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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와 실체에 대한 철학적 물음들 : 『카게무사』

by 내오랜꿈 2009.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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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와 실체에 대한 철학적 물음들 : 『카게무사』


수유연구실 강좌 : "필로시네마 : 영화로 탈주하기 2" 8강 1999.11.26. / 고미숙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카게무사』는 엄청난 스케일의 자본이 투여되어야 하는 전쟁영화로 개봉되기까지 적지 않은 난관들을 거쳐야 했다. 구로사와는 초기에 제작자들의 외면으로 영화화가 어렵자 시나리오를 직접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1978년 번역대본과 그림을 갖고 유럽으로 건너가 전시회를 열었으나, 별무소득. 다시 미국으로. 미국에는 당시 미국영화계를 주름잡던 프란시스 코폴라와 조지 루카스가 자신들의 정신적 스승인 구로사와를 열렬히 맞이하였고, 마침내 그를 20세기 폭스사와 연결해 주었다. 20세기 폭스사는 다시 일본의 도호영화사에 접근하여 투자를 유도하여 미,일 합작을 성사시켰다. 이를테면, 구로사와는 "옆에 있는 제작자를 만나기 위해 지구를 반바퀴나 돌았던" 셈이다.

1980년에 개봉된 『카게무사』는 일본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인 6백만 달러가 투자되었고, 첫흥행에서 천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림으로써 일본영화 사상 최고 히트작이 되었다. 준비에서 흥행까지의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구로사와의 영화적 열정과 세계영화사에서의 위치, 그리고 일본관객의 저력을 두루 확인할 수 있다. 영화화 될지도 미지수인 작품을 그림으로 옮기다니! 도대체 자신의 시나리오를 이토록 사랑하는 감독이 있을까? 여기에는 "진정으로 영화적인 표현을 얻기 위해서는, 카메라와 마이크는 불과 물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 시나리오는 그렇게 할 힘을 지닌 무엇이어야 한다."는 구로사와의 육성이 그대로 무르녹아 있다.

그러면 도대체 그로 하여금 대륙을 횡단하게끔 한 시나리오는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전국시대 전쟁의 한 책략이었던 그림자 무사에 관한 것으로 자신의 주인과 일체화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이야기다. 이미 『라쇼몽』이나 『7인의 사무라이』를 통해 저 아득한 시간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 실존적 물음을 던지는 실력을 멋지게 보여준 구로사와 답게 이 시나리오의 기본구조 역시 참으로 특이하면서도 모던하다.

그러나 그의 진술에 따르면, 그가 이 시나리오에 착안하게 된 것이 일단 그림자와 실체라는 철학적 물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전국시대의 한 전투에 대한 흥미 때문이었다. 즉, 그는 다른 작품을 위해 16세기를 공부하다가 전국시대를 장식한 전투 중에서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에 의해 다께다군을 전멸시킨 나가시노 전투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거기서 그를 사로잡은 질문은 "노부나가와 이에야스 혈족이 하나도 죽지 않았는데, 다케다 혈족이 왜 전멸하게 되었는가?"라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전투에서 죽은 무사들은 신겐에 의해 마법에 걸린 듯한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신겐이 가케무사를 많이 썼다는 간단한 역사정보를 가지고서 그 수수께끼에 접근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인물을 어떻게 신겐의 성격 속에 빠져들게 해서 실제로 신겐이 될 수 있게 할 것인가?" 결국 그것은 "신겐(캐릭터)의 힘에 의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감독의 의도가 텍스트를 전적으로 통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의도와 미끄러질 수도 있고, 목표한 바의 경계를 넘어갈 수도 있다. 이 영화 또한 구로사와의 애초의 동기와 의도를 넘어선 여러 선들이 흘러다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전국시대라는 일본사의 격동의 현장이, 즉, 다께다 신겐과 그를 둘러싼 대명들의 전쟁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겐이라는 존재의 의미, 더 나아가 한 주체가 구성되는 방식에 대한 철학적 선들이 가로지르고 있다. 이제 이 두 계열을 따라 가면서 텍스트를 음미해보자. 


