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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문화예술

이창동, <시>

by 내오랜꿈 2010.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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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여자


이창동의 영화 <시>의 첫 장면. 고개가 엎어져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시체가 강물에 떠밀려 서서히 내려온다. 그리고 하릴없이 구슬치기를 하거나, 나뭇가지로 땅이나 후벼 파고 있던 어린이들이 시체를 발견한다. 익숙한 장면이다. 현실에서도 여학생들은 자살이나 타살에 의해 죽어나가고, 영화 속 이미지는 넘쳐난다. 강물에 퉁퉁 불어 부풀어 오른 푸른 얼굴을 달고, 몸에 착 달라붙은 교복의 무게로 휘청거리는, 언제 피가 돌았었냐는 듯 뚝 따먹고 축축한 시체가 된 그녀들. 대개는 이 익숙한 모습이 그녀들과의 첫 대면이자, 마지막 대면이었다. 오랫동안 궁금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우리가 그녀의 뒤통수가 아닌 얼굴을 볼 수 있을지. ‘그녀에 대한’ 목소리가 아니라‘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퍼슨웹>(http://www.personweb.com) 2010. 07. 05

하나/@latinsamba





이것저것의 세계. 

 

영화 속에서 윤정희가 연기한 양미자는 자주 다른 인물들의 말을 되뇌고, 전한다. 죽은 아네스의 사연은 그녀를 통해 딸, 슈퍼주인, 손자에게 전해진다. 또한 중풍에 걸린 ‘회장님’의 뭉개진 언어는 자주 그녀에 의해서 되뇌어진다. ‘회장님’의 일그러진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해 관객들이 이맛살을 찌푸리면, 미자가 재빨리 나와, “아, 내가 귀가 멀쩡한데 왜 소리를 치느냐고요?”라며 그의 말을 재창하고, 번역한다. 이처럼 ‘말 같지도 않은 말’이 어떤 의미를 부여받아 말이 되는 장면들은 한없이 애틋하다. 마치 외부인들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아기의 옹알이를 양육자가 알아듣고 밥도 주고, 쉬도 누이고, 열도 재는 모습을 바라볼 때처럼. 


비단 미자 뿐 아니라 영화 자체가 이런 종류의 애틋함으로 가득하다. 드문드문 등장하는 문화센터 시 강좌 수강생들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 특히 그러하다. 비스듬히 내려오는 빛을 바라보고 있는 생애 첫 기억, 아이를 낳을 때의 뜨겁고 미끄덩한 감각, 할머니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며 창호지를 툭툭 칠 때의 소리, 불륜 남녀의 살결이 맞닿아 경계가 흐려지는 밤. 이것은 모두 몸의 기억이다. 언어화되지 않아 있는지조차 몰랐던 신체기억들이 인물들의 상기된 표정과 떨리는 음성을 타고 넘실거린다.


하지만 언어를 통해 풍성해지고, 소통의 외형을 갖춘 세계는 곧 양미자의 앞에서 닫히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미자가 알츠하이머형 치매에 걸리기 때문이다. 치매는 망각의 병이고, 점진적인 속성이 있어 점점 더 많은 것들, 명사, 동사, 시간, 자신, 먹는 법, 걷는 법 등을 차례로 잊어버리게 된다. 특히, 초기에는 낱말 뜻은 알고 있으나, 이름을 까먹게 된다. 풍부한 어휘의 세계에서 이것, 저것의 세계로 잠기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 미자는 병원에 가서 “전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에너지”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신의 기억력 상태를 “깜빡 깜빡이는 전기”에 비유하려는 허영심을 부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이름들을 까먹어버렸다. 시간이 곧 돈이라 급해 죽겠는 택시에 올라 타“터미널”을 설명하지 못하여 눈총을 받고, 대학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을 때는 아예 처음부터 의사가 이렇게 말한다. “같이 이야기할 보호자는 안 오셨어요?”


