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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그 일상적 파시즘에 대한 사실주의 보고서 - 영화 『세친구』에 대하여

by 내오랜꿈 2009.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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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그 일상적 파시즘에 대한 사실주의 보고서
영화 『세친구』에 대하여



1. 하나의 관건: 카메라는 현미경이 될 수 있는가?

세계의 총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예술적 시도가 곧잘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현실을 가장한 이데올로기로 하여금 말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작품들은 현실 혹은 실재를 내세우지만 그 현실이나 실재는 '이데올로기적 현실'이고 '이데올로기적 실재'일 뿐이다. 현실에 대한 리얼리즘의 변증법적 운동! 현실에서 논리학이 도출된 것이 아니라 논리학에서 현실이 도출된다!

세상에 대한 하나의 지적 왕국을 건설한 회색 빛의 늙은이에게 인식된 세상은 이미 그 늙은이만큼이나 죽음에 가까이에 있다. 세상은 어떤 흥미 진진한 변화도 없으며 인식된 원리 속에서 모든 변이의 힘들은 질식할 것만 같다. 총체성이 군림하는 변증법의 왕국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격은 유머와 조롱이다. "변증법은 헐렁이는 의복이다!" 누구나 입을 수 있지만 누구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옷!

세상을 다 낚아 올리려는 그 큰 그물에 걸릴 힘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세상을 기어 다니는 많은 힘들이 다 도망간 뒤에 건져올린 세계는 무미건조한 늙은 세계일 뿐이다. 리얼리즘이 실패하는 이유는 망원경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현미경! 그것이 필요하다. "현미경을 통해서나 발견될 수 있는 미세한 차이"를 가지고 새로운 유물론의 전통을 찾아냈던 맑스의 눈! 세상에 관한 탐사기로서 그 미세한 눈을 카메라는 가지고 있는가?

세상을 그 속까지 뚫어보았는지, 세상의 본질을 드러내었는지에 그런 것에 상관없이 임순례의 리얼리즘은 '리얼리티', 즉 현실을 포착하는 섬세한 눈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카메라를 통해서 본 것, 바로 그녀의 필름 안에는 우리 사회를 기어 다니는 다양한 힘들이 찍혀있다. 그녀는 특별한 것을 보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특별한 것이 찍혀 있다.

아이들은 학교를 가고, 청년들은 군대를 가고, 어른들은 직장에 다니고, 지하철은 변함없이 다니고 있으며, 정치와 경제는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건만, 그녀가 보여주는 미시 세계의 힘들은 충돌하고 튕겨나가고, 상처입고, 죽어나가고, 방황한다.

임순례가 그곳에서 본 것은 전쟁이라기 보다는 학살이다. 질서에 부합하지 않은 힘과 욕망에 대한 잔혹한 학살! 견디지 못하는 것들은 떨어져 나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암울함이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경직되어 있어서, 나약한 사람들은 견고한 사회구조에 견디지 못하고 도태된다. 『세친구』는 내가 생각하는 사회를 그린 것일 뿐이다. ... 우리 사회는 폭력으로 만연해 있다. 우리는 크고 작은 폭력에 익숙해져있다. 외부로부터 받는 폭력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다. 『세친구』속에 등장하는 폭력은 단지 생활 속의 폭력을 자연스럽게 보여준 것일 뿐이다." 

'단지 자연스럽게 보여준 것일 뿐'이지만 '자연스럽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인공 매체가 자연을 생산하려고 할 때 자연은 인공적인 것의 극한에 존재한다. 관건은 카메라라는 인공적 기계가 우리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드러낼 정도로 충분히 섬세한가이다. 잘못하면 TV에 자주 등장하는 '재현 드라마'처럼 엉성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2. 군대, 어른 사회로의 진입 캠프

섬세한 "기계의 눈"을 통해서 본 미시적 세상은 욕망의 영역, 힘들의 영역, 질료의 영역이다. 생화학자에게 인간은 다양한 질료와 수 많은 화학기계들로 이루어진 거대 공장으로 보이듯이 영화를 통해서 보는 세계는 거대한 기계 장치다.

질료들은 강고한 도관을 따라서 가정과 학교, 일터를 흘러다니다 결국 그 사회에 적합한 부품들로 생산된다. 한 공정을 거친 질료는 다른 공정에 적합한 형태로 변질되며, 결국에 가서는 그 사회에 적합한 부품, 즉 '바람직한 어른'으로 생산된다. 불량 부품은 다시 개량화를 거치며, 개량화에 실패한 경우 파괴한다.