영화 속의 '일본사' 몇 장면

이 영화의 배경은 16세기 전국시대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일본은 오닌의 난(1467-1477) 이후 기존의 천황과 장군을 중심으로 했던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지면서 약 100여년간 유력 大名(다이묘)들 사이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카마쿠라 체제 이전의 무사동맹체의 우두머리들이나 혹은 슈고들과는 달리, 다이묘는 그 지위가 천황정부나 바쿠후의 합법적 승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 결코 아니었고, 단지 그의 무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다이묘는 그 자신이 하나의 권력이었다. 천황과 쇼군이 계속하여 교토에 존재했으나, 다이묘는 전장에서 승리로 얻은 것 이외에는 어떠한 권위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 수많은 다이묘들의 유동성으로 인해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강력한 힘을 가진 자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가능케 하는, 이른바 '사무라이 정신'을 구성하는 동력이기도 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전국시대 가운데서 서서히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한 16세기 후반기이다. 통일의 세 주역은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노부나가가 쌓아놓은 통일작업을 완료시킨 히데요시는 생략되었다. 그리고 노부나가와 이에야스 가운데 주역은 단연 전자이다.

먼저 오다 노부나가(1534-1582)에 대하여. 중부 일본에 영지를 확보하고 있었던 소규모 다이묘 가문의 아들이었던 노부나가가 단번에 전국 다이묘의 주역으로 떠오른 데는 그의 저돌적 힘과 치밀한 전략 덕분이다. 

1560년 5.18일 기요스성에 이마가와의 대군이 국경을 공격해왔다는 급전이 온다. 작전회의가 열렸으나 별다른 대책이 없어 노부나가는 잡담만 늘어놓다가 잠이나 자라고 부하들을 귀가시켰다. 밤이 샐 무렵 적군이 주요 성을 공략, 포위했다는 전령이 도달하자, 노부나가는 부채를 펼치고 휙 일어서더니 평소에 즐겨 부르던 노래, "인생은 일장춘몽, 덧없는 인생이라"(영화에서 신겐의 죽음을 확인한 다음 노부나가가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이 정보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것)를 부르고 즉시 갑옷을 갖추어 입고 선 채로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출진 명령을 내렸다. 겨우 5기만을 거느리고 성문을 박차고 나가 2시간 정도 걸려 전장에 도착했을 무렵에야 겨우 2천명이 뒤를 따라붙을 수 있었다. 노부나가는 여기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험악한 지형의 산그늘을 이용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적의 본진에 다가갔다. 적군은 승리의 무드에 싸인데다 폭풍우가 거세 산만하게 늘어져 있다가 폭풍우가 잠잠해지면서 갑자기 노부나가의 군대가 등장하자, 처음에 아군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용맹한 노부나가의 부하가 요시모토를 죽이니 때는 5월 19일 2시였다. 이것이 그를 가장 강력한 다이묘로 부상하게 해준 '오케하지마의 회전'이다.

