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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 소돔 120일』 : 사드와 파솔리니, 그 차이와 반복

by 내오랜꿈 2009.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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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 소돔 120일』 : 사드와 파솔리니, 그 차이와 반복



준비운동, 두세 가지

<1> 도나시엥 드 사드 후작(1740-1814)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들

* 최초의 갈등을 일으킨 것은 어머니에 대한 증오(부재, 무관심). -->반오이디푸스 콤플렉스.

* 아베 드 사드(그의 삼촌이자 호색적인 주교)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소만성. 두 협곡 사이에 낀, 마을 위로 불쑥 솟아나온 바위투성이의 산봉우리에 있는 소만성에는 공기와 빛이 없는 지하감옥이. 바닥에는 세상으로 돌아갈 희망도 없이 그곳에 감금되어 잊혀진 불행한 사람들의 쇠사슬들이 있는 여기는 어떤 외침도 외부에 닿지 못하기 때문에 이상적인 고문장소, 영원한 감금과 고독, 번민의 현기증이. 

* 루이 르 그랑 중학교의 연극무대.(평생동안 극에 대한 열정) 채찍질과 남색. 

* 아내 르네-펠라지. 희생자가 아니라 공범자. 27년간 뒷바라지.

* 사드가 일으킨 사건들.: 잔느 테스타르(신성모독). /1768년 4.3일 부활절 아르쾨유 사건. 로즈 켈러라는 구걸자를 데리고 가서 채찍으로 때리고 살을 주머니 칼로 베고 밀랍을 녹여 방울들이 흘러내리게./마르세유 사건 : 1772년. 여자들을 데려다가 캔디를 먹였는데, 구토와 복통. -->독약중독에 의한 살인미수와 남색이라는 죄목으로 기소. 당시 법에 따르면 남색에 대한 징벌은 죄인을 산 채로 불에 태워 그 재를 바람에 뿌림. 사드와 그의 하인의 허수아비로 처형. 그 시간에 그는 마장백작이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를 처제(수녀)와 여행. 체포되어 미올랑 성채에 갇힘.  탈주. 다시 체포, 1778-1790년까지 뱅센느와 바스티유에서 13년간 감금. -->글쓰기의 공간. 

* "한 남자로 감옥에 들어갔던 그가 작가로 감옥에서 나온다"(보바르). 

* 1789년 7.2일 혁명이 시작. 사드는 즉석에서 메가폰을 만들어 창문에 대고 바스티유에서 죄들을 죽이고 있다고 소리치기 시작. 다음날 새벽 샤랑통 정신병원으로 이감. 열흘 후에 바스티유는 함락. 1790년 4.2 석방. (르네-펠라지와 이혼/마리 꽁스탕스가 바톤을 이어 죽을 때까지 헌신적 내조)

* 대혁명은 언어표현, 감동시키는 힘, 파토스, 과장된 수사의 승리를 구가. 연극의 대유행. 연극에 대한 불타는 열정. 사드의 연극은 소설과는 판이. 강간, 고문, 폭력도 없고 음란의 흔적조차 없다. 악이 환기된다면, 오로지 악을 단죄하기 위해서. 

*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 : 불문학의 가장 특이하고 가장 뛰어난 창작품 중 하나. 

그의 정치적 입장은? '영주들이 자기 영토 위에서 전제적으로 살았던' 봉건 낙원에 대한 향수, 또 '프랑스 영토 안에 3만의 비천한 노예들 대신에 단 한 사람앞에 엎드리는 한 무리의 지배자들을 포함하고 있던 영광된 시대'에 대한 향수, 사드가 바로 그 대변자였다. 그는 부르주아지 출신의 법복 귀족을 무척이나 경멸. 그는 또한 부르주아가 부 때문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일관성 때문에 귀족층에 진짜로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명망있고 유서 깊은 귀족출신으로서, 자기 계층의 오만함으로 뭉쳐져 있고 귀족의 이해관계, 편견 그리고 갈망을 별 무리없이 공유하면서도 사드 후작은 현실을 제대로 의식하고 있었다. 다른 귀족들에게는 결여되어 있는 명석함으로, 싸움에서 졌다는 것, 귀족계급은 쇠퇴해가고 있으며 아직도 지나치게 토지에 의존하고 있는 경제의 내적인 모순들에 희생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자기 미래에 대해 어떤 환상도 갖고 있지 않았고, 사회의 역동성 속에서 모든 힘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부르주아지의 상승 쪽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예감. 그러나 인간의 가치에 대해 너무 회의적이고, 비관주의적이고, 정치적 모랄이라는 환상과 너무 동떨어져 있는 사드로서는 과거에 기독교를 믿지 않았던 것처럼 혁명의 이상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유일한 혁명,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한계들 너머에 있다고 믿은 것, 그것은 바로 글의 혁명. /모든 면에서 그는 과격공화파와 거리가. '쾌락의 평등주의' '교양의 경멸' '합법적인 테러리즘'보다 더 그를 구역질나게 하는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반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민중의 도덕주의.

