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텃밭의 봄파종 노지 직파는 완두콩이 가장 먼저고 그 다음이 감자다. 씨감자를 넣고 나면 기상 상태를 보아가며 열무나 얼갈이 배추를 파종하고 상추나 치커리, 쑥갓 같은 쌈채소를 파종한다. 늦어도 3월 말 전에는 마무리 된다. 노지에서 재배하는 열무나 얼갈이 배추에서 가장 문제되는 게 잎벌레 피해다. 봄에는 벼룩잎벌레, 여름이나 초가을엔 청벌레나 좁은가슴잎벌레가 떡잎이 올라올 때부터 난도질하기 일쑤다. 처음 농사지을 때는 은행잎 추출액도 치고 유인작물로 청경채도 키우곤 했지만 구멍 숭숭 뚫린 열무나 얼갈이 배추 먹는 것도 감지덕지 했을 정도로 잎벌레 피해가 심했다. 이 밭에 처음 농사지을 때만 하더라도 열무나 얼갈이배추 뿌려서 제대로 수확해 본 적이 없었다.
▲ 열무
▲ 래디쉬(20일적환무)
그런데 2~3년 전부터는 무나 배추 종류에서 잎벌레들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작년부터는 마치 농약을 친 것처럼 깨끗하다. 여기 온 지 올해 7년차니까 그 동안 이 밭에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근본적으로는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방치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울산에 가 있느라 1년 동안 통째로 놀리기도 했고, 첫해엔 퇴비공장에서 만든 유기질 퇴비를 조금 주기도 했지만 울산에서 돌아온 뒤로는 밭에서 나오는 작물 잔사나 음식 쓰레기로 직접 만든 퇴비 외에는 아무 것도 넣지 않았다. 작물 키우면서 부족한 영양분은 바닷물 희석액, EM/쌀뜨물 발효액, 깻묵 발효액, 오줌 발효액 엽면시비로 해결했다. 그래도 잎벌레의 공격은 성가셨는데 재작년부터 배추과 작물에 잎벌레 종류들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작년부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잎벌레 피해를 막기 위해 난황유도 치고 은행잎 추출액도 뿌리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이던 초창기에 비하면 요즘은 완전 공짜로 농사 짓는 기분이다.
이러한 변화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지만 농진청 실험포장 같은 데서 비교 실험 해보지 않는 이상 100% 명확한 답을 말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생각하는 답은 비료의 유무가 가장 큰 것 같다. 이 밭에선 화학비료는 물론 공장형 퇴비도 쓰지 않고 인위적인 수분 공급도 극한 상황이 아니면 주지 않는다. 이 밭에서 키우는 모든 작물은 뿌리를 깊고 넓게 뻗어 스스로 영양분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 더디 자라고 잎도 억세다. 이렇게 자라는 작물은 병충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기제를 작동시킨다. 자연 상태에서 식물은 기본적으로 병충해를 이겨낼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다. 이런 작물들을 인위적으로 온갖 비료와 수분을 공급하여 연약하게 키우는 까닭에 각종 병충해가 난무하는 것이고 이를 방제하느라 이러저런 농약들이 동원된다. 악순환의 반복인 것이다.
그래서 난 비료는 덜 나쁘고 농약은 더 나쁘다는 식으로 규정되어 있는 우리나라 친환경 농업정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정하고 있는 친환경농산물 분류는 다음과 같다.