이후 1570년대에는 다이묘들 가운데 최초로 교토에 입성하여 장군 요시아키를 옹립했으나 전국의 대명들이 난립하고 있어서 통일의 꿈은 여전히 요원했다. 그 가운데 관동의 강자 다케다 신겐이 가장 큰 적수였다.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와 손을 잡고 1572년 마카타가하라에서 신겐과 대결했으나 대패했고, 게다가 1573년 장군 요시아키가 노부나가에게 등을 돌려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신겐과의 큰 대결을 앞두고 신겐이 병으로 죽고 만다. 신겐의 죽음은 당분간 비밀에 부쳐졌는데, 장군은 신겐의 죽음을 모른 채 노부나가를 공격하려 하였고, 신겐의 죽음을 안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공략하여 추방해버렸다. 이것으로 무로마치 바쿠후의 시대는 마침내 역사의 장막 뒤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노부나가가 당대 최강자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흡수한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영화에도 그런 편린들이 언뜻언뜻 보인다. 먼저 전장으로 떠나기 전, 성 위에서 축성을 해주는 서양 신부들을 향해 '아멘!' 하고 외치는 장면과 이에야스와 강가에서 만나 회담을 할 때, 서양 와인을 들이키는 장면. 실제로 그는 당시 서양 선교사들과 깊은 친교를 맺었다. 그렇다고 그가 기독교 세계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당시 혼겐사로 대표되는 불교계와 싸우기 위해 기독교를 이용했을 뿐이다. 이에야스와의 해변정담을 나누고 떠나면서, "난 저 종교적 난봉꾼들을 진압해야하기 때문에 아주 바빠."라는 멘트가 나오는데, 아마 이 점을 염두에 둔 대사일 것이다.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를 이렇게 평가한다. "노부나가는 신불은 물론 그 밖의 우상도 모두 경멸하는 자이다." "노부나가는 이해력과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며 현실이 있을 뿐 죽음후의 세상 따위는 생각지 않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 점이 더욱 중요한데, 그는 당시 어떤 다이묘들보다 철포나 쾌속정 등 신무기의 기동력을 최대한 활용한 무장으로 평가된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대단원인 나가시노 전투(1575년 5월)가 그 점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군대는 조총으로 무장하여 미카와국 나가시노에서 카쓰요리와 맞서 3천명의 철포대를 3대로 나누어 교대로 성채가에서 쏘아 다케다군의 특기인 기마대가 철포에 맞아 모두 쓰러져 전멸한다. 1543년 포르투갈의 상인들에 의해 철포가 처음 전래된 지 40년 후의 일이었다. 이 전투는 일본 전쟁사의 한 분기점이라고 하는데, 조총이라는 신무기, 그것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경제력을 지닌 노부나가 군대의 승리는 다께다로 상징되는 "전통 무사도의 종언을 고하는 비극적 만가"(최원식)였던 것이다. 신겐의 죽음을 조총에 의한 것으로 처리한 것도 어쩌면 이런 점을 염두에 둔 허구적 장치일 수 있다. 나가시노 전투 이후 아시가루(足輕), 곧 조총으로 무장한 이 보병들이 이제 전쟁의 승패를 가늠하게 되었던 바, 노부나가 이후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는 히데요시가 바로 미천한 아시가루 출신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전쟁의 평민화?!)

그러면 우리의 주인공 다께다 신겐(1521-1573)은 역사적으로 어떤 인물인가? 그는 당시 호죠, 다케다, 우에스기 동국 3강의 하나였다. 스물 한 살에 아버지 노부토라를 스루가로 몰아내고 가이를 차지했고, 남쪽의 강자 스와씨를 2년간의 공방 끝에 격파했으며, 1545년 신겐가법을 제정하여 통치에도 힘썼다. 숙명적인 라이벌 우에스기 겐신과의 가와나카섬의 결전을 앞두고 자신의 아들 요시노부를 자결토록 했다.(영화의 제일 첫신에서 아버지를 몰아내고, 아들을 죽였다는 진술이 나오는데,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다.) 그후 스루가 공격을 개시하여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대하여, 노부나가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다.

그런데 실제로 다께다는 노부나가보다는 우에스기 겐신이라고 한다. 신겐은 곧바로 겐신을 떠올릴 만큼 겐신과 용호상박의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둘은 적대국에서 흉년이 들면 양식을 보내주고, 소금이 없어 곤란을 겪으면 소금을 보내줄 정도로 서로를 인정하는 라이벌이었다. "나는 소금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칼로 싸운다"는 겐신의 유명한 말에는 전통 무사도의 자긍심이 깊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께다의 속성이기도 하다. 어쨌든 다께다와 마찬가지로 우에스기 겐신 역시 대결전을 앞두고 뇌일혈로 졸지에 최후를 맞는다. 노부나가가 전국의 패자로 떠오른 데는 이 두 용장들의 허망한 죽음에 덕본 바가 크다. 물론 그것이 결국 "전통 무사도의 고매한 덕성은 콩볶는 듯한 조총소리 속에 단숨에 분쇄"(최원식)되는 역사적 필연성의 산물이라고 본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노부나가에 이어 전국을 마침내 통일한 히데요시는 해외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일으킨 임진왜란의 패배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사이에 힘을 비축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후계자 히데요리와 그의 지지자들을 1600년, 중부 혼슈의 산악지역에서 벌어진 운명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하게 통일의 완성자가 되었고, 그가 수립한 왕조가 바로 에도 바쿠후다.(김영희편저, 『이야기 일본사』 참조)


