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르헤스의 『픽션들』
보르헤스는 철학과 문학 '사이'에 있다. 즉 그는 철학을 문학화하며, 동시에 문학으로 철학을 한다. 가령 『픽션들』의 거의 모든 작품들은 각기 하나의 철학적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백과사전을 통해 하나의 세계, 하나의 새로운 혹성을 만들고자 했던 시도를 다루고 있는 「틀뢴...」은 백과사전을 통해서 모든 지식을 담고 배열함으로써 진리에 이르고자 했던 18세기 계몽주의의 꿈을 슬며시 뒤집음으로써 지식과 현실의 관계에 관한 우리의 계몽적 통념을 극한으로 몰고 간다. 지구 상의 어떤 지점에 존재하는, "깨달음 자체인 어떤 사람"을 찾아가는 「알모따심을 찾아서」는 그렇게 "찾아다니고 있던 자가 찾는 자가 동일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불교철학적 '신성' 혹은 내재성을 다루며, 하나의 동일한 텍스트가 상이한 외부적 조건을 통해서 전혀 다른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텍스트와 외부성의 문제를, 혹은 연기적(緣起的) 조건의 문제를 다룬다. 루이스 캐롤의 암시를 확실하게 밀고 나간 「원형의 폐허들」은 타인의 꿈 속에 존재하는 사람을 통해서 현실과 꿈의 관계를 다시 철학적 주제로 부상시킨다.
또 스스로 카프카에 대한 영향을 명시하고 있는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추첨의 모든 단계에 우연을 개입시키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우연의 영원한 놀이'라는 니체적 관념이 카프카가 말하는 '무한한 연기(延期)'와 얼마나 잇닿아 있는가를 보여주고,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회고적 시간구조를 가진 소설의 형식을 통해서, 반대 방향의 '무한한 연기'를, 혹은 상반되는 가능성이 공존하는 다양한 잠재성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우주를 하나의 도서관으로 변형시킨 「바벨의 도서관」은 수학적 존재 내지 수학적 진리 개념을 수학적인 형식으로 다룸으로써 존재와 진리, 지식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되던지고 있다(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식의 증명에 대한 풍자; 카발리에리의 역설을 이용하여 무한한 도서관을 한 권의 책으로 바꿀 수 있다는 주석--이는 나중에 「모래의 책」에서 다시 다루어진다). 아마도 가장 빈번히 인용되는 작품일 「끝없이 두 갈래로 가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상이한 가능성을 갖고 펼쳐질 시간적 세계를 정원과 길이라는 공간적 형상으로 변형시켜 병치시킴으로써 시간에 관한 선형적 관념을 전복하고 있다.
보르헤스가 가장 빈번하게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인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완벽한 기억, 순수한 기억이 그 자체로는 사고할 수 없는 무능력을 뜻할 뿐이라는 점을 드러내면서 기억에 관한 통념을 극한에서 뒤집는다. 언표주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언표행위의 주체로 하여금 언표주체 내지 언표대상이 되게 하여 진행되는 「칼의 형상」에서는 바로 그 전도된 주체의 위치를 이용해서 억압적 세계, 비열하고 치졸한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대개는 언제나 남의 탓을 하게 마련인 '나 자신'이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고백의 형식을 벗어난 고백), 들뢰즈가 배신과 속임수의 구별을 명확히 하지 못했다고 비판한 바 있는 「배신자와 영웅에 대한 논고」에서는, 배신자와 영웅의 역설적 단일성을 통해서 모든 외부를 삼켜버리는 목적론적 관계에 대해 풍자하고 있다(목적론에는 외부가 없다!). 「비밀의 기적」에서는 시간의 선형성, 시간의 외재성, 시간의 단일성에 대한 반문을 정지된 시간의 형식으로 체험적 시간을 독립시키는 방식으로 던지고 있으며, 비밀의 문제를 다루는 「불사조 교파」에서는 가장 완벽한 비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유지되는 비밀이란 모든 말에 의해 지칭되는 비밀, 감추어지지 않은 비밀이라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소설들에서 허다하게 많은 책들을, 때로는 있는 저자의 있는 책을, 때로는 있는 저자의 없는 책을, 또 때로는 없는 저자의 어떤 책을 뒤섞어 인용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상호인용의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확실성의 관념이나 문헌학적 진리 관념을 조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은 인용과 재인용이며 그것의 변용일 뿐이라는, 다시 말해 인용과 변용이 바로 생산이고 창조라는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거의 모든 소설을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로 만들고, 그 텍스트들에 자신 스스로 등장하기도 하고 '나'와 '보르헤스'라는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기도 하면서 전통적인 저자의 관념을 깨고 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자기 소설의 문체에 대해 연구하려는 시도에 대해 가볍게 비웃는다. 즉 자신은 문체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간결함과 응축(모든 말들을 다 담는 한 마디 말을 찾는 시도가 빈번하게 반복된다), 그런 만큼 별다른 수사 없이 지극히 간결하고 평이하게 쓰여진 문장들.