저농약 농산물 : 화학 비료는 권장 시비량의 1/2 이하 사용
농약 살포는 농약안전사용기준의 1/2 이하, 살포 시기는 농약안전사용기준 시기의 2배수 적용
제초제는 사용하지 않아야 함
잔류 농약은 농산물 농약잔류허용기준의 1/2 이하
무농약 농산물 : 유기합성 농약은 일체 사용하지 않음
화학비료는 권장 시비량의 1/3 이하 사용
유기 농산물 : 유기합성 농약과 화학비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재배
전환기간 - 다년생 작물은 3년, 그 외 작물은 2년
오랫동안 이상의 세 가지 분류를 사용하다 올해부터는 친환경농산물 구분에서 '저농약 농산물' 표시는 사라지게 되고 '유기 농산물'과 '무농약 농산물' 표시만 가능하다. 구분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비료 사용은 농약 사용보다 훨씬 자유롭다. '무농약 농산물'의 경우 권장 시비량의 1/3 이하 사용이라고 규정되어 있는데 이걸 누가 지켜야 하는 것일까? 농사짓는 농민이다. 오로지 농사짓는 사람의 양심 문제다. 강제할 수단이 전무한 허무맹랑한 규정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유기질 비료에 대한 규정은 아예 없다. 공장에서 만든 퇴비를 쏟아붓든 축사에서 나온 축분을 쏟아붓든 아무런 제한이 없다. 토양의 물리성에 미치는 영향을 제외한다면 화학비료나 유기질 비료나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작물이 화학비료 유기질 비료 가려가면서 섭취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화학비료는 무조건 나쁘고 유기질 비료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웃기는 소리다. 화학비료든 유기질 비료든 지나치면 안 좋은 건 마찬가지다. 따라서 친환경 농산물 표시에서 농약에 대한 규제는 하면서 (유기질)비료에 대한 규제는 하지 않는 것 자체가 넌센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 얼갈이배추(위)와 열무(아래). 달팽이들이 더러 구멍을 낸다.
병충해가 왜 생기는 것일까? 환경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어떤 요인이 작용했든 근본적으로 작물이 연약하게 자라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연약하게 자라는 원인 가운데 가장 큰 요인이 비료(화학비료든 유기질 비료든) 성분 때문이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영양분을 찾기보다는 과잉 공급된 화학비료나 유기질 비료를 받아 먹고 편안하게 지내다 보니 속성으로 자라 연약하게 된다. 이 연약한 조직에 각종 병충해가 파고드는 것이다. 이 병충해 방제를 위해 농약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니 농약을 치지 않기 위해서는 과도한 비료 공급을 자제하는 게 우선이다. 곧 비료를 주지 않아야 병충해가 안 생기고 그래야 농약을 안 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친환경 농업 정책은 농약은 치지 말라면서 비료는 맘껏 주어도 괜찮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농사는 지어보지도 않은 농학 전공자들이나 정책입안자들이 하는 일이 이렇다.
어쨌거나 올해부터는 친환경농산물 표시에서 '저농약 농산물' 인증이 폐지되었다. 그 동안 친환경 농산물 표시의 대다수가 '저농약 농산물'이었음을 감안할 때 '저농약 농산물' 인증이 폐지되면 과연 친환경 농산물 인증 제도가 제대로 굴러갈지 의심스럽다. 비료는 듬뿍 뿌리는데 농약은 치지 말라고? 도무지 말이 되는 소리라야 말이지... 아마도 내 생각엔 저농약 농산물 인증을 받고 생산되던 농산물은 올해부터는 GAP(Good Agricultural Practices 우수농산물인증제도)로 대체하여 유통되지 않을까 싶다.
GAP 농가의 경우 농약의 종류, 사용량, 사용한 병의 개수와 납품되는 시설의 위생까지 모두 체크하여 데이터베이스로 저장되어 바코드로 관리된다고 하는데 말만 번드레하지 친환경 농산물 인증에서의 '저농약 농산물'과 별반 차이가 없다. 대형 마트의 식료품 코너에 가서 한 번 세밀하게 관찰해 보시라. 진열된 대부분의 농산물에 GAP 마크가 붙어 있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GAP란 "농산물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농산물의 생산, 수확, 포장 단계까지 철저한 관리를 통해 소비자가 안전한 농산물을 먹을 수 있게 인증해주는 제도"다. 이를 위해 '생산에 사용된 농약의 종류, 사용량, 사용한 병의 개수와 납품되는 시설의 위생까지 모두 체크하여 데이터베이스로 저장되어 바코드로 관리'된단다. 이 무슨 '빛 좋은 개살구'란 말인가? 내가 보기에는 GAP란 친환경 인증제도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저농약 농산물'의 숨통을 터 주는 제도에 불과해 보인다. 유기농산물 인증도 엉터리로 관리되는데 농가 스스로 입력한 농약 사용이라든가 비료 사용 기록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지...
'살아가는 모습 > 농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추 심기 (0) | 2016.04.15 |
---|---|
'수미'의 시대, 가장 맛있는 감자는? (0) | 2016.04.13 |
호박, 단호박, 동과 파종 (0) | 2016.04.07 |
마늘, 양파 자라는 모습(4월 5일) (0) | 2016.04.07 |
가을 파종 완두콩, 꽃 피우다. (0) | 2016.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