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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농사

'수미'의 시대, 가장 맛있는 감자는?

by 내오랜꿈 2016.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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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미'의 시대


"'그' 수미가 '이' 수미였군요."


어느 분이 내가 쓴 글에 덧붙인 댓글이다. 여기서 '그'는 어느 제과회사의 감자칩 광고에 나오는 수미고 '이'는 내가 쓴 글에서 나오는 감자 품종 이름이다. 물론 감자칩 광고에 쓰인 '수미' 역시 감자 품종을 뜻하는 건 동일하다. 많은 사람들이 정확하게 모르고 있을 뿐이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는 감자 품종은 수십 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농진청 산하기관인 국립식량과학원에서 육종되거나 도입한 품종만 하더라도 33가지에 이른다. 일제감정기에 도입된 남작을 시작으로 1961년 수미에서부터 2015년에 육종된 남선, 대광까지. 이외에도 민간기관이나 개인에 의해 육종된 품종도 두백, 백산, 민서 등 수십 종에 이른다. 이 수많은 품종 중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재배되고 있는 품종은 수미, 두백, 남작, 대서, 대지, 추백, 조풍, 홍영 등 십여 가지에 불과하다. 애써 육종된 신품종도 몇 년 안 가 사라지거나 명맥만 유지한 채 외면받는 품종이 대부분인 것.


수많은 품종 중에서 왜 어떤 품종은 널리 재배되고 어떤 품종은 사라지게 되는 걸까? 흔히 생각하듯 가장 우수한 품종과 맛있는 품종이 선택받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통계에 잡히는 생산량을 근거로 한 추정치일 뿐이지만 우리나라 전체 감자 재배 면적의 70% 가까이는 수미 품종이다. 대서와 함께 조림용, 가공용 감자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시피 하다.



▲ 감자 싹 올라오다(파종 28일째)


2. 수미의 도입과 보편화


수미는 1961년 미국에서 육종된 품종으로 우리나라에는 1975년에 도입되었다. 지역적응시험 및 농가적응시험을 거쳐 본격적인 재배는 1980년대 들어와서다(국립농업과학원 사이트, "농사로(http://www.nongsaro.go.kr/)", '감자 품종정보' 참조). 1990년대 후반부터 수미가 대세를 장악하기 시작했으니 재배를 시작한 지 십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오랫동안 재배해 오던 남작과 여타 재래종 품종을 대체한 셈이다. 비슷한 시기에 도입되어 보급된 대지 품종이 봄재배, 가을재배 모두 가능한 품종임에도 봄재배 전용 품종인 수미에게 밀린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 일단 수미가 남작이나 여타 재래종보다 수량성이 뛰어나다. 또한 모자이크 바이러스나 더뎅이병 같은, 감자에게 치명적인 병충해에도 강하다. 따라서 각종 병충해에 약한 남작이나 수량성이 떨어지는 재래종 품종을 대체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더군다나 조직이 단단하고 휴면기가 100일 정도로 비교적 긴 편이니 싹이 쉽게 나지 않아 저장성도 뛰어나다. 감자는 햇빛에 노출되어 푸른색으로 변색된 부분이나 싹이 난 부분에 '솔라닌(solanine)'이라는 아주 강력한 독성물질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솔라닌은 감자를 비롯한 가지과 작물에는 모두 조금씩 함유되어 있지만 소량일 경우는 섭취해도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감자의 변색된 부분이나 싹이 난 부분은 솔라닌 함유량이 크게 증가한다. 그대로 섭취했을 경우에는 곧바로 호흡이 곤란해질 정도라고 한다. 도입 초기 감자에 함유된 솔라닌의 이런 독성을 몰랐던 유럽 사람들이 감자를 악마의 음식이라고 기피했던 이유 중의 하나도 싹이 나거나 변색된 감자를 먹고 탈이 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도입되자마자 곧바로 구황작물의 지위를 차지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재배된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과 달리 유럽에서는 18세기가 지날 때까지 아일랜드를 제외하고는 본격적인 재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래리 주커먼, "악마가 준 선물, 감자 이야기" 참조). 감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동서양의 이러한 차이에는 감자 조리 방법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기도 하다. 솔라닌은 물에 익히면 무독성으로 변하므로 물에 삶아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오븐이나 팬에서 뜨거운 열기로 익히면 독성이 잘 제거되지 않는다(전수미, "잘 먹고 잘 사는 법:감자" 참조). 삶아 먹거나 물이나 기름이 들어간 음식에 넣어 먹는 게 일반적인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는 오븐에 구워 먹는 게 일반적이다. 다른 이유도 물론 있겠지만(래리 주커먼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오랫동안 식물의 뿌리를 먹는 것에 대한 터부가 있었다고 한다) 이 차이가 동양과 서양에서 감자를 받아들이는데 걸린 시간의 차이를 일정 부분 설명해 준다.