그녀의 미래도 아네스나 ‘회장님’과 다를 게 없다. 언어는 뭉개지다 사라지고, 그녀는 애초에 이야기를 나눌 대상에서 제외되며, 정 이야기가 하고 싶다면 돈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녀를 위해 시를 써주지 않을 것이다. 왜 항상은 아니지만 자주, 다리가 없는 이를 업고 가는 이는, 그 자신이 이미 절름발이인 것인지. 그러나 미자는 시를 쓴다. 단어들이 죄다 빠져나가고 있는 와중에도 자꾸만 적는 그녀는, 마치 뒤늦게 맹인이 되어 점자를 처음으로 만져보는 사람처럼 처음으로 말을 배우고, 다독이는 사람 같다. 




아무도 모르는 기억의 투쟁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서경식)라는 책이 있다. 이 제목을 변형해보자면, 죄와 기억 역시 연대할 수 없고, 둘 사이의 틈새를 메우는 것은 죄책감이라는 강렬하지만, 무기력한 감정이다.  


영화 곳곳에서 기억을 지우기 위한 시도들이 등장한다. 가해자 중에 한명인 미자의 손자는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고, 큰 소리로 음악을 듣고, 오락실에 가고, 훌라후프를 돌리고, 선언처럼 식탁 위에 놓인 죽은 소녀의 사진을 피해 또 다시 텔레비전을 본다. 미자가 자고 있는 손자를 깨워 왜 그랬냐고 소리칠 때도 그는 한사코 이불을 잡아당기며,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애쓴다. 또한 가해자들의 아비들은 공식적이고, 의례화된 언어와 돈으로 이야기를 무마시키려 든다.“사건 개요. 박희진. 방곡면. 부모는 농사를 짓고 있고.”


하지만 미자가 싸우고 있는 대상은 손자도, 가해자의 아비도, 세상도 아니다. 치매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져 가고 있는 자신의 기억이다. 그녀는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억의 투쟁을 몸소 재현하고 있다. 다른 이들이 자꾸만 밖으로 도망칠 때, 그녀는 오히려 점점 더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죽은 아네스의 위령 미사, 그녀가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했던 과학실, 그녀가 뛰어내렸던 다리. 가방 속에 죽은 소녀의 사진을 부적처럼 지닌 채, 이 모든 것을 잊지 않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이러한 간절함을 알기에, 미자가 아비들에 의해 조성된 ‘인간극장’류의 이야기를 읊으러 죽은 소녀의 어머니를 찾아갔다가 모든 것을 까먹고, 실컷 살구 이야기만 하다가, 번뜩 기억이 돌아와 짓는 참혹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최근 영화 속 여인들은 미치거나 죽는다. 봉준호의 <마더>에서 김혜자는 결국‘망각의 침’을 스스로 허벅지에 놓고, 임상수의 <하녀>에서 하녀는 죽고, 여주인은 미쳐버리며, 김대우의 <방자전>에서 춘향이는 백치가 된다. <하녀>에서 전도연이 연기한 은이는“어떻게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되니”라고 말하지만, 그녀들은 죄다 심인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있던 일을 기억 속에서 없애기 위해 저마다 분주하다. 기억하지 못하면 책임질 수도, 복수할 수도, 전(傳)을 지을 수도 없다. 미자는 이 속에서 묵묵히 기억의 투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기억은 책임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는 폭력에 마주하여, 미자는 물을 수밖에 없다. 이제 이걸로 다 끝난 건가요. 완전히. 가해자는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제야 죽은 소녀는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말을 건다.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발치까지 흘러드는 강물


미자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집을 정리하고, 시 한 편과 꽃을 교탁 위에 올려놓고 떠난 그녀가 어디서,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경과한다면, 아마도 그녀는 손자가 출소하여 복수하러 찾아와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길에서 아네스라는 이름을 들어도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걸어갈 것이다. 또한 치매에 걸린 에머슨이 자신의 저서를 읽고는,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야, 이거 정말 굉장한 글인데!”라고 탄성을 내뱉었던 것처럼, 그녀 역시 언젠가 자신의 선택에 대해 건너 건너 소문처럼 듣게 된다면, 한번쯤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라거나, 모질어 정이 뚝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평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녀에게는 앞으로 망각할 일만 남았다. 내가 그리고 당신이 그럴 것처럼.


영화의 마지막 장면. 시체를 물결 속에 숨겨놓고 있는 강물이 우리의 발치까지 흘러든다. 그 위로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잊어버린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는데 없어져버린 수많은 사연들이 부표처럼 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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