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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먹거리

무조청 만들기 - 잊혀져 가는 추억의 맛

by 내오랜꿈 2016.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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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은 기억을 통해 재생산 된다. 혀로 느끼고 머리로 기억하지만 때로는 가슴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가슴으로 기억된 맛은 어쩌면 그리움이자 추억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맛있다!"는 표현은 어떤 경우 지나치게 주관적이다. 같은 음식도 언제 먹느냐, 누구와 먹느냐에 따라 그 평가는 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 그런 만큼 맛은 불완전한 기억이다. 맛의 주체인 혀는 한 인간의 개인사와 떨어져 존재할 수 없고, 무수한 개인사는 그 개인이 속한 사회와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맛은 오롯이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특정 사회의 사람들을 오랫동안 길들이고 지배하는 구조적 실체로서 존재한다(여기서도 구조주의인가?).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장맛'이나 '김치맛'에 대한 감각은 우리 나름의 독특한 미각 구조 속에 살면서 특정한 맛에 길들여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길들여진 구조적 실체로서의 맛, 음식 가운데 현대에 들어와 서서히 발언권을 잃어가는 것 중에 하나가 조청이다.

 

내 어릴 적만 하더라도 설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조청을 고는 모습은 빠지지 않는 연례행사였다. 목청, 석청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꿀을 청(淸)이라고 했으니 조청(造淸)은 인공적으로 만든 꿀이라는 뜻이다. 오늘날과 같은 양봉이 없던 시절에 꿀은 귀한 것이었을 테니 떡이나 강정 같은 음식을 만들 때는 조청을 만들어 써야 했다. 설 하면 강정이 생각날 정도로 강정은 어느 집에서나 만드는 설 음식이고 강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청을 고아야 했던 것. 설탕 같은 인공감미료가 없던 시절에는 더더욱 필요했던 음식이 조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탕의 종횡무진 활약과 강정 만들기의 사라짐 속에 집집마다 조청을 고는 모습은 이제 점점 희미한 옛 추억의 그림자로 남겨지고 있다. 들이는 공에 비해 지나치게 볼품없는 결실은 이러한 조청의 발언권 상실을 더욱 가속화시킨 요소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런저런 손길이 가는 힘든 공정을 거치면서 하루, 이틀을 꼬박 투자해도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조청의 양은 겨우 몇 킬로그램. 그 결과물을 보면 대부분은 허탈해지기 마련인 게 조청 만들기다.

 

 

 

▲ 이틀 동안 공들인 조청 만들기의 결과물인 무조청 4.5kg. 들인 공에 비해 드러나는 결과물은 너무나 빈약하다. 그러니 무조청 만들기는 점점 희미한 옛 추억의 그림자로 전락하고 있다.

 

조청은 전분질을 함유한 모든 곡물로 만들 수 있다. 넓게 보면 곡물만이 아니라 당분을 함유하고 있는 식재료는 모두 다 조청의 원료가 될 수 있다. 무도 그 중의 하나다. 가을에 수확한 뒤 저장했던 무를 수시로 꺼내 먹고 있는데, 버린 셈 치고 텃밭에 방치해 둔 무를 수확하고 보니 오래 저장한 무를 소비하는 일이 급선무로 떠올랐다. 그래서 전부터 생각만 하고 있었던 무 조청 만들기를 실행에 옮겼다. 아무래도 무말랭이 만드는 건 소비하는데 한계가 있는지라 한꺼번에 많이 소비할 욕심에 앞뒤 가리지 않고 고생길에 들어선 셈이다.

 

조청 만들기는 하나로 통일되는 정답이 없는 일이다. 곡물의 전분질 익히기, 엿기름 물에 당화시키기, 엿기름 물 걸러 내기, 걸러 낸 엿물 달이기. 크게 이 네 과정으로 나누지만 그 세부 과정은 만드는 이의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가감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다음은 지난 이틀간의 무 조청 만들기에 대한 내 나름의 긴 여정이다. 재료는 무 15Kg, 쌀 3.6Kg, 엿기름 2Kg이다.

 

 

 

▲ 무 썰어 익히기. 밥에 넣을 때는 채 써는데 너무 많은 양(15kg)이라 최대한 얇게 저미듯 썬 다음 적당량의 물을 부어 두어 시간 삶아서 물을 내린다.

 

1) 무 썰어서 익히고 물 내기. 소량일 때는 무를 얇게 저며 밥 할 때 같이 넣어도 되지만 무를 15Kg이나 썰고 보니 도저히 밥에 넣을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그래서 무를 솥에 삶아서 푹 익힌 다음 물을 짜 낸다. 두 시간 정도 삶고 두 시간 정도 뜸 들인 다음 삼베 보자기에 넣은 다음 눌러 물을 짠다.

 

 

 

▲ 무 삶아 내린 물에 엿기름과 밥을 넣고 세 시간 정도 삭힌다. 쌀과 엿기름의 전분질을 당화시키는 과정이다.

 

2) 엿기름에 전분질 당화시키기. 무 삶아낸 물에 엿기름과 쌀밥을 넣고 삭히는 과정을 거친다. 쌀과 엿기름의 전분질을 당화시키는 과정이다. 50~60℃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면서 세 시간 정도 삭힌다. 식혜를 만들 때처럼 밥알이 뜨면서 물빛이 맑아지면 다 된 것이다. 다 삭혀졌으면 엿물을 짜야 한다. 찌꺼기가 들어가면 안 되니까 이때는 면으로 만든 자루나 고운 체를 사용해서 걸러 내야 한다.