어쨌거나 보르헤스가 다루는 이런 주제들의 일부는 많은 경우 2-30년 정도 지난 후,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 의해 철학적인 담론으로 다시 제출된다. 그런 점에서 놀라운 비동시대성(선구적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나중에 보니 자신이 보르헤스의 정원에서 놀고 있었다"고 말한 바 있던 푸코는 『말과 사물』의 서문에서 보르헤스의 글을 직접 언명한 바 있지만, 가령 「저자란 무엇인가」라든가 「도서관 환상」과 같은 글에서 보르헤스적인 주제를 철학적 진지함을 갖고 천착하고 있다. 나중에 몇몇 불만스런 점들에 대해 촌평하기도 하지만,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니체의 영원회귀를 다루면서 보르헤스를 인용하고 있다.
해체주의자들이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역시 보르헤스에 대해 경탄하면서 자신들의 선구자로 만들기에 바쁘다. 특히 하나의 양식적 특징을 가시화하고자 했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사후적으로 문학에서 찾아냈던 '기원적' 저자가 보르헤스였다는 것은 잘 열려져 있다. 덕분에 그는 한 사조의 시조가 되었지만, 이는 자신의 근본적인 사유를 단순히 저자의 해체와 상호텍스트성의 배경으로, 패스티쉬와 키치의 일종으로 만들어버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눈이 멀도록 읽어댄 책들로, 마치 혹성 틀뢴을 만들어낸 사람들처럼 백과사전적인 지식으로 보르헤스가 만들어낸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그 전복적인 사유를 통해 그가 사유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던지는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차라리 보르헤스를 문학자가 아닌 철학자로, 혹은 어떤 화두를 들고 사유하는 사상가로 다루어보는 게 더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해준다.
2.허구적 세계의 진실
1)진리와 허위의 경계
-백과사전: 또 다른 바로크 인? "표상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
cf.고전주의 시대 표상의 에피스테메와 백과사전, 계몽주의(푸코, 『말과 사물』)
-->틀뢴과 같은 허구적 세계를 그런 방식으로 만든다면? 이로써 보르헤스는 표상 뒤를 들추는 근대적 질문이나 표상의 근거를 찾아 무한소급하는 고전적 질문 모두와 달리, 허구와 현실의 경계선 상에서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에 관해 질문한다. 이로써 진리와 허위의 경계 자체가 문제화된다:
-->참이라고 답하는 것의 부당성(eg.「신학자들」의 아우렐리아노); 허위라고 답하는 것의 부당성(eg.'엠마 순스'의 진실성/허위성); 차라리 보르헤스는 허위의 유효성과 그 유효성의 허망성을 포착한다(「죽음과 나침반」에서 사태를 아는, 하지만 그래서 죽는 뢰로트; 「배신자와 영웅...」에서 영웅적 처형; 「매수」에서 공정성의 이용과 '허망함'이라는 죄)
--그렇다면 문제는 어떤 것이 진실인가 아닌가, 허구인가 아닌가, 혹은 지식인가 사실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행사하는 유효성과 그것의 한계('허망성')를 보는 것이 아닌가? cf.푸코, 『지식의 고고학』.
2)환(幻)으로서 세계
-보르헤스가 환영의 세계을 만드는 요소들: 꿈(「원형의 폐허들」, 「꿈」); 거울(「거울과 가면」); 지식(책, 도서관: 「틀뢴」, 「바벨의 도서관」, 「모래의 책」); 기억(「기억의 천재 푸네스」, 「셰익스피어의 기억」); 미로(「아베하깐...」, 「두 왕과 두 개의 미로」) 등등.