로베스삐에르와 사드. 理神論과 무신론의 대결. "무신론은 귀족주의적이다." "억압받는 무고한 이들을 지켜주고 기세등등한 죄악을 벌주는 위대한 존재가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민중적이다." "숭고한 열정을 소멸시키려는 자에게 불행이 있으라!"(로베스-) // "우리는 저절로 움직이는 가짜 창조자를 원치 않는다. 실체도 없으면서 거대함으로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 신, 전능하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한번도 실행하지 않는 신, 한없이 선한 존재이면서도 불만가진 자들만 만들어내는 존재, 질서의 친구이면서도 그가 다스리는 곳에는 무질서만 있게 하는 존재를 우리는 더 이상 원치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자연을 망치는 신, 혼돈의 아버지인 신, 인간이 두려움에 빠져있을 때 그를 자극하는 신을 더 이상 원치 않는다. 그런 신은 우리를 분노에 떨게 한다. 우리가 영원히 망각 속에 묻어놓았던 신을 고약한 로베스-는 다시 끄집어내려 했다." "무신론에 순교자가 필요하다면 내 피가 준비되어 있다고 해주시오."(사드) 10개월 15일간 자유시대의 감옥에.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석방. /브뤼메르 18일 이후 집정 정치시대(1799-1804)가 탄생.  바스티유에서 1787과 1788년 사이에 쓰여진 『사랑의 죄악』이라는 제목의 열한 편의 단편모음집을 출판. 다시 구금. 샤랑통 정신병원으로. 사드의 연출로 연극이 공연. 이 공연에 초대받는 것이 사교계의 첨단이. 사드는 니체보다 먼저, 극예술은 아폴로적인 명료함의 열매일 뿐 아니라 도취와 광란과 교만, 다시 말해 비정상의 신 디오니소스의 후예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죽기 일년 전 16세의 소녀와 사랑에 탐닉. 


<2> 포르노그라피의 역사에 대하여

* 18세기 이전까지 포르노는 상층계급 남성들에 의해 전유. 정치적 동기를 지니고 있던 포르노는 앙시엥 레짐의 정통성을 침해함으로써 혁명을 야기시키는 데 도움을. 앙시엥 레짐 시대의 포르노는 물질주의 철학에 바탕을 두었고 종종 성직자, 수녀, 귀족들을 비판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전복적. 1740년대 포르노그라피 출판의 성장기가 계몽사상의 절정기와 일치.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1748), 라 메트리의 『인간 기계』(1748) /89년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포르노는 지도적인 궁신과 특히 왕비에 대해 악랄한 공격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새로운 대중정치의 표면으로. 왕비에 관한 포르노는 새로운 공화국 내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그리고 명확한 성별 경계의 유지에 대한 잠재적인 불안감을 반영하는 것. 그외에 평등화의 효과를 가져왔는데, 왕비의 육체가 왕권에 접근하는 일종의 수단으로 쓰였다는 것을 강조. 그녀는 왕과 결혼, 왕위 계승자의 어머니, 그래서 그녀의 육체는 권력의 핵심. 89년 이후에 나온 포르노는 모든 사람이 왕비와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더욱 커졌다. 왕권을 비하하면서 평민을 격상. 