감자의 저장성을 이야기하다 약간 옆으로 빠졌는데 휴면기가 길고(싹이 잘 나지 않다는 말이다) 저장성이 우수하다는 건 생산농가 입장에서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장점으로 작용한다. '남작'이나 재래종 감자의 경우 휴면기가 짧아 봄재배로 수확한 감자를 가지고 이듬해 봄재배에 씨감자로 쓰는 데 어려움을 겪던 농가 입장에서는 '수미' 품종이 이런 고민을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 6월 말이나 7월 초에 수확한 감자가 10월까지 상온에 보관해도 싹이 잘 나지 않는다면 11월부터는 자연적으로 저온저장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겨울철이니 이듬해 봄까지 저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다른 품종에 비해 수량성 좋고 병충해 강하고 저장성까지 뛰어나니 수미가 기존 품종을 대체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반면에 대지는 휴면기가 짧아(50~60일) 봄재배 수확한 것으로 가을재배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우리나라 기후 특성상 가을재배에서는 충분한 생육기간(110~120일)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제주도나 남부 해안지방이 아니면 사실상 가을재배는 어렵다고 봐야 하는 것. 이런 이유로 비슷한 시기에 도입되었지만 보급이라는 측면에서 대지는 수미에게 완패하게 된다. 그러나 가을재배가 가능한 제주도나 남부 해안지방 일부에서는 아직 대지 품종이 일정 정도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 감자밭 (2016.04.05.)


3. 씨감자 대량 생산과 보급이 감자 품종 보급에 미친 영향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1990년대 이후 보편화된 대규모의 씨감자 생산과 보급 문제다. 씨감자만 전문으로 생산하는 영농조합이나 기업이 생겨나면서 한 번 주도권을 쥔 품종은 다른 우수한 품종이 새로이 육종되어도 쉽게 바뀌기 힘든 구조로 변해 버렸다. '대서'와 '하령' 품종을 예로 들 수 있다. 수미와 비슷한 시기에 도입되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서는 농가적응시험이나 지역적응시험이 늦어져 1995년에야 장려품종으로 선정되었다. 대서는 휴면성이나 병충해 정도는 수미와 비슷하고 수량성은 수미보다 약간 뛰어나다(아래 표 참조). 대서가 수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수미와 비슷한 품종이다. 그러나 대서가 장려품종으로 선정될 때는 이미 수미가 어느 정도 주도권을 잡아가던 시기였던지라 끝내 수미를 넘어서지 못했다. 수미의 보완재 정도로 취급받고 있을 뿐이다. 하령의 경우는 이보다 더 비참하다.


2. 일반특성

품 종

출아율(%)

경장(cm)

경수()

괴경수(/)

괴경중(g/)

대 서
수 미

91
92

57
54

1.7
1.7

5.4
5.2

792.6
682.1


3. 품질특성

품 종

수율(%)

비중

전분가

환원당
함 량

색 도
0(어두움)~

100(밝음)

박피후

튀김후

대 서
수 미

86
85

34.0
32.5

1.076
1.067

13.1
11.1

0.04
0.05

69
62

 

4. 대서의 수량성

품종

가공적성시험

생산력검정시험

지역적응시험 

(춘작조기)

농가실증시험 

(춘작조기)

춘작

하작

대서
수미

3,306
3,503

3,616
3,306

2,771
2,550

2,991
2,918

3,585
3,035


출처:『농사로(http://www.nongsaro.go.kr/)』, "감자품종정보:대서")


하령은 1998년 식량과학원 고령지농업연구센터에서 수미와 대서 품종을 교잡하여 육성한 품종으로 2005년부터 농가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수미나 대서의 약점으로 지적되던 역병이나 잎말림바이러스병에도 강하고 수량성도 수미보다 약 6% 정도 뛰어난 품종이다(식량과학원, "감자 품종정보" 참조). 전분질 함유량도 높고 삶았을 때 포슬포슬한 분질성도 뛰어나 모든 면에서 수미 감자를 압도한다고 평가받는 품종이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한 식미 평가에서 향, 분질감, 조직감 등 모든 면에서 수미를 압도했던 것. 한마디로 수미나 대서보다 병충해에 강하고 저장성 뛰어나고 수량성까지 좋은 품종인 것이다. 그런데 보급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령은 수미를 대체하기는커녕 품종의 생명 존립조차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왜 그럴까?