구부러진 것을 반듯하게 펴고, 삐딱한 것을 바로 세우며, 불량한 것들을 폐기처분하는 이 거대한 장치를 뭐라고 부를 것인가? 임순례는 '군대'를 지목한다. 조금의 이의도 제기할 수 없고 오로지 명령이 내려왔으면 그대로 실행하는 '기계'와 다름 없는 조직! 아니 사실 상의 기계! 가장 효율적으로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 그러면서도 가장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는 기계! 군대가 아니고 그 어떤 기계에서 이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Weber)는 근대 사회의 합리적 훈육(discipline)의 근원지로 수도원과 함께 군대를 지목하였다. 인간을 한 사회에 적합하게 만드는 가장 효율적인 길들임의 장치가 군대라는 것이다. 베버에 따르면 '훈육'은 군대에서 장군들의 평가 덕목이었는데, 얼마나 효율적으로 많은 병사들을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만들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다고 한다. 거기서 많은 훈육의 방식들이 개발되었다. 모든 비합리적 충동의 힘을 규제하기 위해 군대는 시간과 공간을 분절화하고,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훈련을 실시했다. 이것이 근대 공장(과 학교)로 확산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군대는 '합리성'에 못지 않게 '비합리성'과 '노골적인 폭력'의 근원이다. 합리성은 표면에만 존재하며, 내부반에 있는 관물대의 이면처럼 모든 지저분한 것들과 삐뚫어진 것이 그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반듯한 명령의 선에는 돈과 권력이 흐르며, 질서 위반에 대한 공포가 거대한 공격 함성 뒤에 자리한다.

강제된 권력 앞에서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무기력함을 군대는 훌륭한 자격과 자부심으로 바꾸어 놓는다. 어떤 능력의 신장도 없었던 그 긴 시간을 군대는 훌륭한 자격증으로 탈바꿈 시켜놓는다. '군대를 다녀오기 전에는 세상을 알지 못한다!' 군대가 길들이기 전의 행동들은 철 없는 짓에 불과하다.

생의 일부를 빼앗긴 자들의 분노를 국가는 부분적으로는 갔다온 것에 대한 자부심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갔다오지 않은 자들에 대한 원한에 찬 공격과 멸시로 바꾸어 놓는다. 군대로부터 '생물학적'으로 배제된 여성은 사회로부터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배제된다. 군대는 이 사회의 중심적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장치이다. 이른바 '정상적인 어른'이 되는 관문인 셈이다.

영화 『세친구』는 군대에 가고 싶어도 못가는 친구('섬세'), 군대에 빠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결국 빠지는 친구('삼겹살'), 군대에 가서 청력을 잃게 된 친구('무소속')의 이야기다. 다음의 지적은 분명히 옳다. 

"군대는 남성만의 성역이며 그 당위의 과정을 거쳐야만 진정한 남자로 거듭날 수 있다. 물론 이 기준에 미흡하거나 엇갈리는 사람은 사회에서 격리될 수밖에 없다. 영화 『세친구』의 세 친구들은 모두 이 기준에 부합되지 못하는 낙오자이다. .... 이들 세 친구 모두는 우리의 무의식속에 규정지은 성역할 고정관념을 수용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의 특성과 정체성을 무시당한 채 단지 남성으로서의 자질과 의무만을 강요당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는 '어른(남자)-되기'의 관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영화가 '아무나 군대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것도 틀리지는 않다. 특히 '섬세'라는 친구의 예는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법을 통해서만 '준법 시민'이 있다는 것과 함께 법을 통해서만 '범법자'도 생산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군대는 단순히 상이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 주는 이름표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주체성을 생산하는 기계 장치다. 군대는 군대에 들어간 사람들을 '어른(남자)'로 생산하는 것 못지 않게, 여성을 대표로 하는 군대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을 '어른(남자)'로 생산한다. 다만 후자는 '결여된' 어른(남자), '부족한' 어른(남자)으로 생산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사회에서 '성(sexuality)'은 하나, 즉 '남성'만이 존재한다는 지적은 올바르다. '상실된 남성'으로서의 '여성'. 마찬가지로 "계급은 하나만 있다. 그것은 보편주의를 사명으로 하는 부르주아다" 혹은 이 사회는 노예의 사회다. "지배하는 노예와 지배받는 노예". 우리 사회는 군대를 다녀온 자와 다녀오지 못한 자를 모두 노예로서 생산한다.