* 1790년대에는 외관상 정치적인 성격을 띠지 않았던 포르노 역시 계속 출판. ->새로운 자유 속에서 정치적 포르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광범위한 독자층과 만나게 되었으며, 자기 의식적인 통속적 대중정치의 무기가. 1830년대에 이르면 서부유럽에서 포르노는 과거의 전복적인 철학 및 정치와의 연관성을 잃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 자체로 특징적인 장르가. 현대적인 포르노, 성적 도발을 야기시키려는 유일한 목적으로 전화.

* 사드의 소설은 1790년대의 중요한 전환점. 그는 포르노가 지니는 정치적,사회적 전복 가능성을 극한까지 몰고갔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정치적 장르의 현대 포르노를 위한 길을. 그의  포르노는 앙시엥 레짐 도덕 체계의 불합리성에 대한 특정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도덕성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공격과 동일시. 이런 이유로 사드는 앙시엥 레짐이건 공화제이건 나폴레옹 치하이건 간에 모든 정부로부터 감금당한다. 공화제의 경찰과 후에 나폴레옹 치하의 경찰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쥐스틴』과 『쥘르에트』의 사본을 추적하는데 더 큰 정열을. -->『쥐스틴』은 단어의 상식적인 의미에서 외설문학의 장르를 벗어난다. 사드의 전복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정치적인 것에 속한다기보다는 언어에 속한다. 그것은 창조이지 선동이 아니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사드의 위대함은 죄악, 성적 도착을 찬양한 것에 있지 않다. 또한 이런 찬양을 위해서 과격한 언어를 사용했다는데 있지 않다. 그의 위대함은 고유한 반복에 근거한 엄청난 담화를 창안했다는데 있다." 이 책은 스캔들을 일으켰지만 무엇보다 공포를 일으켰다. 그것의 출판은 일종의 패닉효과를. 사람들은 아주 빨리 도덕관념만이 원인이 아님을. 전복은 외설의 너머에 이르고, 진짜 위험은 다른 곳에 있음을 느꼈다. 바로 이것이 동시대인들이 그에게 외설작품들에게 일반적으로 부여했던 관용의 최소함도 거부했던 이유. 그들은 생존 본능에 의해서, 마치 미개인의 침입 앞에서 달아나듯이 그 작품 앞에서 달아났다. -->사드 신화학의 탄생, '사드의'라는 단어가 저주받은 형용사, 절대악의 상징이 되는 순간을 나타낸다. 


<3> 파솔리니(1922-1975)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 없음. 시인, 소설가, 영화감독이라고. 『폭력적인 삶』이라는 작품이 번역되어 있음. - 부랑자, 창녀, 뚜쟁이 등의 일탈자들이 파시스트를 거쳐 공산주의가 되는 과정을 그린 무척 재미없는 소설. 


사드의 『소돔에서의 120일』 : 부정의 항구적 운동성 혹은 '절대 부정'의 세계

* 바스티유 감옥에서 쓴 최초의 장편 소설. 1785년 초고를 정서하기 시작. 10월 22일부터 저녁 7시에서 10시까지 37일 동안 계속되어 11월 27일 오전에 완성. 바스티유가 습격당했을 때, 분실되어 어떤 후작에게 넘어가 이 가문의 3대에 걸쳐 보관되었다가 1900년 경에 독일 애호가에게 팔렸고, 그는 그것을 남근 모양의 상장에. 1904년 처음 출판. 

대략의 줄거리

배경 : 루이 14세 시절/등장인물 : 블랑지스 공작 -> 굉장한 힘과 거대한 성기를 지니고. 어머니, 누이 그리고 부인 3명을  살해. /모 주교 : 공작의 동생. 남색의 충실한 신봉자. 배출할 때 기절해버릴 만큼 민감한 신경조직을. /퀴르발 판사 : 불결함을 쾌락의 원천으로./  재산가 뒤르세 : 입술이야말로 그에게 쾌락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매개물. 재산을 위해 어머니, 부인 질녀를 독살.  -->이들은 모두 딸들과 근친상간을 저질렀고, 서로의 딸들과 결혼한다. 공통점은 남색취향과 항문숭배. 주교의 경우 여자의 성기를 혐오하여 그것을 보기만 해도 6달 동안 발기가 되지 않을 지경. 그들의 부인들은 아름답고 순결하며 미덕을 지닌 여인들. (극단적인 대립) 이 호색가들은 청각기관으로 전달되는 감각이야말로 진정한 기쁨을 주며, 그 느낌이 가장 생생하다고. 음란행위를 하면서 온갖 음담패설을 상세히 이야기한다는 것. /초로의 뚜쟁이 4명을 모집. 인생을 지독한 방탕 속에서 보낸 여인들./소녀 8명, 소년 8명. 수동적인 남색의 쾌락을 위해 거대한 몸집의 남자 8명(성기 크기나 항문이 거대해야) /하녀 4명 - 기이하고도 잔인한 이력을 가진 여자들.