몇몇 농가의 개별적인 재배는 감자 품종의 보급에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 한다. 한 예로 몇 년 전부터 밀양의 그린씨드라는 회사에서 의욕적으로 육종하고 보급한 '백산'이나 '민서' 품종이 울산농업기술센터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전국적인 보급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 하고 있다. 지금은 보급용 씨감자를 생산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그린씨드는 전화조차 받지 않고 울산농업기술센터 담당자는 자기들이 직접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답변 뿐이다. 농진청에서 육성 보급하는 하령조차 10년이 지나도록 발언권을 얻기 힘든데 개인이 육종한 품종이 견고한 자본의 장막을 뚫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창고에 쌓인 수미 씨감자를 포기하면서까지 새로이 육종된 씨감자 생산을 시작할 영농조합이나 농업회사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 맛을 떠나 수량성이 좋은, 곧 돈이 될 수도 있는 하령조차 수미의 벽을 뚫지 못한다면 수미의 '장기집권'은 꽤 오래갈 것 같다.



▲ 감자밭(2011.05.15.)


4. 제일 맛있는 감자는?


이상에서 보듯 수미 품종이 대세를 장악한 것은 맛이라든가 품종의 우수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씨감자 생산업체가 보급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게 일차적인 원인이다. 강원도의 경우 흔히들 강원도 감자라 불리는 '두백' 품종이 주류를 차지한다. 삶았을 때 포슬포슬한 분질성이 뛰어나 삶아 먹는 감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품종이다. 강원도를 중심으로 선호도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역시 두백 씨감자만 꾸준히 생산하는 영농조합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더 깊게 들어가면 강원도의 경우는 '오리온'이라는 제과업체의 영향도 크다고 할 수 있다. 대서나 두백 품종의 보급에 오리온에서 설립한 감자연구소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품질 우수성이 기저에 깔려야 가능하겠지만 꾸준한 씨감자 생산업체가 감자 품종 보급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감자의 품종 선택은 맛이나 품질의 우수성에 따른 소비자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생산농가의 편의성, 곧 씨감자 공급의 원활함과 수확 후 관리의 효율성 등을 감안한 생산농가의 선택에 따른 결과라 할 수 있다. 소비자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맛이라는 특성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소비자에게 가장 우선시 되는 맛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떤 순서를 매길 수 있을까? 가장 맛있는 감자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맛은 개인적 취향이 반영되는 것이니 절대적인 기준은 없을 것이다. 가공용으로 쓰이는 감자는 수미나 대서 같이 조직이 단단하고 전분질 함유량이 낮은 품종이 좋다고 한다. 반면에 주로 삶아 먹거나 반찬용으로 소비하는 가정용에서는 용도에 따라 달리해야 한다. 조리용으로 쓸 때는 수미 같이 조직이 단단하고 전분 함유량이 낮은 품종이 좋고 삶아 먹을 때는 전분질 함유량이 높아 포슬포슬한 분질성이 뛰어난 두백이나 하령, 남작 같은 품종이 좋다. 수미 품종의 경우 삶은 뒤 시간이 지나 식으면 딱딱하게 변하는 걸 경험한 분이 많을 것이다. 감자를 갈아 전이나 부침용으로 쓸 경우는 갈변현상이 문제가 되는데 수미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품종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갈변현상이 현저히 덜하다고 평가받는 민서란 품종이 있는데 앞에서 말했듯 제대로 보급되지 못 하고 고사될 위기에 처해 있다. 한 가지 장점만 가지고 살아남기란 이렇듯 힘들다.


소비자가 감자의 특정 품종 재배를 강제할 수는 없겠지만 품종을 스스로 선택해서 구입 가능하다면 용도에 맞게끔 선택을 하는 것이 맛있는 감자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의 하나다. 조리용이라면 조직이 단단한 품종을 선택하고, 삶아 먹는 용도라면 두백이나 남작 같은 품종을 선택하고, 전이나 부침용으로 사용한다면 갈변현상이 적은 품종을 찾아 선택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소비자가 이런 자그마한 노력이라도 기울여야 품종 다양성을 유지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품종 다양성이 유지되어야 맛의 다양성도 보장된다. 자급용으로 재배하는 소규모 농가의 경우도 가능하면 이것저것 따져보고 자신에게 맞는 품종을 선택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수미가 가장 맛있는 품종도, 가장 우수한 품종도 아닌 것은 확실하니까.


아, 그리고 가장 맛있는 감자는?


배고플 때 먹는, 갓 삶은 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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