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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 구원의 길, 구원받지 못한 사랑

by 내오랜꿈 2009.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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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길, 구원받지 못한 사랑 : 비상구는 누구에게 열렸는가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고 병 권


"단 한명의 그리스도인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니체, 『반그리스도』)
"네 죄는 모두 용서되었고 영원한 구원의 길을 가리다. 하나님의 은총을 영원히 잊지 말라 하나님의 규율을 어기지 말고 그 분께 부름을 받는 날 주님과 천사의 축복을 받으며 영원히 살리라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길..."(다나와 토미의 아기 조셉의 세례 장면에서)



1. 거대하게 홈파인 길, 그 끝에 있는 문

"난 일어나 도시의 길을 걸을 것이다, 내 영혼이 사랑하는 그를 찾으러..."

울리 에델이 보여주는 1952년 뉴욕의 브룩클린.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Last exit to Brooklyn)』는 무엇보다도 길에 관한 영화다. 그 길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나서는 길이고, 사랑을 찾아나서다 차에 치여 죽는 길이며, 사랑을 잃은 섹스와 저항감을 상실한 폭력이 난무하는 길이며, 악마의 전장으로 가는 병사들이 모든 인간성들을 내버리고 가는 길이다. 또 그 길은 물건을 실으러 온 사용주의 트럭이 오는 길이고, 경찰이 말을 타고 행진하는 길이고, 파업이 끝난 노동자들이 어깨를 두드리며 걸어가는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모든 인간들이 갈망하는 영원한 구원의 길, 영혼들의 길이다.

길을 막고 있는 것은 문이다. 문으로 인해 길은 닫혀 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병사들은 갱들에 쫓겨 길을 달린다. 그러나 길은 철문으로 막혀 있고 비상구는 없다! 철문에 매달린 그들은 잔혹하게 폭행당한다. 물건을 실으러 온 트럭을 지켜주는 경찰, 노동자들은 철문에 매달린다. 곧이어 경찰들의 폭행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들은 언젠가 다시 열릴 것이고 또 여는 방법이 있는 문들이다. 필요한 것은 적절한 긴장과 갈등, 그리고 협상의 시간들 뿐이다. 그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는 그 길이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구원임을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이 알려진 구원의 길, 브룩클린의 중심 도로는 거대하게 홈이 파인 길이다. 그것은 모든 문제들과 갈등들, 욕망들을 그 홈으로 가두고 단순화하는 길이다. 해결의 유일한 벡터(vector)는 그 길로만 지나간다. 모든 다양하고 작은 벡터들은 그 거대한 단일 벡터로 흡수되고 환원된다.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이 모이는 길, 강도와 폭력을 일삼는 갱들이 모이는 길, 심지어 동성애자들이나 매춘부 등 그 길에 의미를 두지 않는 이들도 모여드는 길이 바로 그 길이다. 역사의 수레 바퀴가 굴러가는 길!

68 혁명이 거대한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이던 날, 가타리(Guattari)는 그 혁명의 패배를 보았는데 나는 그것이 이 영화 속에 나타나고 있는 '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매끄러운 평면에 홈을 판 길'!  68년 5월 13일은 노동조합이 예고한 파업이 일사분란한 성공을 거두었던 날이다. 다른 이들과 달리 왜 그는 그 장엄한 풍경 속에서 혁명의 패배를 보았을까? 

이 운동이 스스로 '역사적 책임'을 자각하는 순간 자유로운 표현과 자발성은 사라지고 말았다.('초자아적인 배치의 집단적 수용). 분파가 다시 떠오르고 모든 분파들은 대표자를 가졌다. 5월 바리케이트 시위는 대표자에 의해서 지휘되고 통제되었다. 위의 운동 양상에서 살폈듯이 이때 결의된 사안들은 중앙의 일사분란한 통제를 받고자 하는 것이었다. 스스로 법과 사적 소유의 준수를 지키려고 하였다. 능동적 파업은 조합관료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변질되었다.(Guattari, [68년 6월말의 토론에서]). 

