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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먹거리

된장, 고추장, 젓갈 - 혀가 아닌 가슴으로 기억된 맛

by 내오랜꿈 2016.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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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겨울철을 농한기라 부른다. 모든 농사를 오롯이 자연에 의존하던 시절에는 작물이 생육하지 않는 겨울철에 농사 짓는다는 건 생각도 못 했을 터. 그래서 겨울이 되면 그 해에 수확한 것들을 가지고 1년 먹거리를 준비하느라 집집마다 굴뚝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엔 농한기, 농번기가 따로 없다. 오히려 겨울철에 더 바쁜 전업농가도 부지기수다. 그러다 보니 먹거리를 준비하는 모습도 옛날 같지 않다.


시대가 변하면 먹거리도 변하고 먹거리를 준비하는 풍경도 달라진다. 된장, 간장, 고추장은 물론 김치마저 필요할 때마다 마트에서 사 먹는 시절이니 철마다 1년 먹거리를 준비하던 모습은 점점 더 사라져가는, 옛 추억의 하나로 남겨진다. 이러한 변화가 '좋다 나쁘다'의 이분법적 선택의 문제는 아니겠으나 내 먹거리를 내가 아닌 남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는 현상이 그리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흔히들 쉽게 말하는, '남이 해 주는 밥은 무조건 맛있다'는 말은 실제로 그렇다기보다는 먹거리를 만드는 일의 수고로움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옳지 않을까?



▲ 멸치젓갈


철마다 1년 먹거리를 준비하던 시절엔 장이나 젓갈 담그고 김장 준비하는 게 농사 짓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해가 바뀌면 제일 먼저 고추장 담그기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엔 겨우내 잘 띄운 메주를 씻어 말리고 항아리를 준비한다. 가장 중요한 장 담그기가 시작되는 것. 요즘이야 볕 좋고 바람 불지 않는 날 담그는 게 보통이지만 내 어머니 세대만 하더라도 말날이니 신날이니 따져 가며 장을 담궜다. 장 담그고 50여 일 숙성시킨 뒤 본격적인 농사철로 접어들기 전에 장 가르기를 한다. 이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가장 중요한 먹거리인 된장, 간장 맛이 결정된다. 장 가르기가 끝나면 이내 젓갈을 담궈야 한다. 멸치젓갈이든 새우젓갈이든 5월부터 젓갈 담그기가 시작된다. 이 젓갈이 김장의 기본이 되는 것이니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젓갈은 재료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3~6개월 정도 숙성시키면 완성되는데 그 시기에 맞춰 김장철이 돌아온다. 김장 담그고 나면 이내 메주 띄우기가 시작된다. 더러 순서가 바뀌는 경우는 있어도 빠뜨리는 일은 없는 것들이다.


시골살이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준비한 것들 가운데 하나가 항아리다. 장 담그기를 위해서다. 결혼한 뒤로도 장류나 김치류는 늘 시골집에서 가져다 먹었다. 그러다 어머니께서 점점 힘에 부쳐 장 담그기를 그만둘 무렵부터는 형제자매들이 모여서 함께 장과 김치를 담궈 먹게 되었다. 말이 함께지 나는 거의 가져다 먹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직접 담근 장과 젓갈에 길든 입맛은 마트에서 파는 장이나 조미료가 덧칠된 음식에 자연스레 거부감을 느끼게 만든다. 특히나 내 고향 울산과 경주를 축으로 하는 경남 동부 지역은 우리나라의 장문화에서 독특한 문화권에 속한다. 요즘이야 개량식 장 담그기가 많이 보편화되면서 된장 따로 간장 따로 담그는 경우가 많지만 재래식 장 담그기에서는 장을 담그고 숙성시킨 다음 된장과 간장을 나누는 장 가르기를 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울산이나 경주 지방에서는 옛날부터 간장과 된장을 따로 담궜다. 간장을 빼고 난 메주는 여타의 지역에서처럼 된장을 담그는 게 아니라 주로 소여물로 쓰였다. 혀로, 가슴으로 기억된 이 장맛은 그 뒤로 무던히도 나를 괴롭히게 된다. 간장 뺀 메주 넣어 담근 된장으로 만든 음식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 그런 만큼 장 담그기는 나로서는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일거리라 할 수 있다.



