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과 작물은 냉해에 취약하다. 혹시라도 싹이 난 뒤에 가벼운 서리라도 맞으면 끝장이다. 그래서 호박이나 오이는 늘 봄 파종의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다. 요즘은 호박도 모종을 사 심는 게 보편화되다 보니 파종일을 크게 고민하지 않는데 직파하는 입장에서는 은근히 신경 쓰이는 일이다.
▲ 매실, 자두, 사과나무가 심어진 밭에 호박 구덩이를 판다. 넓은 공간도 활용할 수 있고 풀도 제어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마늘, 양파 이랑의 풀을 매고 난 뒤 매실, 자두, 사과나무 등의 유실수가 자라는 밭에 호박 씨앗 넣을 구덩이를 팠다. 삽 하나로 깊이 40cm, 지름 50~60cm 정도의 구덩이 15개를 파고 나니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그나마 땅이 연질의 사양토이기 망정이지 점질토나 돌이 많은 땅이었으면 중간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삽질'은 뭐든 힘들다.
호박은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꽃이 피었다 지는 걸 반복하며 열매가 맺히는 다비성 작물이다. 애호박은 개화 후 7~10일 정도면 수확 가능하고, 완전히 익은 걸 수확하려면 품종에 따라 40~50일 정도 걸린다. 온도나 일장 조건에 따라 암꽃 분화나 착과 습성이 복잡하고 오이와 달리 단위결과가 잘 되지 않는 작물이라 상업적 재배에서는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어떻게 재배관리를 하느냐에 따라 수확량의 차이가 심하다. 자급용으로 키우는 텃밭재배에서는 긴 시간 함께하는 작물이니 무엇보다 밑거름 관리가 중요하다.
▲ 지름 50~60cm, 깊이 40cm 정도의 구덩이를 판 뒤 주변의 잔가지와 마른 풀들을 꾹꾹 밟아 넣은 다음 흙을 덮는다.
호박 키우기와 연결된 내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과수원 밭둑에 구덩이를 판 뒤 마굿간에서 나온 퇴비와 닭똥, 개똥을 가득 넣은 다음 흙을 덮고 씨앗을 넣었다. 그렇게 만든 호박 구덩이를 보면 지면보다 10cm 정도는 높은 편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가라않는다. 호박이 싹을 틔우고 잎줄기를 내고 꽃을 피우는 시간 동안 구덩이 속의 퇴비와 닭똥, 개똥은 부숙되어 늦가을까지 호박 뿌리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다. 그 덕분에 여름내 애호박은 된장찌개와 수제비나 칼국수의 양념이 되었고 가을이면 한아름이나 되는 누런 호박을 매달고 익어갔다.
이런저런 쓸모 때문에 호박이 없는 시골 생활이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 호박을 키우기 위해선 땅이 넓어야 한다. 한 포기에 아들 줄기를 두세 가닥만 키운다고 하더라도 4~5M 정도의 공간이 필요하다. 잎이 크고 넓은데다 줄기 뻗음도 중구난방인지라 조그만 텃밭에서는 다른 작물의 생육을 방해하는 까닭에 키우기가 쉽지 않다. 넓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쥬키니 호박이 텃밭 재배에서 각광을 받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 호박 구덩이마다 4개의 파종골을 만들어 서너 개의 씨앗을 넣는다. 그런 다음 마른 풀을 가볍게 덮어준다.
이 밭에선 땅이 모자란 건 아니지만 유실수가 자라고 있는 밭에 호박 구덩이를 판 이유는 풀 관리 때문이다. 호박 때문에라도 나무 밑에 우거지는 풀들을 두세 번은 정리해야 한다. 이러한 노림수를 가지고 구덩이를 팠지만 지금은 닭똥, 개똥이 있는 게 아니니 주변에서 썩어가는 나뭇가지나 마른 풀 정리한 걸 꾹꾹 밟아 넣는다. 중간중간 흙을 조금 넣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빨리 부숙시키기 위함이다. 이렇게 만든 구덩이에 사방으로 네 개의 파종골을 파고 씨앗을 서너 개씩 넣는다. 맷돌호박과 단호박 위주로 파종하면서 긴단호박, 땅콩호박, 동과도 한 구덩이씩 차지한다. 씨앗을 넣고 흙을 고른 다음 마른 풀을 가볍게 덮어준다. 호박은 암발아성이기 때문에 빛을 차단해주는 게 발아율을 높이고 발아시간이 단축된다. 온도에 따라 발아 편차가 있는데 열흘에서 보름 정도면 대부분 발아한다. 싹이 나면 각 파종골마다 가장 실한 것 하나만 남기고 모두 솎아 주어야 한다. 이제 4월 하순에 서리만 내리지 않는다면 이 호박들은 앞으로 7개월을 나의 발걸음과 함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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