모든 흐름들은 더 이상 매끄러운 평면 위를 흘러다닐 수가 없다. 물은 수로를 타고 움직이며, 댐 안에 가두어진다. 그것을 막고 있는 것은 수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이 고조될 때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열릴 것이다. 그 수로의 벽은 몹시도 단단하다.

50년대 세계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이끌어온 미국, 그 안에 자리 한 뉴욕에는 맨하탄과 브룩클린이 마치 딴 세계인 것처럼 서 있다. 있는 것은 길 뿐이다. 그 길은 뉴욕의 한 곳 브룩클린에서 뉴욕의 다른 곳 맨하탄으로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물론 브룩클린과 맨하튼의 거리는 지구의 반대 편보다도 멀리 떨어진 계급 간의 거리이다. 그 길을 통과하려는 자와 길을 막고 있는자의 거대한 대립.... 

그러나 애당초 길과 관련 없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그 '대단한 길'은 "할 짓이라곤 걷는 것 뿐인" 그런 길이다. 그들에게 길은 목적이 없다. 어떤 의미와 해석도 없다. 자본가들이 치장한 계급 간의 이동통로나 사제들이 치장한 영혼의 구원의 길이 바늘 구멍보다도 좁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래도 모든 의미를 그 길에 걸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멍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길과 상관없는 자들, 그들은 길을 여느 평면처럼 매끄럽게 대한다. 말을 탄 경과들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클라라에게 길은 그렇게 심각하고 중대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경관과 노동자들이 대립하고 있는 길을 미끄러지듯이 유연하게 걷는다.

물론 그 길은 그것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자들에게 엄청난 폭력을 행사한다. 역사의 수레 바퀴를 미는 자들은 앞을 충분히 살피지 않는다.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자들, 가령 빈센트를 찾아나선 조젯을 보라. 그가 어떻게 거기에 고속의 차량들이 지나간다는 것을 알겠는가? 그에겐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나서야 하는 매끄러운 공간만이 보일 뿐... 해리가 어떻게 가게 집 아들 보비에게 사랑을 표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혹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사태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을 알겠는가? 그는 잃어버린 사랑만이 눈 앞에 있으며 아무런 홈들도 보이지 않는 것을.... 경계가 보이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경계를 준수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 경계들을 잘 알고 이것을 지키며 그것들을 향유하거나 기생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경찰이 설정한 울타리와 철문들에 거칠게 대항하지만 그것은 항상 노동조합과 교회와 가족이 설정한 경계들을 철저히 준수함을 통해서다. 동성애자인 레지나가 가족을 이루고 있지 못하다고 해서 경계들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러한 경계들을 타고 흐르는 돈과 권력에 기생한다.

그 거대한 브룩클린의 중심도로는 매끄러운 공간으로 펼쳐지고 있는 해리와 클라라, 조젯이 그리는 사랑의 선들을 끊어버렸다. 그 사랑의 선들은 바로 그들에게 구원의 길이었으나 끊겨버렸고, 다른 이들이 구원으로 받아들이는 파업 타결과 세례가 새로운 구원의 길로 열린다. 마침내 문이 제껴지고 길이 열린다. 그러나 도대체 기쁜 소식, 복음은 어디로 간 것일까?


2. 십자가와 교회: 천국을 향한 이질적인 길

노조에서 해고되고 레지나에게도 채인 뒤, 해리는 보비를 추행하려다 갱들에게 린치를 당한다. 그들은 해리를 매달았다. 해리가 피를 흘리며 하늘을 향해 절규한다. "오 하나님!" 사랑을 떠나보낸 클라라는 이렇게 소리 지른다. "서양에서 제일 큰 가슴이다". '사랑하는 스티브'의 말을 전하는 작은 글자들의 행렬과 클라라와 섹스를 벌이기 위해 늘어서 있는 남성들의 행렬.... "오 하나님!"

피흘리며 매달리고, 벗겨진 채 내던져 진 해리와 클라라! 음악과 영상 ...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보고 있다. 모든 신성함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모든 죄악에 대해 떠벌이는 자들을, '선택 받은 민족'을 내세우던 자들을, 그러한 현실과 그 현실을 조장하고 거기에 기생하는 사제들을 부정했던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부르짖던 그 이름. "오 하나님!"