'아무나 군대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문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만약 이 영화를 요약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군대는 어디에나 있다' 혹은 '우리 모두는 군대 안에 있다'는 문장이 적합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군대를 거친다. 전방 철책선에서건 '사우나실'('삼겹살')에서건 군대를 거친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더라도 여성은 '어른(남성)-되기'에 성공(?)한다.

군대는 청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수료증이라고 하겠다. 이 영화에서 군대가 등장하는 시간을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서 군대를 다루지 않고 있는 시간을 찾아내는 것은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정도다. 베버가 군대의 확장으로서 공장 (그리고 학교)를 이해시켰다면 임순례 감독은 가정과 학교, 일터를 통해서 군대를 이해시키고 있다.

"교사가 특히 신경쓰고 있었던 것은 어린이들에게 어떤 종류의 법이나 규율을 이해시키는 일로서, 정렬하거나 요구에 따라 말하는 것 등을 가르쳤다. 이런 형태의 학교는 일정한 생산 조직 양식(가령 대중의 군대적 조직화)에 일치하였다." 한 공정은 이전 공정에 대한 점검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여기가 너희 집 안방인 줄 알아? 가정 교육을 도대체 어떻게 시킨거야?" "아직도 여기가 사회라고 생각하는 거냐? 요즘 새끼들은 빠져가지고..."

학교는 군대를 예비하지만 군대는 다시 사회를 예비한다. 군대를 통해서 생산된 사회는 '군대 사회'이다. 감독은 군대를 통해서 생산된 사회 속에서 '치밀한 통제'를 보기 보다는 '끔찍한 폭력'을 보는 것 같다. '이유도 없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는'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 오로지 명령만이 존재하는 사회. 우리는 정말로 '세친구들'이 군대를 경험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3. 군대로 조직되는 일상: 아직 들어와 있지 않은, 그러나 이미 들어와 있는

사실 '어른-되기'의 '진입 캠프'로서의 군대의 이미지는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젊은이에게 '자네는 병역기간 중에 훈련받아 한 사람의 어른으로 양성될 것이다...'라고 예고된 시대는 이미 과거다". 그것은 군대가 축소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일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부대 안에 있는 군대 역할이 줄어든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부대 밖에 있는 군대의 역할이 강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고등학교의 졸업'은 하나의 부대를 제대했음을 의미할 뿐이다. '고등학교의 졸업'이라는 말이 이 사회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은 계급에게도 없는 제약이 청소년들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18세 이하 금지!' '졸업'은 자유의 시작이다. 술과 담배로부터 야한 영화에 이르기까지....

"담배 피는 것 처음 보세요? (졸업장 내보이며) 우리도 이제 고등학교 졸업했다구요."

그렇지만 우리는 '세친구들'의 자유를 거의 목격하지 못한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그들이 당하는 폭력이며, 그들에게 강요되는 질서다. "졸업 후, 입영 전"이라는 현실에서 부여된 물리적 시간은 형식적으로만 존재한다. 간극은 전혀 없다. '아직 입대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미 입대하였다'. 심지어 '입대할 수 없었지만', '신검에서 분명히 떨어졌지만' 그들은 확실히 군대에 복무하고 있었다. 군대로 조직된 사회에서 복무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신검 통지서, 혹은 입영 통지서는 형식적인 호명의 표시일 뿐이다. 알튀세의 호명처럼 자신의 이름이 비록 불리지는 않았다고 해도 "돌아보는 모든 사람들은 호명된 것이다". 영장에 응하든 응하지 않은 주체는 호명된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았어도 우리가 호명될 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 부를 것'이라는 호명에 대한 준비가 항상, 어디서나, 누구에 대해서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직 들어가지 않은 군대, 그러나 이미 들어가서 복무하고 있는 군대를 우리는 세친구들을 통해 반복해서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반복을 통해 군대로 조직된 사회의 배치를 읽어내게 된다.

1) 무소속의 경우

'무소속'은 만화를 그리는 친구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지만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친구다. 왜냐하면 대충 눈 감고 넘어가야하는 세상의 구린 일들을 못 참기 때문이다. 무소속에게 결합하고 있는 군대의 선은 일터와 학교다.

그가 만화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찾았던 '선생님'의 작화실은 군대의 내무반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의 일이란 잔심부름과 복사하는 일이다. 순대 심부름을 제대로 못했다고 선배가 내뱉는 말은 군대의 조교와 상급자의 말투에서 반복된다.

