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감자 눈을 나누어 싹 틔우기 작업을 하다가 지금까지는 생각하지 못 했던 걸 하나 발견했다. 씨감자를 적당한 크기로 조각낸 다음 절단면이 어느 정도 아문 뒤 재를 묻혀 놓아 둔다. 옛날부터 해 오던 방식인데 아마도 절단면으로 침투할 수 있는 각종 세균 방지를 위해 소독용으로 재를 이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솔직히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치 민간신앙 비슷하게 '무조건' 효과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지 과학적으로 증명된 자료를 본 건 없다. 안 해도 감자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은 물론이다. 오히려 요즘 전업농가에서는 재를 묻히기보다는 종자소독용 수화제를 많이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재를 바르고 안 바르고는 각자 마음 내키는 대로 할 문제고 내가 발견한 건 절단면이 아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큐티클층의 역할이다. 재를 바르기 전에는 별 생각 없이 넘어갔는데 바르고 난 뒤 두어 시간 지나니 수미 씨감자 조각에서만 유난히 절단면이 젖어 있는 게 많이 보이는 것이다. 두백 씨감자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증상이었다. 이것은 두백 씨감자 조각은 상처가 다 아물었지만 수미는 아직 아물지 않은 조각이 많다는 뜻이다. "왜 유독 수미만 이렇지?"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처음에는 바로 답을 찾아내지는 못 했다. 그저 두백 품종이 수미 품종보다 상처가 빨리 아문다고만 생각했던 것.
▲ 두백 씨감자 조각. 3일 지난 모습인데 절단면이 깨끗하게 아물었다.
▲ 수미 씨감자 조각. 절단면에서 수분이 흘러 나와 젖어 있는 게 많이 눈에 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이 고개를 든다. 내가 알기에 수미 품종은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그 어떤 감자 품종보다 조직이 단단하고 휴면기가 긴 품종이다(이걸 좋은 품종이라는 말로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이건 다른 품종보다 상처 치유 능력이 뛰어난 이유가 될 수는 있어도 떨어질 이유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씨감자 조각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내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품종의 차이가 아니라 이중 절단면의 유무가 낳은 차이다. 수미 씨감자는 알이 굵은 게 많은 까닭에 서너 조각으로 자른 게 제법 된다. 이론적으로 적당한 씨감자 조각의 무게는 30~35g 정도라고 하니 100g이나 150g 이상 나가는 건 크기에 따라 서너 조각으로 나누다 보니 절단면이 이중으로 생기게 된 것. 곧 씨감자를 한 번만 자르면 절단면은 모두 기존의 껍질층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걸 한 번 더 자르게 되면 절단면끼리 만나는 부위가 생기게 된다. 수미 씨감자 조각에서 며칠이 지나도 상처가 아물지 않은 건 전부 이 절단면끼리 만나는 부위가 있는 조각인 것이다. 반면에 두백 씨감자는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들 뿐이었던지라 자르지 않고 그냥 두던가 한 번만 잘랐던 것.
▲ 이중 절단면의 유무에 따른 상처 아물기의 차이를 보여주는 수미 씨감자. 한 번만 자른 조각은 모두 상처가 아문 반면 한 번 더 자른 조각은 미처 상처가 아물지 못 하고 수분이 흘러내리고 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식물의 줄기나 잎에는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여러 가지 물질이 함유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표피조직에 큐틴, 펙틴 같은 물질이 많이 몰려 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펙틴은 상처의 응고제 역할을 하는 물질이고 큐틴은 각종 병균의 칩입을 막는 역할을 하는 물질이라 생각하면 된다. 감자의 껍질에도 당연히 이들 물질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씨감자를 절단해서, 곧 상처를 내서 심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건 이 펙틴과 큐틴 같은 물질 덕분인 것. 감자에 상처가 나면 펙틴이 껍질층에서 상처 부위로 이동하여 상처를 응고하게 만들어 수분증발을 막고 큐틴이 단단한 왁스층을 형성하여 병균의 침입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중 절단면이 생기면 상처 부위가 껍질층과 더 멀어지고 더 넓어지게 된다. 그만큼 상처의 치유도 늦어지게 되는 것. 자그마한 차이에 불과하지만 식물도 나름대로 이렇게 예민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린다 뿐이지 제대로 자란 건강한 씨감자라면 수화제 같은 각종 종자소독제(이건 농약의 일종일 뿐이다)를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종묘회사, 농약회사의 이익을 대변하는 농협과 농업기술센터의 엉터리 영농지도가 무지한 전업농가들의 각종 수화제 사용을 부추기고 있다. 그래야 수확량이 늘어난다는 달콤한 유혹에 안 넘어갈 수가 없는 것. 이 뿐인가? 수확량이 늘어난다는 소리에 토양소독제나 제초제를 비롯한 각종 농약 뿌리고, 각종 비료 뿌리고, 비닐 덮어 씌우고... 끝이 없다, 농사에서도 자본의 노예가 되어 가는 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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