죄지은 자들만이 선을 필요로 하며,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만이 그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도대체 선과 악, 죄와 벌이 무엇이란 말인가? 불과 칼로 나누어진 그 절대적 벽이 매끄러운 공간을 흐르는 이들에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기독교에 그토록 적대적이었던 어느 철학자가 '복음을 들고온' 천진난만하고 무구한 젊은 구세주를 이해하고나서 기뻐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구세주인 예수, 그가 들고온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다. 그것은 바로 천국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 어린 아이가 되는 것, 그들의 무구함이라는 것, 어떤 적대도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정전(正典 )-그것이 성서라고 할지라도-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한 해석자도 필요로 하지 않고, 해석을 위한 시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적은 매 순간 일어나며 천국은 매 순간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삶이다.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서의 구원! 그것은 정식이나 율법, 신조들이 아니다. 정식이나 율법, 신조들은 매끄러운 삶의 평면에 파인 홈들이다. 모든 것들이 그곳을 통해 흐르도록 규정하는 홈들....

예수는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다.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있으면서도 그 누구를 비난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그에게 삶은 어떤 저주도 포함하지 않은 무구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삶을 살아왔던 그 긍정의 정신, 그대로 죽었다. 함께 있던 도적이 말했다. "저 사람이야말로 정말 신과 같은 사람,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그렇게 느끼면....너는 천국에 있다. 너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기독교인들에게 '피안'이나 '최후의 심판'이니, '영혼의 불멸'이니 하는 영혼을 고문하는 도구들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그저 신만이 함께 하는 것을, 삶만이 함께 하는 것을....

그러나 복음의 의미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예수가 죽으면서 복음도 죽었다! 복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보복과 벌, 심판대가 등장한다. 이미 와 있던 <하느님의 나라>는 심판의 날 뒤로 옮겨지고, 심판을 위한 율법과 교리, 교리에 대한 해석자가 등장한다. 사제들, 그들은 복음이 흐르는 삶의 평면에 홈을 파는 자들이다. 

그 어떤 거짓 선전에도 불구하고 관리되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며, 해석되고 관리되는 구원은 구원이 아니다! 교회를 거부했던 예수의 죽음은 교회 설립의 근거로 돌변한다. 

성직자들이 만든 교회라는 구원의 길이 구원이 아닌 것은 노동조합이 혁명의 길이 아닌 것과 같다.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정확히 꿰뚫었듯이 조합에게 파업은 사용자들과의 거래에 필요한 '위협용 주머니칼'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칼이 잘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 노동자들은 조합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대표성과 협상력에 결정적인 변수다. 

모든 거래는 무대 뒤에서 일어난다. 성직자들은 영혼의 구원을, 조합의 간부들은 혁명을 현금과 바꾼다. 모든 거룩함과 신성함은 무대 앞에서 선언될 뿐이다. 1950년대 미국은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노동조합은 강해졌다. 그러나 자본주의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성장하면서 썩어간다. 노동조합은 마피아와 쉽게 결탁하고 돈 불리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거래는 어렵지 않다. "트럭의 위치를 알아요..." "원하는 게 뭐지?" "그런 놈들을 골탕 먹이는 데 이백불이면 많나요?" ...."알고 싶은 건 없어. 한 곳에서 너무 많이 쓰지 말고"

노조가 해리를 해고하자 레지나는 해리를 버린다. 클라라는 스티브를 떠나보낸다. 장면은 급격하게 분리되고 찢겨진다. 해리와 클라라가 분리를 경험하고 있는 동안 토미와 다나가 아이를 매개로 결합하고 있다. 토미가 다나의 아버지가 화해로 가는 동안 해리와 클라라는 화해의 변증법에서 일탈하고 공동체로부터 분리된다.