소년 소녀의 선발기준 : 12살에서 15살. 상류계급, 부르주아출신 이하는 절대 안됨. 완벽한 육체. 이빨 하나가 길어도 탈락. 기품과 덕성이 뛰어나야. 130명 가운데 엄격한 심사로 8명만. 나머지는 맨몸으로 쫓겨나야. 소년들은 150명 중에서 선발. 나머지는 실컷 방탕에 이용되다가 터키 해적선에 팔아넘김. 

방탕의 신전 : 발르까지 가서, 라인강을 건너고. 포레 느와르라는 골짜기로. 방책이 차단. 그 다음 성 베르나르 산을 오르고 사방이 낭떠러지. 산꼭대기까지가 거의 5시간. 꼭대기에는 또 하나의 장벽이. 산의 북과 남을 가르고 있는 30뜨와즈 이상되는 낭떠러지. 이 양쪽을 튼튼한 나무다리로 연결, 마지막 장비가 도착하고 나면 그것을 잘라버리기로. 내부의 향연장. 이야기꾼들이 무대가 있는 살롱.(여기가 주요 무대. 극장의 배치) 예배당을 침실로. 3개의 철문으로 닫혀져 있는 좁고 가파른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은 아치형의 지하감옥까지 땅속 깊숙이 연결되어. 법도 신앙도 없고, 죄악으로 즐거워하며, 위험한 쾌락의 절대법칙과 자신의 정열 외에는 다른 아무 관심도, 지켜야 할 윤리도 없는 악당의 뜻에 맡겨진 공간. -->18세기에 포르노그라피 소설과 사실주의 소설은 모두 새로운 사회의 상을 표현하려고. 포르노는 사실주의 소설을 극단까지 몰고갔다. 그러나 사회를 투명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포르노의 지배적 경향은 "외적 혹은 사회적 실재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 '포르노토피아'에서 시간과 공간은 성적 접촉의 반복 횟수만을 측정할 뿐이고 육체는 성기와 그 변종 및 결합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환원. 그 결과 포르노는 "시간, 공간, 역사 그리고 언어 자체로부터의 독립을 향해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경향의 극치가 사드의 지하동굴과 숲속의 토굴, 외로운 성. 

규칙 가운데 몇 가지 : 소년, 소녀들의 순결이 범해질 날짜. 예배실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화장실에 가는 것은 엄격히 금지. 정각 6시에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시작. 10시에 야식. 이후 모든 사람들이 뒤범벅된 혼음. 새벽 2시에 대향연은 끝나고. 허락 없이 남녀가 즐기는 모습이 발각될 경우 남자의 성기를 자르고, 사소한 종교행위라도 하게 되면, 이유를 불문하고 사형에. 신이라는 이름은 욕설이나 저주의 말을 덧붙이지 않고는 입에 올릴 수 없다. 어렴풋한 이성의 빛이 보이거나 하루라고 쾌락에 도취되지 않은 상태로 있으려 하는 친구에게는 벌금으로 1만 프랑을 부과. 누구든 청결행위는 할 수 없으며, 특히 대소변을 본 뒤에는 그 달의 주인의 허락 없이는 씻을 수 없다. 

제 1부 단순한 정열의 에피소드 150 가지 : 뒤클로 부인의 이야기. 11월의 한달간. 오줌을 먹거나 정액을 마시거나 때가 잔뜩 묻은 몸을 포도주로 적신 뒤 마시는 것. 발에 낀 때를 핥는 것. 더럽고 추악한 것들에 대한 여러 정열. 구토약을 먹인 다음에 토사물을 먹거나 음식을 질 속에 넣었다가 먹거나 방귀, 트림. 노파의 더러운 엉덩이. 똥. 창녀를 똥통에다 집어넣었다가 온몸에 있는 똥을 핥아 먹는 변호사. 항문을 꿰매는 데서 쾌락을 느끼는 남자. 자신의 체모에 불을 붙이고서 배출. 시체 위에다 배설. 자기를 관에 넣고 못질을 시키는 남자. 