▲ 메주 띄워 장 담그기


장 담그기는 메주 띄우기부터 시작된다. 수확을 끝낸 늦가을부터 초겨울 사이에 날을 잡아 메주를 만든다. 메주콩 불리고 삶고 으깨고 모양내어 애벌 말리기까지 최소 사나흘이 걸리는 작업이다. 이 메주를 만들 때 함께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가 묵은 된장 손 보는 일이다. 된장은 담근 지 오래될수록 표면의 색깔도 검게 변하고 딱딱해진다. 또 여름을 나기 위해 끼얹은 소금으로 인해 짠맛도 강해진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메주콩을 삶아 섞어주는 일을 하기도 하는 것. 그러니 메주 만들 때 양을 넉넉하게 잡으면 남는 콩과 메주 삶은 물을 이용하여 묵은 된장까지 한꺼번에 손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애벌 말린 메주는 짚으로 엮은 줄에 매달아 공기가 잘 통하는 곳에서 겨우내 말린다. 이렇게 말리면서 곰팡이가 핀 정도를 보아 가며 다시 한 번 더 띄울지 말지를 결정한다. 


이 메주 띄우기도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다. 옛날에는 대부분 오래 띄웠다. 바람 잘 통하는 곳에서 말린 메주를 가마니에 넣어 쇠죽 끓이는 방 아랫목에서 보름이나 한 달 가량 띄우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옛날처럼 무조건 오래 띄우지 않는다. 잘 띄운 메주의 핵심이 눈에 보이는 곰팡이류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고초균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때문이기도 하지만 메주를 오래 띄우면 그만큼 잡균도 많이 생기는 까닭에 장맛이 떨어지게 된다. 참고로 메주의 발효에 관여하는 미생물은 99%가 고초균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이고, 눈에 보이는 곰팡이류는 1%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게 현대 과학이 밝혀낸 사실이다. 어쨌거나 메주 띄우기가 끝나는 대로 장을 담근다.



▲ 고추장 담그기


장 담그기와 비슷한 시기에 하는 게 고추장 담그기다. 장 담그기보다 먼저 하는 게 보통이다. 옛말에 고추장 담그기는 정월 보름을 넘기지 말라고도 했는데 명확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닌 듯하다. 고추장은 장보다는 염도가 약하기 때문에 늦게 담그면 미처 숙성되기 전에 변할 염려가 있으니 일찍 담그는 게 좋다는 의미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추장 담그기는 장 담그기보다 간편하고 쉽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고추장도 제대로 담글려면 장 담그기보다 손이 많이 간다. 먼저 메주부터 고추장용 메주를 따로 띄워야 한다. 간장용 메주는 오래 띄우기 때문에 곰팡이가 지나치게 많이 번식하는 까닭에 그대로 쓰면 고추장의 맛과 향을 떨어뜨리기 때문. 하지만 소량의 고추장용 메주를 얻기 위해 따로 콩을 삶고 곡물가루를 내어 메주를 만든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히도 요즘은 고추장용 메줏가루를 만들어 팔고 있으니 번거로운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 청국장 띄우기


시골살이를 하면서 만드는 중요한 먹거리에는 청국장도 빼 놓을 수 없다. 청국장은 된장보다 단백질 함량이나 열량이 높고 발효기간도 장류 중에서 가장 짧은 3~4일 정도다. 따라서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를 하는 농경문화권에서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먹거리를 직접 키운 채소들에 의존하는 우리 집에서 청국장은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어찌 보면 나에겐 농한기인 겨울에 하는, 이런저런 먹거리 준비하고 만드는 일들이 농사 짓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같다. 꼭 필요한 먹거리이기도 하지만 내게 이것들은 오래된 추억을 되살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맛은 원래 기억을 통해 재생산 되는 법이다. 혀로 느끼고 머리로 기억하지만 때로는 가슴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가슴으로 기억된 맛은 어쩌면 그리움이자 추억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내게 된장, 고추장, 젓갈은 혀가 아닌 가슴으로 기억된 맛이다.


※ 월간 <작은책>, 2016년 2월호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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