'전쟁영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화면배치

이제 구로사와가 제기하는 질문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보자. 먼저 오프닝 신은 신겐과 그의 동생 노부카도, 그리고 그림자가 될 사형수가 어떤 휘장 아래에 앉아있는 것으로 시작된다. "고정된 카메라, 풀 숏, 6분 가량의 롱 테이크", 다시 말해 "원신 원숏"으로 구성된 이 연극적 배치는 문자 그대로 사형수인 도둑이 신겐의 연기를 해야하는 연극을 미리 예고한다.(세 인물이 하나의 공간에 등장하는 유일한 장면)

아울러 이 영화는 전쟁영화임에도 일반적인 전쟁영화의 장르적 틀을 깨뜨리는 구성과 미장센을 특징으로 한다. 예를 들어, 기하학적인 화면 구성과 뛰어난 색채 감각으로 장대한 스케일을 통해 병사들이 출진하는 거대한 행렬을 계산된 구도 하에 보여주고, 그들이 입고 있는 군복이나 깃발의 색깔을 이용해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한다. 음악 또한 단 하나의 테마 음악만을 계속해서 변주한다.(『라쇼몽』의 '볼레로'가 그랬듯이.) 아울러 직접적인 전투 장면 대신 사운드 효과나 조명 효과를 이용하여 전투를 간접화하는 것이 대표적인데, 다카텐진 공격 때에도 그렇지만, 특히 절정이자 대파국인 나가시노 전투에서도 기마병이 공격하고, 조총 부대가 사격하는 것만 몽타쥬로 보일 뿐 직접적으로 유혈이 낭자한 싸움의 과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이정국, 『구로사와 아키라』에서)

결국 문제는 거대한 스펙터클, 피비린내나는 전장, 장엄한 서사적 구성 등 기존의 전쟁영화들이 장기로 삼았던 부분은 이 영화의 관심대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일개 도둑에 불과한 한 인간이 어떻게 신겐이라는 실체를 획득해가는가,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인물이 모든 소여들을" 어떻게 흡수하는가의 문제이다. 처음 도둑과 신겐의 유사성은 신체적 특징일 뿐이다. 신겐의 혈육인 노부카도만이 알아챌 수 있는 유사성이고, 둘은 사실 지독히 먼 거리에 있다. 일개 좀도둑과 통일을 꿈꾸는 다이묘. 하지만 도둑의 입을 통해 말해진 것처럼 그러한 사회적 배치의 이질성이 핵심은 아니다. "나는 좀도둑에 불과하지만, 당신은 수백 명을 죽이고 영토를 강탈했어. 누가 잔인한 거지?" 이런 공격에 신겐은 "난 못된 깡패야. 아버지를 쫓아내고 아들을 죽였어. 이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어떤 짓도 할 것이다. 그것만이 이 피의 악순환을 멈출 수 있지." 이 솔직담백함은 신겐의 캐릭터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인 바, 이것은 둘의 인간적 유사성이면서도 또 진정한 차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둑은 한편으로 신겐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래서 결코 단순한 연기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다께다 신겐', 그 빈 공간을 둘러싼 몇 가지 흐름들

교토가 보이는 언덕에서 신겐이 최후를 마치자 이제 이 자리는 빈 공간이 되었다. 이 빈 공간을 일개 좀도둑이 채워가는 것, 이것이 이 영화의 구도이다. 그림자 무사는 "주인을 둘러싼 모든 것을 흡수해야만 하며, 그는 그 자신이 인상이 되어 다양한 상황들"을 통과해야 한다. 그에게 주어진 질문의 소여란 "상황 속에 숨겨져 있고 상황 속에 싸여져 있으며, 주인공이 행동할 수 있으려면, 상황에 대해 반응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추출해내야만 하는" 바의 것들이다.

신겐이라는 주체의 빈 자리는 다양한 계열들의 흐름들에 의해 규정되는 바, 그것은 크게 신겐의 내부에 있는 항목들과 외부에 있는 항목들로 구분된다. 부하들과 가족이 전자를 구성한다면, 간자들 및 그들의 정보에 의존하는 노부나가와 이에야스가 후자에 속한다. 그림자가 해야 할 일은 이 계열들이 서로 교차하는 빈 공간을 채워주어야 하는 것이다.