(화실에서)
"얌마, 이거 간 맞어 안 맞어, 맞어 안 맞어 임마!"
"전 분명히 아줌마한테 말씀 드렸어요."
"맞어 안 맞어 그것만 얘기해!"

(훈련장에서)
"일어나, 뒤로 취침, 앞으로 취짐, 기상....잘 할 수 있습니까?"
"저어.."
"누가 말대답하라고 했나.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버지는 말 수가 극히 적다. 그러나 무소속이 잘 듣지 못하는, 다시 말해서 청력이 좋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군대 시절에 간첩을 사살한 선생의 이야기를 충실히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했다. 선생의 주먹에 맞아 한쪽 귀의 청력이 많이 떨어졌다. 똑같은 모습은 등장 인물을 바꾸어 다시 재현된다. '소원 수리'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을 것이라며 상급자는 무소속에게 폭행을 가한다. 양복에서 체육복으로 바뀌었고, 교실에서 내무반 근처로 바뀌었을 뿐 똑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무소속'은 완전히 청력을 상실하고 만다.

짬밥 수에서 앞서는 선배와 부대의 상급자가 차지하는 위치는 동일하며, 폭행을 가하는 학교의 선생과 같은 폭행을 가하는 부대의 상급자의 위치는 동일하다. 학교와 일터에서의 동일한 배치가 군대에서 확인되며, 그것을 확인되는 순간 '무소속'은 파괴된다. 무장 탈영병의 총기 난사가 졸업식날 차를 부수는 아이들의 행동과 다르다면 얼마나 다른 것일까?

2) 섬세의 경우

섬세에게 있어 군대의 선은 가족과 연결되어 있다. 연병장에 늘어선 신병들을 늘어놓고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하는 부대장은 남매를 앉혀놓고 주정을 부리는 아버지에게서 반복된다. 그가 복무하고 있는 곳은 가정이다.

"월남에 있을 때가 참 좋았는데, 야 이 놈아, 이 애비 한 좀 풀어주라. 제대하고 나서 이 것 저 것 대해보구. 다 망하는 이유가 뭔지 아니? 그게 다, 공부가 짧아서 그래.... 너 애비 친구 중에 장상사라고 알지? 그 장사 아들 놈이 육사에 들어갔다고 만나기만 하면 뻐기는데, 눈 꼴 셔서 볼 수가 없어...."

월남전에 참전한 아버지는 취한 입을 통해 계속해서 이 사회의 메시지를 성실히 전달한다. 그는 몸과 마음을 제대로 가눌 수조차 없을 때 이 메시지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전달한다.

고개를 뻗뻗하게 치켜든 '무소속'에게 가해진 폭력이 신체적인 것으로 귀결되었다면 부드럽고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섬세'에게 가해진 폭력은 신체적일 때조차 '정신적인 것'으로 귀결되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폭력에 반발하면서 다시 폭력을 선택한 '섬세' 동생의 폭력.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섬세'에게 가해진 가정을 벗어난 사회의 직접적 폭력. 우리는 이 나중의 폭력이 불량배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해서 반국가적이거나 반제도적인 것으로, 혹은 다수자의 메시지에 반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취한 아버지가 정확히 메시지를 전했듯이 흉칙한 폭력배가 사회의 메시지를 정확히 전한다.

'섬세'에게 가해진 폭력은 '여성성'에 대한 폭력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판단에 쉽게 동의해선 안 된다. '여성성'이 '소수성'을 표현할 때만, 다시 말해 '여성-되기(becoming-woman)'로 자리할 때만 그 판단에 동의할 수 있다. '섬세함'을 '여성'을 정의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동성애'를 정의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영화의 뒷부분에 나오는 '동성애자' 만큼이나 사태를 오해하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섬세함'은 '비남성성'으로 읽혀야 한다.