교회가 토미와 다나의 아이 조셉을 축복해주는 동안 노조는 토미와 다나의 아버지를 축복한다. "아기 조셉에게 성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 네 죄는 모두 용서되었고 영원한 구원의 길을 가리라." "여러분 이제 파업은 끝났습니다. 사용주들은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교회의 사제는 영혼의 세계를 축복하고 노동조합의 간부는 물질의 세계를 축복한다. 영혼의 문이 열리면서 공장의 문도 열린다. 토미와 다나의 아이는 그들이 잃어버릴 번 했던 희망이다. 그들은 아이를 보살폈고 가정을 지켰다. 그들은 구원받았다. 그렇다면 해리는 어떻했는가? 아내와 아이를 그저 잠시 지켜보기만 했던 해리는 어떻했는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자, 그는 어떻했는가?


3. 사랑, 금지된 것과 축복 받은 것

심판으로 위협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법률은 책임을 묻지만 사랑은 책임을 묻지 않는다. '사랑하라'는 건 요구도 명령도 아니다. 그것은 은총이다. 사랑한 자에겐 별도의 보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 자체가 최대의 보상이므로... 그러나 왜 어떤 사랑은 축복 받고 어떤 사랑은 저주 받는가? 왜 어떤 사랑은 그 대가를 요구하고, 어떤 사랑은 그저 주기만 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불행하게도 해리는 아내와 자식에게서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노조 사무실은 아내로부터 그가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공간이다. 그는 함께 자고 싶어하는 아내를 거칠게 내친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아내에게서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조젯에게서, 그리고 이후에는 레지나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정확히 그 까닭을 알지는 못하지만 해리는 그들에게 끌린다. 하기는 사랑에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레지나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해리는 자신의 사랑과 교환되었던 것이 레지나에게는 돈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배고프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면 되는' 소박한 해리의 사랑은 '돈 생기면 다시 오던지... 더 이상 괴롭히지마'라는 레지나의 싸늘한 목소리로 절단된다.

해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절망한다면, 사랑을 돈 버는 수단으로 알았던 클라라는 그렇지 않은 사랑을 만났던 자신이 그것을 좀더 빨리 깨닫지 못했던 것에 절망한다. 클라라를 사랑한 병사는 한국 전에 참여하는 이제 갓 입대한 신출내기다. 스티브 역시 이 도시에서 갈 곳을 잃은, 그래서 할 일이라고는 "걷는 것"밖에 없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스티브와 클라라에게 길은 매끄럽게 돌변한다. 그들이 "걷는 것"은 미끄러지는 것이다.  "호텔은 멀어요?" "두 정거장 쯤인데 걸어갈 수가 있어요." 그들이 걷는 길은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걸어야 하는 길도 아니고, 옆길로 새면 안되는 그런 심각한 길도 아니다. 그것은 길이기를 멈추고 사랑의 공간이 된다. 그 길은 호텔의 방과의 차별성이 없다. 사랑은 길과 호텔 방을 가리지 않고 흐른다.

해리나 클라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젯은 정해진 길을 따라 걷는 데 서투른 사람들이다. 해리는 공터에서 린치를 당하고 클라라는 윤간을 당하며, 조젯은 차에 치여 죽는다. 길을 따라 올바르게 걷는 사람은 토미이다. 사실 토미 뿐 아니라 다나, 다나의 아버지, 다나의 삼촌, 그리고 주변에 있는 노동자들 모두 그 길에 대해 알고 있다. "이젠 어떻게 할거지? 다나는 창녀가 아냐."  "알아요. 착한 얘에요." "양가집 규수지." "그렇니까..."  그렇니까 어떻게 해야할 지는 모두가 알고 있고 토미도 그 길을 들어선다. 토미와 다나의 아이. 그 아이에 대해서도 홈패인 길이 있다. "다나가 아들을 낳았어요" "하하 축하해. 이제 할아버지가 됐구만" "먼저 세례를 받게 할 거야. 그 다음엔 파티를 열고.... 너와 제수씨가 대부와 대모를 해라". 노동조합이 지도하는 파업이 홈패인 길을 따라가듯이, 토미와 다나,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홈패인 길들을 따라 간다.

가정을 외면한 해리와 가정을 이루는 토미, 정숙하고 착한 양가집 규수 다나와 남정네들과 놀아나는 창녀 클라라.... 노동조합과 교회는 토미네로 달려가 그들을 축복하고 해리와 클라라는 신을 찾는다. "오 하나님!"