사열 장면은 부하들과 간자들을 동시에 속일 수 있다. 그의 역동적 행진에 압도하여 부하들과 간자는 그의 건재를 믿을 수밖에 없다. 그들로서는 그러한 힘과 정동은 그림자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어떤 경지의 발로이다. 또 간자들은 부하들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논리를 뛰어넘는 신겐의 카리스마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논리상으로 신겐은 분명히 죽었다. 죽었어야 한다! 그런데 저 강하고 힘찬 '폼'으로 사열을 하고, 위엄있는 자태로 가부키를 감상하는 것은 누구인가? 도대체 신겐 그 자신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저것을 흉내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로서는 객관적 정황과 가짜 현실 사이의 이 엄청난 간극을 그림자가 메우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는 순전히 신겐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전투를 개시한다. 이것을 통과한다면 그는 주어진 소여를 충족할 수 있을 터.

물론 그 이전에 내부의 여러 막들을 통과하는 경로를 거친다. 아이, 시종, 첩, 말 등. 사실 이 막들은 신체의 미세한 흔적들을 주시하는 것이어서 그림자가 메우기가 결코 쉽지 않은 부분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할아버지가 아니야!"라고 외치는 아이. 이것은 그 아이만이 볼 수 있는 어떤 특징, 아마도 위엄이 무서움을 야기했던 그 느낌의 부재에 대한 반응이다. 재치있는 대응에 "맞아, 할아버지는 변하셨어. 무섭지 않아."라고 대응하고, 그후 아이는 그림자인 할아버지의 이중체와 가장 친숙해진다. 그가 원하는 것, 그것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보초와 수행원들의 시선. 그것은 그에게 주인으로서의 태도와 인품을 요구하는데, "너무 거만하시군요. 돌아가신 영주님은 그러지 않으셨소." 여기에 그는 신겐 특유의 폼, "받침대위에 턱을 괴고 그윽히 시선을 내리까는" 모습을 연출한다. -순간 그림자에게 압도당하는 수행원들.

그 다음, 첩들은 그의 신체의 특징들을 한층 깊은 곳까지 꿰뚫고 있다.(뒤에 결정적으로 들키는 것도 어깨 뒤의 상처 때문임을 상기할 것!) 그의 목소리, 말투, 피부, 등등. 이것들은 아이나 시종들을 통과하는 방식과는 다른 것이 요구된다. 그는 이 난관을 진실을 말함으로써 돌파한다. "연극은 끝났소. 나는 신겐이 아니다. 카게무사일 뿐." 의심하고 있는 대상들에게 그들의 의혹을 앞질러 가 발화해 버림으로써 상황을 전복해버린 것이다. 상황을 능동적으로 역이용하는 힘, 이것은 곧 그가 신겐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으로 믿게 만든 것이다. - 첩들을 멋지게 속이고 걸어나오는 그림자 무사의 뒷편으로 긴 그림자가 걸쳐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그림자가 신겐의 빈 자리를 메꾸어가는 과정이자, 다른 한편 신겐이라는 주체가 구성된 방식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신겐을 포함하여 모든 주체는 타자의 메시지, 타자들과의 배치 속에서 구성된다. "의미작용을 통해 타자의 메시지가 반복됨으로써 반복적인 의미와 반복적인 주체의 기표를 만들어 낸다. 이 반복적인 주체의 의미와 기표는 개인의 반복적인 사고와 행동의 준거가 된다. 이러한 준거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라캉은 동일화 혹은 동일시라고"(이진경)한다. - 상징적 동일시. 그림자 무사는 타자들이 욕망하는 바를 수행함으로써 실체와 중첩되어 가는 것. "인정욕망을 통해서 개인은 주체가 된다."(이진경, 「라캉 : 도둑맞은 편지, 도둑맞은 무의식」) 사실 이것은 죽은 신겐 역시 마찬가지. 타자들이 욕망하는 바를 수행할 수 없을 때, 그 또한 한갖 그림자로 추락할 뿐. 이 영화가 16세기 신겐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해석의 지평을 넘어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쟁 수행의 능력 - 소여의 정점?