-보르헤스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환영maya이다. 그것이 사실성의 형상(「독일 진혼곡]의 수용소, 「자이르」의 돈)으로 나타나든, 지식이나 책의 형상으로 나타나든, 아니면 표상이나 감응(「후안 무라냐」의 칼)의 양상으로 나타나든. 왜냐하면 가령 「자이르」의 돈처럼 그 자체로는 하나의 물질적 사실적 형상을 갖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그에 대한 거의 강박증과도 같은 사람들의 믿음, 사람들의 집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그것과 결부된 의지, 요컨대 마음에 의해 삶으로 들어오고, 그런 만큼 그것은 마음과 의지의 산물이다. 부인을 패는 남자는 술 때문에 패는 게 아니라 패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것이고, "우리는 꿈 속에서 스핑크스가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게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을 표현하기 위해 스핑크스의 꿈을 꾸는 것이다."(「꿈」) 따라서 환영이 일종의 꿈이라면, 그것은 허망하고 무의미하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그 꿈과 같은 환영을 만드는 우리 자신의 공포와 욕망, 마음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영은 거짓이 아니라 정확하게 진실성을 갖는 현실이고 유효성을 갖는 실재다. (환상문학의 리얼리티!)
다만 그것이 환영이란 이름에 값하는 것은 그 욕망이나 마음이 무상하며 그런 만큼 그것의 현실성도, 유효성도 무상하다는 사실이다. 틀뢴은 보르헤스가 보기에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하나의 현실이었을 지도 모른다. 틀뢴을 다룬 그 백과사전은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사전』}처럼 진리의 저장소가 될 수도, 혹은 후일 사실로 간주될 수 있는 사료가 될 수도 있었을 어떤 문헌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안 되는 시간만으로도 '실재성'의 옷을 벗고 진리의 관을 벗어야 할 어떤 것이다. (리얼리즘의 허구성, 불가능성)
이런 점에서 보르헤스의 환영이란 거짓도 허상도 아니지만(현실성, 유효성--욕망과 마음이 실린 것,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현실이다!), 또한 진리도 실재도 아니다. 그것은 그때마다 달라지는 어떤 욕망 내지 마음의 표현이다. 하지만 무상한 마음의 일부라는 점에서 마음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것의 표현이다(諸心皆爲非心, 是名爲心). 그것은 어떠한 자성도 갖지 않은 마음이 잠시 머무는 어떤 형상을 빌어(假) 나타난 것이다(이를 용수는 『중론』에서 '假名'이라고 말한 바 있다). 환, 환영, 그것은 용수가 말하는 假 내지 假名이다. "가면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보르헤스) 그것은 자성을 갖고 실재하는 어떤 유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 말고는 따로 존재하는 것도 없다는 점에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非有非無--空!) 것으로서 幻이다.
따라서 보르헤스가 단지 유효성으로서 실재만을 보고 있다고 말해선 충분하지 못하다. 오히려 그는 어떤 것을 환영으로 만드는 관계들, 연기적 관계들을 그려내고자 한다. 동일한 것, 동일한 책, 동일한 얼굴, 동일한 텍스트를 단 한번도 허용하지 않는 그 연기적 관계의 무한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가 동일성과 가까운 공간보다는 가변성과 가까운 시간을 통해서 세상을 보려고 하고, 추리소설의 형식을 통해서 감추어진 관계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서술하는 것은, 모든 것인 동시에 하나인 것을 찾고자 하는 것은 이와 긴밀히 연관된 것이다.
만약 앞서 언급한 예들에서 지워지는 것과 지워지지 않는 것(「푸네스의 기억」, 「셰익스피어의 기억」)의 대비를 찾을 수 있다면, 나아가 형식화된 것과 탈형식화된 것(eg. 「거울과 가면」에서 모든 것을 담는 한 마디의 시구; 「두 개의 미로」에서 잘 만들어진 미로와, 벽도 없고, 입구도 출구도 없는, 따라서 가장 완벽한 미로로서 사막; 은밀하고 치밀하게 짜여진 비밀과 「불사조 교파」의 그대로 드러나지만 결코 누설되지 않은 비밀 등등)의 대비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幻으로서 세계, 假로서 세계가 갖고 있는 '空性'을, 결국 절대적인 것(그 자체로 모든 것인 하나, 혹은 알레프 내지 알모따심)은 본질적으로 공인 무한한 가변성의 세계뿐임을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cf.보르헤스의 '회의주의' 혹은 '허무주의'?