제 2부 이중의 정열 150 가지 : 12월의 31일간. 샹빌 부인의 이야기. 간략한 요약식으로 서술. 세 살짜리 남아만을 상대로 하는 남자. 결혼을 하루 앞둔 처녀만을 범하고 싶은 여자. 자기가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처녀성을 빼앗긴 직후의 여자만을 상대로. 딸에게 성체빵에 방귀를 뀌게 하고, 자신도 방귀를 뀌고, 매춘부와 성교하면서 그 빵을 먹는다.

여기서의 특징은 남녀가 다수로 상대하는 것. 사정할 때까지 여자를 깡충깡충 뛰게하는 남자. 가려움증을 유발하는 환각제로 여자를 유혹, 그 가려움증이 너무 심해서 온몸을 긁어대서 피투성이가. 끔찍한 급성복통을 유발하는 극약을 먹이고, 하루종일 신음하는 모습을 보거나. 여자의 몸에 똥을 바른 다음, 여자를 기둥에 묶고 여자를 향해 왕파리떼를 날려 보냄. 

제 3부 범죄적 정열 150가지 : 마르텐느 부인의 이야기. 1월. 칠면조와 성교. 자기를 채찍질하게 하고 암염소에게 성기를. 백조의 엉덩이 속으로 성체빵을 밀어넣으면서 백조를 비역. 수캐가 자기 항문을 핥고 있는 동안 양을 비역. 여자가 죽을 때까지 여자의 젖가슴을 꼬집고 폭행하고 주무른다. 

제 4부 살인의 정열 150가지 : 데그랑즈 부인의 이야기 2월 한달간. 30명이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에 상응하는 변태행위를 다양하게 실행. 마지막에 16명이 살해되는 것으로 종결.  

1.언어에 대하여 : 사드와 마조흐의 작품에는 명령문이 대단히 많으며 명령자는 잔인한 난봉꾼이나 포악한 여성. 둘다 언어는 감각에 직접 작용할 때 가장 큰 의미를 갖는 것. 이 작품에서 여성 이야기꾼들. "귀로 들은 감각이 쾌감으로 변하면서 강렬한 효과를 발생한다." 따라서 4명의 주인공의 아내들이 잔혹한 처우를 받는 대신, 이 창녀들은 특별한 지위를.

사드의 언어는 고도로 정교한 논증적인 언어. 연속적인 묘사들 사이 사이에. 그러나 상대를 확신시키는 것은 겉치레에 불과하고, 추론 자체도 일종의 폭력이며, 결국은 자신이 폭력의 편에 서 있을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 예컨대, 이런 대사들, "우리를 동요시키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악의 관념, 악에 대한 생각이란 말이오. 결국 우리가 발기되는 것은 악 그 자체를 향한 것이지 대상물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대상물로부터 악을 행할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더 이상 발기할 수 없을 것이오.", "자연을 해체하고 우주를 무너뜨리는 것이어야 하오." 등등.

다른 한편, "사드의 언어는 화자와 청자간의 관계를 부정하는 언어이다."(바타이유) 묘사, 즉 신체의 반응은 역겨운 묘사를 예증하는 살아 있는 도표이며 난봉꾼의 명령은 새디즘의 공리를 보여주는 근본적인 연결고리로 되돌아가는 진술. 끝없는 반복, 피해자와 예증의 수를 계속 늘려 나가는 반복적인 양적 팽창과정, 더 이상 환원시킬 수 없는 근본적인 자신만의 고독한 논법을 반복하는 현상. 이 개념은 경험세계에서는 주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논증의 대상. 폭력의 강화는 피해자들의 수와 그들의 고통을 증가시킴으로써 이루어지며, 그 응축은 냉정함을 통해서. 열광이야말로 가장 혐오스러운 요소. 논증적 기능이 묘사적 기능을 복종시키고 절제된 방식으로 그것을 확대.응축시킨다는 것을. 이때 묘사는 잔인한 행위와 역겨운 행위라는 두 가지 영역을 모두 갖추어야. "방탕자란 욕망의 모든 환상과 온갖 광포함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의 가장 사소한 활동까지도 하나의 선명하고 의도적으로 계획된 표상에 의해 조명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인물"(푸코, 『말과 사물』)