그런데 이 영화를 단지 타자의 시선에 의해 주체가 구성되는 방식만을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다. 신겐이라는 인물이 지닌 범접할 수 없는 능력, 그것은 사실 대부분의 인간들이 구성하는 주체와는 질을 달리하는 양태인데, 이 영화의 비극성의 깊이는 그림자가 그 질의 강밀도를 획득한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분명 이전에 통과한 내,외부의 막들과는 다른 종류의 소여이다. -깃발과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 깃발은 신겐의 상징이자 그 자체이다. "바람처럼 빠르고, 숲처럼 고요하고 불처럼 격렬하고 산처럼 꿋꿋하다."는 깃발의 의미는 신겐이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실체의 자리,--창기병과 기마병으로 구성된 그의 군대들의 뛰어난 특징과 그것들을 통솔하는 신겐의 고유성이--이다. 먼저 작전회의에서 그림자는 그 점을 일차적으로 획득한다.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신겐의 유언이기도 하고, 가신들이 신겐에게 요구하는 바의 것을 낚아채어 버린 것이다.

이어지는 꿈 혹은 악몽은 그림자가 신겐의 소여의 심층에 다가가기 직전의 통과예의같은 의미를 지닌다. 항아리를 찢고 다가오는 신겐을 벗어나기 위해 도망가는 그림자. 그러나 돌아서 가버리는 실체를 쫓아 물 속을 정신없이 헤매는 그림자. 벗어날 수도, 그렇다고 그와 완전히 겹쳐질 수도 없는 그림자의 딜레마! 여기서 신겐이 갑옷으로 무장한 장군의 복장인 것을 유념하자. 그것은 이제 그림자가 통과해야 하는 것이 전쟁수행자로서의 신겐의 실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터.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는 신겐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싸움을 건다. 그들로서는 승리 직전에 후퇴하는 신겐을 이해할 수 없다.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에게 있어 신겐이라는 존재는 '전쟁기계'로서의 그것이다. 자신들과 동일한 욕망, 동일한 욕구,--예컨대 교토로 진격하여 천하를 통일하려는--의 소지자이면서 자신들과 같거나 혹은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전략을 구사하는 통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전쟁의 능력을 수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겐이라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

타카텐진 전투에서 그림자는 신겐의 소여를 더욱 강도높게 획득한다. 난생 처음 전투에 참여해 본 그는 처음에는 꼭두각시였다. 그러나 전투의 진행과정을 목도하면서,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빼앗긴 시체를 보면서, 그는 이제 정말(!) 신겐이 된다. "움직이지 마라."는 명령. 이것은 작전회의에서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는 질이 다르다. 이것은 그림자가 아닌, '오야마' 신겐의 명령이다. 이에야스의 맹장 '혼다'의 야간기습, 그것은 다께다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목표를 지닌 것인데, 이제 산처럼 버티고 선 그림자는 그에게 신겐 그 자체인 것이다. 소여의 정점.! - 그는 타자들이 욕망하는 바를 모두 수행한 것이다. 


실체의 증발, 그림자의 소멸

이 전투는 카쓰요리가 일으키고 그의 전투력으로 승리를 낚아챈 것이지만 카쓰요리는 승리의 몫이 '신겐의 힘', '깃발의 힘'인 것을 안다. 여기서 카쓰요리의 존재가 흥미로운데, 그는 신겐과 그의 집합적 주체들 사이에서 미끄러진 선이다. 후계자 자리를 자신의 아이에게 빼앗기고, 깃발조차 사용할 수 없는 외면된 자식이다. 그런 점에서 신겐과 대립된 위치에 있고, 아울러 그림자가 지나가는 자리로부터 계속 삐져 나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카쓰요리야말로 그림자가 구성하는 실체성을 누구보다 강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가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그림자가 도둑이라는 사실 따위가 아니라, 신겐을 둘러싼 여러 정황, 계열들의 흐름이다. 그것들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킬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 그에게 신체의 소멸여부는 관건이 아닌 것이다. 실제 전투는 자신이 수행했는데도 "적들을 쫓아버린 것은 아버지의 힘"이라는 것을 그는 부인할 수가 없는 상황!