3.시간의 정원
보르헤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는 시간이다. 『픽션들』만 보아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나 「비밀의 기적」,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관한 연구」는 시간을 직접적인 주제로 하고 있고, 「삐에르 메나르, 『돈 키호테』의 저자」나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간접적으로 시간을 다루고 있으며, 백과사전을 써서 만들어낸 환상의 혹성 틀뢴은 시간적인 세계다. "그들에게 세계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체들의 집합이 아니다....그것은 연속적이고 시간적이지, 공간적인 게 아니다."(『픽션들』, 30) 「모래의 책」에 실린 「타자」나 「1983년 8월 25일」은 시간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 있는 두 명의 보르헤스를 통해서 시간의 문제에 다시 접근하고 있다. 취팽만큼이나 보르헤스에게도, "시간이란 문제만큼 그를 초조하게 만들고 고뇌하도록 만든 문제가 없었다는 것"(「...정원」, 『픽션들』, 163)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일단 이 작품들에 공통된 것이지만, 보르헤스에게 시간이란 외연적인 양 내지 시계적인 시간이 아니라 체험적인 어떤 것으로서 시간, 사건적인 어떤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는 베르그송과 유사하다. 베르그송에게 시간이란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다루어지며, 그런 한에서 체험적인 것이었다. 이를 그는 "이질적인 것의 연속"으로서 지속이란 개념으로 표현한 바 있다. 이는 보르헤스에게도 마찬가지다. 틀뢴에서 세계는 "독립적인 행위들의 이질적 연속이다."(30) 이미 본 것처럼 그에게 모든 것은 환영이었고, 그것은 곧, 욕망이라고 하든 마음이라고 하든, 주어진 것을 나름대로 변용하여 수용하는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보르헤스에게 모든 것은 "마음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이었고, 그런 한에서 그것은 유효성과 실재성을 획득한다. 요컨대 보르헤스에게 시간이란, 그처럼 마음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의 이질적인 연속이었고, 이질적인 사건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시간의 개념에 대해 베르그송처럼 양이 아닌 질, 동질성 아닌 이질성 등을 강조할 수도 있겠지만, 보르헤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의 비선형성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선형적이고 일시적이며 따라서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그런 시간 개념을 넘어서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는 베르그송의 비판과는 다른 의미에서 시간을 공간화한다. 가령 「두 갈래 길...정원」에서는 상이한 사건들의 연속으로서 시간을 길이라는 공간적 이미지로 치환하고, 정원이라고 불리는 시간의 장 전체를 상이한 가능성에 따라 한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의 '그물'로 변환시킨다. "그는 시간의 무한한 연속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어지럽게 증식되는 분산되고 수렴되고 평형을 이루는 시간들의 그물을 잊으셨던 거지요."(164) 따라서 그 그물 속에 "미래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166). 과거도, 혹은 다른 조건과 계기에 의해 다른 경로를 그리는 또 다른 미래도 역시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시간의 일부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어떤 시간 속에 당신은 존재하지만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시간 속에는 나는 존재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시간의 경우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존재합니다....시간은 셀 수 없는 미래들을 향해 영원히 갈라지지요. 그 시간들 중의 하나에서 나는 당신의 적이지요."(165)
뿐만 아니라 보르헤스는 뒤돌아가는 시간에 대해서도, 정지된 시간 속의 움직이는 시간에 대해서도 충분히 상상한다. '허버트 쾌인'의 작품 『에이프릴 마치』,는 "시간적으로 거꾸로 씌어있고, 가지처럼 갈라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설"(120)이다. 어떤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의 '이유'를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소설이 펼쳐지며, 그에 따라 "전날 밤에 일어날 수 있었던 또 다른 사건"(122)을 서술하면서 거듭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으로 씌어지는 소설. 하지만 보르헤스는 거슬러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있었던 상이한 사건들이 병치됨으로서만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즉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거슬러 가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가능성이 병치되면서 펼쳐지는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죽음」에서 과거를 수정하는 다미안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치욕적인 죽음을 수정하는 것, 그것은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것이고, 치욕 속에 죽은 자의 잔영 안에 깊이 남아 있는 의지요 욕망이다. "그렇게 해서 1946년, 오랫동안 가슴 안에 품고 있던 열망에 따라 1904년 겨울과 봄 사이에 벌어졌던 마소예르의 패전에서 전사했다."(『알렙』, 111)