에로틱한 담화의 궁극적인 한계들을 위반. 절대에 대한 그의 열망 속에서 언어를 갈가리 찢고, 규방문인들의 수사학을 산산조각낸다. "사드의 장면은 곧 현실 너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합의 복잡함, 파트너들의 왜곡된 태도, 쾌락추구자들의 엄청난 지출, 희생자들의 인내력, 모두가 인간의 천성을 넘어선다."(롤랑 바르트)

푸코의 언급 : 『돈키호테』가 르네상스와 고전주의의 문지방에 있다면, 근대문화로 들어서는 문지방에는 『쥐스띤느』와 『줄리에뜨』가. 고전주의적 표상의 한계를 분쇄하고 있는 어둡고도 반복적인 욕망의 폭력. 욕망, 폭력, 잔학행위, 죽음을 차례로 거치면서 찬연히 빛나는 표상의 표를 제시. 그러나 이 표는 너무 얇고 욕망의 비유형상들 모두에 대해 너무 투명하기 때문에 부조리. 사드 이후에 폭력이라든가 생과 사, 욕망이나 섹슈얼리티같은 것들은 표상의 하부에 거대한 그림자층을 형성.(『말과 사물』) 

2.부정, 그 극한에의 탐험 : 그의 부정은 모든 통치.법률을 초월하며, 창조.보존.개체화의 필요성을 벗어나 있다. 그것은 토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토대를 초월한다. 이데아의 대상이고 망상. 자신의 자아, 쾌락의 장소인 육체까지도 해체하는 방향으로.

새디즘의 매저키즘도 영광스러운 잔악행위를 최종적으로 인가해 주는 대관식이며 새디즘의 절정. -->절대적인 힘과 확신을 제공. 매저키즘에서의 박해자 여성은 결코 새디스트가 될 수 없다. 그 여성은 매저키즘적 상황 내에 존재하며 그 상황의 일부로서 매저키스트가 투사하는 환상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준다. 새디즘의 매저키스트 역시 전적으로 새디즘의 세계에 속하며 그 상황의 통합적 일부이기 때문. ->'새도-매저키즘'이라는 프로이드적 임상의학의 잘못된 유비추리가 유포한 허구. 변태성의 각 주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상반되는 변태성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같은 변태성을 가진 사람의 어떤 특정한 "요소"인 것.

새디즘에는 부계적.가부장적 주제가 지배적. 남성은 관찰자이며 모든 것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여주인공들의 모든 행위는 바로 남성을 위한 것. 사드는 어머니를 부드러운 분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창조, 보호, 재생산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이차적 자연으로. 반면, 아버지는 본질적으로는 기존의 모든 질서를 초월하며 무질서와 혼란을 퍼뜨리는 거친 분열성의 분자들로 구성된 일차적 자연을 대표. 그러므로 아버지가 살해되는 것은 그 고유의 본질과 기능에서 멀어질 때뿐. 어머니는 그것에 충실함으로써 살해. ->새디즘에서의 환상은 궁극적으로 딸로 하여금 어머니를 고문하고 살해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자신의 가정을 파괴하는 아버지라는 주제.(클로소프스키) 아버지는 원시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힘으로서 자연을 대표하며, 원래 상태로의 회귀는 그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모든 존재들을 파괴함으로써만 가능.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생산적인 것들에 대해 완벽한 종지부를 찍는 일. 자신이 잠들어 있을 때조차 자신의 사악함이 세계를 계속 물들여주기를. 환상은 최대한의 공격적 힘과 체계, 현실세계에 파고들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며 놀라울 정도의 폭력성이 여기에 투사되는 것. -->상상력을 극한의 지점까지 몰고가는 부정의 무한궤도, 절대부정의 영역을 언어로 표현하고자. 