"본래적인 여성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성적 극이란 없으며, 영원한 여성성의 극도 없습니다. 남성-여성의 대립은 계급이나 카스트 등의 대립에 앞서 사회적 질서를 근거짓는데 기여합니다." "여성적-수동적/ 남성적-능동적이란쌍은 권력에 의해 일종의 의무적인 준거로 남아서, 여성 되기로 하여금 욕망의 강렬도를 설정하고, 국지화하고 영토화하고 통제할 수 있게 합니다. 이 배타적인 양극성 밖에서는 어떤 구원도 없거니와 아니면 오히려 무의미로의 전락, 즉 감옥이나 병원, 아마도 정신분석가에게 보내지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섬세'라는 친구는 이름 그대로 섬세할 뿐이다. 문제가 된 것은 그의 '여성성'이 아니라 그가 남성성의 침범하고 위반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은 '여성성' 대한 탄압이라고 읽기 보다는 '소수성(minority)'에 대한 탄압이라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3) 삼겹살의 경우

'삼겹살'의 경우엔 '무소속'이나 '섬세'에 비해 군대와 다소 약한 선을 타고 있다. 그것은 그가 2kg의 차이로 군대를 면제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군대가 작동하는 방식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물론 군대의 선이 약하게 드러난다고 해서 그의 육체를 둘러싸고 있는 억압의 선이 결코 약한 것은 아니다).

'삼겹살'은 영화의 묵직한 구성을 느슨하게 하는 편안한 캐릭터다. 삼겹이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연출하였다. 영화 시작단계에서는 삼겹은 세 친구 중 가장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촬영이 진행되면서 '이거 영화가 너무 가라앉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비중을 늘렸다. 

삼겹살은 군대를 면제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먹어대는 비만의 신체의 주인공이다. 그는 비디오를 좋아하지만, 무소속이나 섬세처럼 자신의 일로써 삼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신체는 어느 곳에서나 혐오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군대에서 조차...

그는 군대를 거부했지만, 사회 역시 그를 거부했다. 군대의 신체 검사는 매우 의미 심장하다. 건장한 젊은 신체를 골라내는 일. 전국의 젊은이들을 저울대에 올려놓는 저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신체에 대한 매우 복합적이고 흥미있는 이야기를 진척시킬 여지를 남겨두기는 했지만 이 영화 속에서 그 의미를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다만 '불필요한 말'을 미리 잘라내거나 '불필요한 생각'을 없애는 것만큼이나 '불필요한 살'을 없애라는 요구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해두고 넘어가자. 

"무슨 일이냐? 야, 너 주유소는 어떡하고..."
"때려치웠어, 더러워서. 원, 체질에 안 맞아서 못하겠어."
"좀 참고 해보지..."
"야, 주유소에서 기름만 잘 넣어주면 되잖아...거기가 무슨 군대냐, 인사 제대로 해라. 모자 똑바로 써라. 보수나 많이 주면 내가 말을 안해요."

"차라리 군대를 갈 걸"이라고 말하지만, 그 역시 살과 전투를 벌이고 있으며 땀을 뻘뻘 흘리며 사우나실에서 훈련을 거듭한다.


4. 들을 수 없는 것과 듣지 않는 것

일상의 삶이 그렇듯이 영화는 화려하게 시작하지 않았고, 특별한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리얼리티'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다. 삶은 지속될 것이며, 장치들은 계속해서 작동할 것이고, 국가는 계속해서 호명해댈 것이다. 삶이 그렇게 지속된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영화는 삶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암울하다.

'무소속'은 청력을 잃고 친구와 대화의 끈을 놓치며 길거리에서 수레에 부딪힌다. '섬세'의 아버지와 달리 '무소속'의 아버지는 말이 없다. 이제 그의 아들은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그것은 커다란 비극이다. 암울한 영화적 결론을 탓할 수는 없다. 차라리 암울한 현실을 탓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언가 다른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고 해도 뒤돌아볼 수밖에 없는" 강력한 호명의 체계 속에서도 그는 다시는 '호명을 들을 수 없다'. 가장 불행한 방식으로 '무소속'은 호명의 체계를 벗어난 것이다.

영화 『꽃잎』에서는 6시 땡과 함께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모두가 제자리에 우뚝 서서 국기를 향하고 있는 동안 광인이 된 주인공만이 그들 밀치며 흘러다닌다. 모두가 호명을 받고 직선으로 서는 동안 그만이 그 사이를 흘러다닌다.

푸코는 '아픈 것'과 '미친 것'을 구분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분열자 분석의 임무'에서 말했던 것과 같은 정신병으로 변질되지 않는 광기! 그렇다면 우리에게 청력을 잃지 않은 채 호명을 '듣지 않는 것'은 진정 불가능한 일일까?

수유연구실 강좌 : 필로시네마(4) : 욕망하는 영화기계, 탈주하는 소수자. 5강 / 2000년 4월 7일 강사 : 고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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