반면 시간을 멈추고 주인공의 미완성 드라마를 완성하게 해준 「비밀의 기적」은 못다 한 여행을 마치기 위해 시간을 멈추게 하며, 그 사이에 자신만의 흐르는 시간을 갖는 '비밀의 기적'이었다는 점에서, 머묾을, 여행이 멈추는 순간을 뜻하는 파우스트적 '정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시계바늘의 움직임을 세우는 기적이 아니라, 사실은 돌아가는 시계바늘 안에서 비선형적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어김없는 시계적 시간의 선형성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시간을 잊는 것, 아니 본래 空인 시간을 사는 것이고 시간의 空性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형적 시간이 표시하는 정해진 사건에서 벗어나 다른 가능성을 사는 것이고, 다른 가능성 자체의 세계로 비약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는 가능한 다른 사건이 병치되는 쾌인의 소설의 구조와, 그런 사건적 시간이 두 갈래 길들로 병존하는 취팽의 정원의 구조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제 자리에서 여행하기.)
이에 비해 「삐에르 메나르」와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시간 그 자체가 갖는 변환 능력을 보여준다. 메나르의 작품은 시간이 달라짐에 따라 동일한 문자들의 집합인 텍스트가 전혀 다른 텍스트로 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시간 자체가 변환의 계기로 작동하는 무상함의 형식임을 보여준다.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우연이라는 계기와 시간이 직접적인 연관을 갖게 되었을 때, 시간은 그 자체만으로 새로운 가능성의 무한한 추가를 야기하여 무한한 연기의 형식으로 종착지를 제거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앞의 네 작품이 시간 자체를 비선형화하는 방식으로 변형하여 다른 가능성의 시간을, 다른 가능성의 세계를, 혹은 잠재성 자체를 가시화하고 있다면, 이 두 작품은 시간 자체를 변환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 그 자체가 다른 가능성의 세계로 열리는 직접적 계기임을 보여준다.
한편 시간의 격차를 두고 두 명의 보르헤스가 만나는 「타자」에서 젊은 보르헤스와 늙은 보르헤스의 만남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일인이 사실은 너무도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우리가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너무 비슷했으면서도 너무 달랐다."(『셰익스피어의 기억』, 19)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앞서 말한 두 번째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1983년 28월 25일]에은 좀 다르다. 거기서는 이미 자신에겐 과거인 젊은 보르헤스의 미래를 늙은 보르헤스가 알려주지만, 젊은 그에게 그것은 죽음(자살)으로 귀착되는 지겨운 모방의 선형성을 뜻하는 것이었고, 그래서인지 젊은 보르헤스 자신은 바로 거기서 도망치듯 벗어난다. "나는 방에서 도망쳐 나왔다....밖에서는 또 다른 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155)
-->보르헤스에게 선형성을 넘어선 시간의 사유란 결국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요,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무상성이 함축하는 무한한 가변성의 세계를 사는 것, 가변적인 삶을, 삶의 가변성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4.불멸성, 혹은 다른-것-되기
시간에 대한 보르헤스의 관심은 이제 죽음과 불멸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불멸성이란 무엇인가? 「죽지 않는 사람들」은 이 주제를 명시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다룬다면, 그에 바로 뒤잇는 「죽어 있는 사람」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다룬다.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를 찾아가는 '나'가 죽을 고생 끝에 찾아낸 것, 천백년 전에 호머였던 혈거인의 되찾은 기억으로 도달한 것은 결국 자신이 바로 그 불사의 존재라는 것이었다. 이후 '나'는 새로운 왕국, 새로운 제국을 헤메고 다니며 수많은 생을 산다. 불락에서 『천일야화』를 필사하기도 하고,사마르칸드의 감옥에서 장기도 두고, 보헤미아에서 점성학을 연구하기도 하고, 라이프치히에서도 살고.... 요컨대 윤회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불사의 삶, 불사의 존재란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이 되는 존재며, 다른 것이 되는 삶 그 자체다.