3.사드에 있어서 혁명의 의미 : 사드는 공화국 정권의 모든 계약적 개념, 특히 법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발. 진정한 공화정의 주된 장애물이 법과 계약이라고. 법은 행동을 구속하고, 도덕성을 부과. 제도는 정의상 영원한 움직임, 지속적인 부도덕 상태에서의 자유분방하고 무정부적인 행동의 모델을 제공. 여기에는 사드의 심오한 정치적 통찰력이 엿보인다.

『줄리에뜨』에서 "법의 지배는 사악하다. 그것은 무질서의 지배보다도 못한 상태이다. 정부는 헌법을 다시 만들고자 할 때 반드시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과거의 법들을 폐기하기 위해서 법이 전혀 없는 혁명적인 정체를 수립해야만. 이 정체로부터 결국 새로운 법들이 나오지만, 이 두 번째 국가는 필연적으로 첫 번째 것보다 덜 순수. 왜냐면 무정부상태라는 첫 번째 선이 있어야만 두 번째 선인 국가의 형성에 이를 수 있기 때문. 더 나아가 '법이 많을 때 범죄도 많아진다. 어떠한 행위가 죄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 행동을 억제하기 위한 법을 만들지 말라. 그럴 때 수많은 죄악들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만은 확신을 갖자. 법률들은 쓸데없고 위험한 것일 뿐. 그것의 유일한 목적은 죄를 늘리는 것, 혹은 법 때문에 생겨날 수밖에 없는 비밀에 의해, 죄를 확실하게 저지르도록 하는 것. 법과 종교가 없다면 오늘날 인간의 지식이 어느 정도의 영광과 위대함에 도달했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 가당찮은 구속이 진보를 얼마나 늦췄는지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그가 보기에 혁명이란 인간의 생성이 과거의 법과 새로운 법 사이에 정지되어 있는 순간, 개인이 진정한 주권을 갖게 되는 순간, '존재라는 것이 스스로를 억제하고, 그 소멸로부터 끊임없이 태어나는 무한의 움직임일 뿐'(블랑쇼), 순수한 순간과 동일시되어야 할 것. 법의 침묵 속에서 인간의 유일한 진실, 즉 그의 무한한 부정의 능력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즐거운 위반의 광기가. 그것이 해체의 가상적 시간, 즉 사드가 봉기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것. 그것 대신에 현실이 보여주는 것은 냉랭한 공포정치, 성가신 관료정치, 또 향연이래야 과격공화파들의 난잡한 서정밖에 없는 것. 결국 그가 혁명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혁명이 그를 배반한 것. 


파솔리니의 『살로, 소돔 120일』 : 파시즘으로의 변주

* 사드는 20세기 초 좌파지식인들에게 광범하게 지지를 받았는데, 특히 초현실주의자 엘뤼아르와 부르통이 사드와 혁명의 동일시를 인정.-->"그는 혁명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그는 자신의 재능과 힘과 자유를 열망하는 전 인민의 재능을 대질시킬 수 있었다."(엘뤼아르) 사드는 성과 혁명과 사상에 대한 관계를 알기 위해 참조하는 기원 신화의 역할을. 유물론 철학자로, 정신병학의 선구자로. 그러다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극우파로, 나치즘의 상징으로 전이. 파솔리니의 영화도 그러한 해석적 지평 위에서 만들어진 것.

* 사드를 혁명의 관점에서 읽는 것이 부적절한 것처럼 그의 텍스트를 파시즘으로 해독하는 것 역시 부자연스럽다. 사드의 텍스트는 상상력과 언어, 표상의 문턱을 넘어서고자 하는 점에서 전복적이고 창조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현실정치의 평면으로 이동하는 순간, 그 강밀도는 현저하게 추락하고 만다. 파솔리니의 소돔 120일은 그런 점에서 실패작.

* 일단 이 작품은 배경을 1944-45년 북부 이태리 나찌 점령기로 삼고 악의 주인공들을 총재, 장관, 주교, 판사로, 그리고 폭력적 힘의 원천을 무장한 파시스트 군인들에 둔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사악성과 사디즘을 연결하는 의도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고 군데군데 진행되는 대사들, 예컨대, "소수만이 악을 저지를 수 있죠.", "가장 위대하고 유일한 원리는 피로 목욕하는 것", "사회적 특권보다 더 강한 육체적 쾌감도 없다"와 같은 것, 그리고 첫 번째 만찬의 광란 속에서 비장한 군가를 부르는 것 등의 장면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사드의 텍스트와 파솔리니의 영상은 심각하게 미끄러진다. 

