 파프리카'로 불리었다고 한다. 이는 헝가리뿐만 아니라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인도 페퍼', '캘리컷 페퍼', '투르크 페퍼', '기니 페퍼' 등으로 불리었던 것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간 고추가 곧바로 유럽의 식탁에 안착한 게 아니라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먼저 정착한 뒤에 서아프리카의 기니나 오스만투르크를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고추에 '기니 페퍼'니 '투르크 페퍼'니 하는 이름이 붙었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도 영어권에서는 고추를 뜻하는 단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후추(pepper)에 수식어가 붙은 형태인 'Hot Pepper', 'Chili Pepper', 'Sweet Pepper' 등이 여러 가지 고추 종류를 뜻하는 단어로 통용된다. 어떤 형태로든 고추는 후추(=pepper)를 대신하는 향신료였던 셈이다. 


▲ 2015년 10월의 파프리카 재배 모습


오늘날 고추는 'Hot Pepper' 또는 'Chili Pepper'로, 파프리카나 피망은 'Sweet Pepper'로 양분되는데 단어에서 알 수 있듯 파프리카나 피망은 매운 고추에 대비되는, 단맛이 나는 고추를 지칭하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농업기술원이나 한국원예학회에서도 파프리카나 피망을 통털어 '단고추'로 분류하고 있다. 꽤 괜찮은 이름인 것 같은데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는 파프리카나 피망으로 알려져 있지 단고추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듯하다. 


파프리카 재배는 고추 재배와는 조금 다르다. 고추는 완전히 성숙된 열매뿐 아니라 풋고추로도 이용 가능하기에 개화 후 보름 정도 뒤부터 수확 가능한데 반해 파프리카는 완전히 성숙한 것을 주로 이용한다. 따라서 개화 후 50~60일 정도 지나야 열매를 수확할 수 있다. 가지과 중에서도 가장 오랜 기다림이 필요한 작물이라 할 수 있는 것. 또한, 텃밭재배든 시설재배든 고추는 순지르기나 열매 솎아주기를 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달리는 대로 수확하는 게 고추다. 하지만 파프리카는 전업농가의 경우 순지르기나 열매 솎아주기를 하면서 상품성 있는 열매로 키우는 노력을 하는 게 보통이다. 꽃 피는 대로 놓아둘 경우 파프리카 열매는 동전만한 크기부터 주먹만 한 것까지 제각각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국립원예특작과학원(http://www.nihhs.go.kr/) 홈페이지


파프리카 전업농가의 경우 보통 두 줄 가꾸기를 하는데 분지할 때마다 두 개씩 유인하고 나머지는 첫째 마디 혹은 둘째 마디에서 순지르기 해준다. 텃밭에서 파프리카를 가꾸면서 굳이 전업농가가 하는 방식의 순지르기를 따라 할 필요까지는 없겠으나 가지 분화가 너무 복잡할 경우 광합성이나 공기의 원활한 순환을 위해서도 어느 정도 제거해 주는 것이 좋다. 이때 오래된 측지엽도 제거해 주는 것이 좋다.


순지르기 못지않게 중요한 게 열매의 착과 절위와 수량 조절이다. 일반적으로 첫 착과절위가 낮고 저절위(보통 8절 이하를 의미)의 착과량이 많을수록 그 이후 상위절위의 착과율은 낮아지게 되고, 반대로 첫 착과절위가 높고 저절위의 착과량이 적을수록 상위절위의 착과율은 높아진다고 한다. 곧 착과절위가 높고 저절위의 착과수가 적을수록 최종적인 수량성이 더 뛰어나다는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업농가는 제2절위나 3절위부터 착과시킨다. 분지가 시작되는 곳(0절위. 고추의 경우 흔히 '방아다리'라고 부르는 곳)은 물론 2차 분지가 시작되는 곳(1절위)에도 착과시키지 않는 것이다. 착과 수량 역시 8절 이하에서는 2절위당 1개씩만 달리도록 조절한다고 한다. 참고로 위 그림은 강원도 농업기술원에서 고랭지 파프리카 재배(2006)를 하면서 실험했던 걸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 0절위부터 열매를 잔뜩 매달고 있는 포기. 아래 사진(왼쪽 포기)에서 비교해 보면 2절위부터 착과시킨 포기(오른쪽)와 초기 성장세에서 확연히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 농사지을 때는 나 역시 파프리카나 피망을 키우면서 고추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방치했다. 당연히 제대로 익은 열매를 수확하지 못 하고 크기도 제각각인 덜 익은 파프리카를 먹어야 했다. 몇 년 키우면서 여러 가지 자료를 섭렵한 끝에 파프리카는 토마토처럼 순지르기와 착과수를 조절해주는 게 키포인트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덕분에 작년의 경우 늦가을까지 무탈하게 자란 파프리카를 수확해 겨울이 끝나갈 무렵까지 저장해두고 먹을 수 있었다. 이 좋은 기억을 바탕으로 올해는 텃밭에서 키우는 파프리카 포기수를 대폭 늘렸다. 전부 40포기 정도 되는 것 같다. 


포기 수가 늘어나다 보니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것도 늘어났다. 2절 이하의 열매는 모두 솎아주어야 하는데 다른 일로 텃밭에 신경을 못 쓰는 사이 몇 포기는 0절, 1절에서 몇 개의 열매를 매달고 힘겹게 자라고 있다. 덕분에 지금쯤이면 당연히 파프리카 가지는 6절, 7절까지 분화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 포기들은 이제 겨우 3절, 4절 분화하고 있다. 이 차이만큼 최종적인 수량은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컨대 다른 조건이 같을 경우 20절까지 분화한다고 가정하면 이 포기들은 16~17절까지만 분화한다는 의미다. 분화할 때마다 2배수로 늘어난 가지수가 19절, 20절째면 몇 개의 파프리카를 더 맺을 수 있을까? 전업농가에서 0절, 1절에서 착과를 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듯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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