따라서 "불사의 존재가 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인간을 제외하고 모든 피조물들은 죽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불사의 존재들이다."(『알렙』, 26) 따라서 그것은 기독교인이나 이슬람교도들이 보여준 불사성에 대한 신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26). 아니 반대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사성에 대한 믿음이 불사의 삶을 가져다주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에 대한, 따라서 불사에 대한 관념의 부재가 불사의 삶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불사의 삶이란 불사에 대한 믿음과 무관하며,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삶 그 자체일 뿐이다. 하지만 이는 '나'라는 관념, "나는 호머다", "나는 셰익스피어다", "나는 보르헤스다"라는 구별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나'의 탄생과 '나'의 죽음이란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내게 좀더 그럴 듯해 보이는 것은 힌두스탄 지역의 어떤 종교에서 말하는 수레바퀴다."(26) 무아를 설파하는 부처의 법륜? 따라서 '나'라는 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불사의 강물을 마시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불사의 존재인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될 것이다. 즉 나는 죽을 것이다."(36)
「죽지 않는 사람들」의 본문의 이 마지막 문장에서 보르헤스는 불사와 불멸이 '무아'며, 그것은 곧 모든-사람이-되는-것devenir tout le monde이라고 명확하게 언명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각각의 사람, 각각의 순간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기도 하고, 각각의 구별되는 이름을 갖는 개체가 되기도 하는 것을 이 불사와 불멸의 존재 안에서, 불사와 불멸의 존재조건임을 발견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갖는 것, 그것은 셰익스피어가 되는 것이다(「셰익스피어의 기억」, 186). 세르반테스 시대의 문제를 연구해 그 시대의 스페인어를 구사하게 된 메나르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되는 것"이다(『픽션들』, 77). 아니 문학이란, 작가로서 어떤 이야기를 쓰는 것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베로에스의 행적을 추적하던 '내'가 마지막에 이르러 발견하는 것은 이것이다.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동안 이 이야기가 바로 나 자신인 그런 어떤 사람에 대한 상징이고,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나는 그 사람이 되어야 했고, 그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이 이야기를 써야 했"다(「아베로에스의 추적」, 『알렙』, 143-4) 그렇다면 윤회와 환생의 형식으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만 아니라, 창작의 형식으로든, 사유의 형식으로든, 혹은 행동의 형식으로든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아니 나 자신이 현재의 삶을 살면서 정체성의 중력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 다른 삶을 사는 것, 바로 이 모든 것이 불멸의 삶이며 불사의 삶이 아닐까?
그것은 바로 통상적인 불멸의 존재인 신의 삶이기도 하다. 연기를 하며, 작품을 쓰며 평생을 끊임없이 다른 사람이 되며 살아온 셰익스피어("그 누구도 그처럼 많은 사람이었던 적은 없었다." 「전체와 무」, 『칼잡이들의 이야기』, 58)가 죽기 직전에 신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오랜 세월 동안 헛되이 그토록 많은 사람이었던 저는 이제 한 사람, 즉 나 자신이 되고 싶습니다." 이에 대한 신의 대답: "나의 셰익스피어여, 나 또한 나 자신이 아닌걸. 나는 마체 네가 너의 작품을 꿈꾸었던 것처럼 세계를 꿈꾸었지. 그리고 내 꿈의 형상들 속에서 마치 나처럼 수많은 존재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무도 아닌 네가 존재하고 있는 거지."(59)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셰익스피어와 신 사이에, 나와 신 사이에, 혹은 세상의 모든 것과 신 사이에 있는 근본적 구별이 사라지는 걸 알게 된다. 끊임없이 다른 삶을 사는 불멸의 존재, 내가 만약 그런 존재라면, 내가 바로 신인 것이다. 굳이 나라고도 할 것이 없는.