* 우선 사드의 방탕의 축제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 설정에 대한 배치가 모호하기 그지 없다. 상상력의 극한을 탐험하려면 일단은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단절이 핵심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그저 일방적인 선포로만. 딸들과의 혼인이나 소년, 소녀의 선발 또한 이미 사회적 규범의 위반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 위반의 강도가 전혀 표현되지 못함. 근친상간이나여러 종류의 도착, 변태의 목록들은 그 자체로 이미 강력한 위반이긴 하나 예상가능한 것들. 서두 부분은 사드의 텍스트에서처럼 이런 행위들이 충분히 예행연습된 상황을 보여주어야. '살로'로의 이행은 위반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무의미한 절대악의 세계로 설정되어야. 그런데 영화에서 이 대목 역시 매우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고, 그래서 그들의 실험공간과 실험의 강도가 작위적으로.   
    
* 영화는 사드의 네 가지 정열을 세 가지로 변형. 망상의 주기/똥의 주기/피의 주기로. 망상을 통해 변태의 평범한 내용들을 체험하고, 똥을 통해 추하고 더러운 곳으로, 그 다음에는 눈을 도려내거나 껍질을 벗기는 살인 광태로. 이 경로는 아마 파시즘의 악마적 욕구가 죽음과 파괴의 선을 타는 경로를 보여주려는 것. 하지만 이것은 파시즘의 속성과 잘 포개지지 않는다. 파시즘은 '어떻게 스스로의 죽음을 욕망하는가?'라는 라이히의 문제설정이 보여주듯이, 기본적으로 피지배자들이 스스로 죽음과 업압을 욕망하는 방향성을 지닌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오직 지배자의 광기만이 있을 뿐, 피지배자들의 공포 혹은 광기의 전이, 죽음본능 등을 전혀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 사드의 텍스트는 극한적인 위반과 광기의 목록들을 냉정하고도 논증적인 사유로 분석하는 데 그 특이성이 있다. 이것을 영상화하려면 다음 둘 가운데 하나의 전략을 택해야 할 것. 악마적 본성에 대한 영상적 탐색, 곧 잔혹극으로 가거나 아니면 대사의 힘에 의거해 부정과 파괴에 대한 철학적 탐사, 곧 전위극으로 가거나. 파시즘이라는 구체적 역사의 평면과 관련지은 것은 아마도 전자의 방향을 추구한 것일 것. 그러나 파솔리니는 중간에서 어쩡쩡하게 멈추고 말았다. 장면들은 잔혹하다고 보기에는 다소 어설픈 순간에서 멈추어버렸고, 중간중간 끼어드는 '보들레르나 니체, 다다이즘'과 같은 대사들 역시 주변을 겉돌고 있을 뿐. 영상의 문법, 시각적 경계를 넘어가지도 못하고(예컨대, 고문과 살인의 장면들을 망원경을 통해포착한 것), 악의 심연에 대한 철학적 탐구도 못한 채 그저 사드의 명망(?)에 힘입은 영화적 해프닝!!

* 사드의 절대부정의 세계를 영상화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사드의 텍스트가 언어와 표상의 경계를 극한까지 몰고가는 것이라면, 영상미학에서 사드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주 다른 경로를 타야 하는 것이 아닐까? 


* 다음의 책들을 참고하였음. 

1.모리스 리베, 『사드』 1,2,3
2.질 들뢰즈, 『매저키즘』
3.린 헌트, 『포르노그라피의 발명』
4.파솔리니, 『폭력적 삶』 

1. 수유연구실 강좌 : 필로시네마, "영화로 탈주하기 2" 3강, 1999년 10월 22일, 강사/ 고미숙
역시 임의로 '가위질' 좀 했습니다... 
2. '사드-마조히즘'에 관한 소개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글은 더물다... 그 전체적인, 사드의 생애와 사회분위기, 문학적 평가를 아우른다는 의미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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