이렇게 하여 내부,외부, 전쟁까지 다양한 계열이 요구하는 바를 흡수한 그림자는 이제 그 정점에서 추락한다. 신겐이 준 시간 3년이 다 된 것이다.(말에서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그는 추락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시간은 다 되었고, 연극은 끝난 것이다. 부러진 팔을 감싸쥐고 초라한 몰골로 걸어나가는 뒷모습과 새로운 주인이 되어 들어오는 카쓰요리의 정면이 서로 엇갈리면서.

카쓰요리는 신겐의 소여를 흡수할 수도, 그렇다고 거기에 복속될 수도 없는 존재이다. 그는 그만의 깃발과 카리스마를 획득해야 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오야마의 유언이자 '움직이지 마라'는 호명을 거부하며, 출진을 한다. 말리는 가신들을 버리고 해안가를 따라 전진하는 카쓰요리, "산이 움직였군." 노부나가의 희색. 그것은 신겐이라는 실체가 없는 그의 군대는 이미 적수가 아니라는 승리자의 기쁨을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카쓰요리는 깃발의 의미를 획득할 수 없다. 깃발을 쓰고 있지만 그것을 부정, 소멸시키는 역할만을 대행할 뿐이다. 바람, 숲, 불을 지휘하는 가신들은 자신들의 종말을 알고 있다. 그들은 신겐과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림자의 경우는? 그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너무 많은 것을 흡수해버린 것이다. "모든 주어진 소여들을 흡수하는 자는 단지 하나의 이중체, 주인 또는 세계에 봉사하는 하나의 그림자"(들뢰즈)가 되고 만 것이다. 애초의 상태보다는 좋은 삶의 조건이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을 수밖에 없다. 그 상태에서 그가 돌파할 수 있는 탈주의 공간은 없다.!

1575.5.25. 나가시노 전투는 신겐과 신겐을 구성하는 것들이 모조리 소멸되는 대스펙터클이다. 먼저 기병들이 바람처럼 치달리는 모습이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되고, 그리고 총소리. 그 역동적 진격이 콩볶는 듯한 총소리로 끝나고, 갈대 숲에서 가슴을 쮜어뜯는 그림자와 본대의 당혹한 표정이 몽타쥬됨으로써 전쟁의 경로가 전달된다. 어쩌면 여기서 노부나가나 총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맞서 싸우는 적들이 아니라, 실체가 사라진 그림자들의 최후의 운명적 질주!. 그들은 신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죽음의 행진 마지막에 노부카도의 얼굴이 크로즈업되면서 절망적인 몸짓으로 그림자가 들판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죽음. 물가에 다시 와 떠내려가는 깃발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서로 어긋나는 라스트 신. 화면을 채우는 깃발. 그것은 신겐, 그리고 그림자가 흡수하고자 했던, 그리고 타자들이 그에게서 욕망했던 기표, 그것이 아닐지. 그렇다면 그림자뿐 아니라, 신겐 자신 또한 하나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아니, 우리 모두 역시!


蛇足(군말)

이런 견해는 어떤가? 이 영화는 "권력 바깥에서 작은 자유의 영역을 구축했던 도둑이 그림자 무사로 신겐을 대리하면서 전도"가 일어나, "진심으로 권력에 충성스런 이데올로그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권력과 자신을 일체화하는 일본 민중의 국가주의적 경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 "일본을 통일로 이끌 이 근대적 힘이 곧 조선침략을 향해 몰려갈 것이라는 비판적 의식의 함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아시아 의식의 결여에 있을 것." 요컨대, "권력에 대한 숙명적 체관과 제휴하고 있는 아시아 의식의 결락"-->민족과 민중이라는 척도. 하지만 이것은 구로사와가 제기한 탈근대적 질문들을 근대적 평면으로 환원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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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와 더불어 진정으로 구로자와 아키라를 이해하려면, 『라쇼몽』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50여 년이 지난 영화임에도 『라쇼몽』이 간직한 철학적 깊이는 보면 볼수록 감탄하게 된다. 영화 한 편이 하나의 철학서적보다 더 철학적일 수도 있다는 것, 그게 『라쇼몽』이 아닐런지. 이 『카게무사』에도 '기표/상징/동일시/배치'라는 단어들로 정리될 수 있는 라캉의 주체이론을 설명할 수 있다. 이른바 '주체의 동일시' 혹은 '상징적 동일시'로 설명할 수 있는 무의식의 주체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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