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을 전적으로 모방하고 전적으로 그 사람의 삶에 동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 현재 선 지점과 가려고 하는 지점 사이에서 제 3의 선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가령 메나르는 "어떻게 해서든 세르반테스가 되어 『돈키호테』라는 목표에 도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삐에르 메나르이면서, 비에르 메나르의 경험들을 통해 『돈키호테』에 도달하는 것보다 덜 야심적인 작업, 따라서 덜 흥미로운 작업으로 생각되었다."(『픽션들』, 77) 전적인 모방은 메나르의 관점이 아니라 세르반테의 관점에서 『돈키호테』를 쓰는 것이고, 셰익스피어의 기억에 전적으로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래서 헤르만 세르겔은 모든 게 자신을 셰익스피어로 데려가는 강력한 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혀 다른 무엇을 다시 섞는다. "엄격하고 장대한 음악, 바하"(『기억』, 193)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게서 보르헤스가 발견했던 위험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5.알렙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보르헤스가 평생 찾아다닌 것은 바로 '신의 글'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마술적인 하나의 문장."(「신의 글」, 『알렙』, 165) 혹은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단 한 줄의 시(「거울과 가면」, 『기억들』, 87). 이는 사실 우주의 모든 책들이기도 한 한 권의 책(「모래의 책」, 「바벨의 도서관」), 모든 별이기도 한 하나의 별 내지 모든 사람이기도 한 한 명의 사람(「알모따심으로의 접근」)에 대한 추구를 통해서 쉽게 입증될 수 있는 것이다. 알렙, 그것은 수학적으로 모든 實數를 자신 안에 포함하는 하나의 수다(집합론). 보르헤스는 그것을 서로 겹치거나 투명해지는 일 없이, 그리고 전혀 크기의 축소 없이 모든 점들에서 본 우주의 모든 상들이 들어있는 조그만 구체인 알렙으로 변형시켰다. 우주 전체를 머금은 한 알의 좁쌀('설봉의 좁쌀'), 혹은 시방삼세를 모두 다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먼지(一微塵中含十方).
우주 전체를 포함하는 하나의 구체, 이는 필경 우주 전체로 펼쳐져 있는 상호적인 관계의 망, 緣起的인 관계의 그물 전체와 결부된 것이다. 즉 신의 글, 그것은 "미래에 있을 것이고, 현재에 있고,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들이 서로 얽혀 짜인 채 그것을 형성하고 있었다."(「신의 글」, 『알렙』, 169) 하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이는 '알렙'이나 '모래의 책'과 같은 기이하고 특별한 어떤 존재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시방삼세의 緣起的인 관계 전체를 포함하는 모든 것이다. 그래서 보르헤스는 말한다. "나는 인간의 언어들에서조차 우주 전체를 암시하지 않는 발하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즉 '호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를 낳은 호랑이, 그가 삼켜버린 사슴들과 거북이들, 사슴들이 뜯어먹은 목초, 목초의 어머니인 대지, 대지를 낳은 하늘을 말하는 것이다."(『알렙』, 167) 따라서 시인이 찾아낸 '운드르'라는 말(「운드르」, 『기억』, 97)만이 아니라, 모든 말이 바로 신의 말이고, 모든 말이 "그 안에 수많은 말들이 들어있는 단 하나의 말"이다(『알렙』, 167). 모든 먼지가 시방삼세를 다 포함하고 있다(一切塵中含十方). 따라서 시인을 사랑했던, 그래서 시인에게 모든 것을 주었던 한 여인이 있었다면, "삶 또한 내게 모든 것을 주었지요. 삶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해요."(「운드르」, 『기억』, 97) 마지막 말, 혹은 신의 글, 그것을 보르헤스는 '운드르'라고 말한다. 경이로움을 뜻하는 단어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것이 우주를 담고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하듯이, 자신의 삶이 바로 모든 것을 주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한 발견할 수 없는 단어다. 반대로 그것은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에서 우주 전체를 보고, 모든 말에서 신의 글을 보게 되면, 어떤 말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말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경이로움으로 느끼게 된다는 것, 그래서 모든 것을 그 경이로움 속에서 긍정하고 그것이 주는 우주 전체를 받아들인다는 것, 아마도 그것이 보르헤스가 평생을 찾아다녔던 깨달음의 징표, 혹은 신의 글이 아니었을까? 알렙.
수유 연구실 + 연구공간 '너머' 2001년 봄 강좌 <문학과 철학 사이>, 2001년 4월 18일 / 강사: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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