4. 그들만의 천국, 혹은 천국보다 낯선: 대립보다도 깊은 이질성의 세계

철문을 마주보고 대립하는 사용주와 경찰, 그리고 노동조합이 있다. 다나의 일 때문에 주먹 다짐을 하는 토미와 다나의 아버지가 있다. 참전하기 전에 욕정을 풀고가려는 군인들이 있고, 그들에게 강도짓을 하는 갱들이 있다. 토미와 다나의 아버지의 싸움은 화해를 위한 일종의 몸짓이다. 정(正)으로부터 반(反)을 향해 맹렬히 돌진할 때조차 우리는 그것들이 화해의 제3항, 즉 합(合)으로 나아갈 것임을 믿는다. 

역사의 수레를 미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나온 길만을 볼 뿐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항상 뒤늦게 온 철학자들에 의해서, 성직자들에 의해서 해석될 뿐이다. 하지만 그 수레를 타지도, 밀지도 않은 사람들은 어떤가? 길에 박힌 바퀴 자국의 홈을 더 이상 따라가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가? 그 수레의 도착 지점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은 어떤가? 다수의 대열을 따라가지 않은 소수자들은 어떤가?

경찰과의 대립을 앞둔 길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온갖 사람들이... 긴장감이 고조되고 노동조합과 경찰 모두 인력을 충원하고 있다. 클라라를 보라! 모두가 서 있는 그 공간을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는 클라라를 보라! 시위대에게 그토록 위협적인 경찰들이 탄 말들은 클라라에게는 축제 때 퍼레이드를 벌이는 말들과 차이가 없다. 시위대에게 경찰의 전투기계인 말들이 클라라에게는 자신의 워킹을 돋보이게 해주는 장식들에 불과한 것으로 된다. 

이 보다 더 깊은 이질성이 어디 있을까? 노동자들과 경찰이 대립하면서 함께 느끼는 긴장감을 클라라는 느끼지 못한다. 대립보다도 깊은 이 이질성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러나 여하튼 이 이질성의 세계는 무참히 짓밟혀지고 말았다. 그들은 더 이상 미끄러지며 여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세계가 축복으로 맺어지고 새로운 생명을 키워가며, 일터로 돌아가고, 마침내 구원되고 있는 동안에 다른 한 세계는 철저히 부숴지고 망가졌다. 

클라라를 짝사랑하는 오토바이 소년은 두 세계의 간극에서 어찌할 줄 몰라 울부짖는다. 새로 구입한 오토바이는 내 시동이 걸리지 않다가 파업의 종결을 알리는 환호성과 함께 시동이 걸린다. 계속 멈추어져 있던 오토바이가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것을 타야할 첫 번째 사람은 오토바이를 탈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영화가 어느 순간부터 천국와 지옥, 토미-다나 커플과 해리, 클라라를 급속하게 오가기 시작하면서 두 세계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천국에서 출발한 오토바이는 지옥 앞에서 멈추었다.

천국으로 가는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 아니 지옥에서 벗어나는 '비상구'는 어디에 있을까? 영화는 그 밝은 길을 계속해서 보여주지만 관객들은 '비상구는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문 앞에서 유쾌하지만 관객은 스크린 앞에서 슬퍼한다. 

다음날 모든 갈등들은 해소되었고, 공장 문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홈 안에서 순수해졌다. 이제 문이 열린다. 그리고 영화가 닫힌다!

"구세주의 삶은 실천을 통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 ... 어떤 상태에서도 '천국에 있다'고 느낄 수 없으면서 '천국에 있다고' 느끼기 위해, 그리고 '영원하다고' 느끼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깊은 본능, 다름아닌 그것이 바로 구원의 심리적 현실일 뿐이다. 그것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은 아니다."(니체, 『반그리스도』,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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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연구실 강좌 : "필로시네마(4) : 욕망하는 영화기계, 탈주하는 소수자" 제5강 / 2000년 4월 7일 / 강사 : 고병권

불특정 다수에게 보이는 글이므로 원글에서 각주나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임의로 '가위질'했으며 문맥도 약간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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