 

 

 

▲ 엿물을 달이는 시간이 경과할수록 빛깔은 짙은 갈색으로 변해 간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불 조절이다. 끓어넘치면 그 만큼의 조청이 없어지는 것이기에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엿물이 어느 정도 졸아들면서 표면에 작은 거품이 생기기 시작하면 눌지 않도록 주걱으로 자주 저어주어야 한다.

 

3) 엿물 고으기. 엿물을 솥에 붓고 달인다. 달이면서 넘치면 헛일이기에 불을 너무 세게 때면 안 된다. 뭉근한 불로 넘치지 않게 고는 것이 중요하다. 뚜껑을 조금 열고 하는 게 안전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열고 하는 게 좋다. 순식간에 끓어넘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의 세기나 엿물 양에 따라 다른데 보통 6~7시간은 달여야 조청이 완성된다. 처음에는 연한 식혜 색깔이지만 조릴수록 짙은 갈색으로 변해간다. 어느 정도의 되기로 졸이는가는 조청의 쓰임새에 따라 다르다. 흔히 조청 하면 떠오르는 모습인 떡을 찍어 먹는 용도는 흘러내리듯 묽게 해야 하고 강정을 만드는 용도는 이보다는 좀 되게 해야 한다. 오래 보관하면서 음식에 쓸 용도로 쓸 것은 아주 되게 졸여서 거의 꿀에 가깝게 해야 한다. 나는 거의 꿀에 가깝게 졸이는 정도로 마무리 한다.

 

 

 

▲ 완성된 무조청. 불 세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6~7시간 달이면 조청이 완성된다. 쓰임새에 따라 조청의 되기를 조절해야 한다. 이 정도 졸여졌을 때는 묽기의 농도가 한순간에 변할 수 있으므로 불은 지금까지 땐 밑불 만으로 조절하는 게 좋다.

 

조청을 직접 만들어 보면 왜 조청이 불과 이삼십 년 만에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 맛이 되었는지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이틀 동안 꼬박 매달려 만들어낸 결과물이 겨우 4.5Kg. 그것도 나 혼자가 아니라 중간중간 옆지기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만든 것이다. 그렇게 만든 조청의 단맛이라는 게 꿀이나, 설탕 같은 인공감미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하다. 그러니 양봉의 활성화로 생산된 온갖 꿀과 대량으로 정제된 설탕이 넘치는 시절에 어느 누가 조청을 만들고 앉았으랴.

 

이렇게 만든 여러 것들, 예컨대 된장이나 고추장, 청국장, 김치 등을 인터넷이나 SNS에 올려 놓으면 가끔씩 쪽지나 메모, 댓글로 사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다. 더러는 자신이 이걸 먹어야 하는 절절한 이유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난 아직 한 번도 누구에게 팔아 본 적이 없다. 지인들에게 그냥 나눠 준 적은 있어도. 판다면 도대체 얼마에 팔아야 할까?

 

재미 삼아 이번에 만든 조청의 원가를 한 번 따져 보자. 계산은 아주 단순하다. 거의 대부분 인건비다. 조청을 만들기까지 걸린 시간은 전부 18시간 가까이 된다. 물론 중간에 기다린 시간이 서너 시간이다. 엿기름 삭히는 시간 등. 하지만 그냥 기다린 게 아니라 온도를 50~60℃로 유지하느라 몇 번 불을 때 가며 기다려야 했고, 기다리는 동안 밥을 하고 식혀야 했다. 중간에 옆지기의 도움도 받았다. 따라서 어디까지 노동 시간으로 잡아야 할지 애매한데, 한두 시간만 이리저리 상쇄시킨 셈 치고 16시간을 노동 시간으로 잡아 계산해 보자.

 

인건비 : 16*6,030(시간당 최저임금) = 96,480원

재료비 : 엿기름 2kg = 17,000원,
          쌀 3.6kg = 9,000원
          무 15kg = ?

기타 비용 : 나무, 전기료(밥) 등등

Total : 122,480원 + α

 

무와 기타 비용은 하나도 넣지 않고 계산해도 킬로그램 당 27,217원(122,480원/4.5kg)이라는 계산이 나온다(무 가격을 kg 당 천 원으로만 계산해도 원가는 30,551원으로 상승한다). 조청 1kg의 원가가 27,217원? 이걸 판다면 도대체 얼마에 팔아야 할까?(더군다나 나는 이걸 만드는 나의 노동이 최저임금밖에 못 받아야 할 정도의 단순노동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 이렇게 계산한 원가를 따져 판다고 하면 누가 살까? 차라리 고추장이 싸게 치인다. 얼핏 계산해 보면 고추장의 원가는 킬로그램 당 18,000~20,000원 가까이 나온다. 물론 규모의 경제를 도입하면 원가는 이보다 훨씬 낮아질 수 있을 것이다(반대로 고추장은 규모의 경제를 도입해도 원가가 별로 낮아지지 않는다. 원재료의 비용이 인건비보다 훨씬 높다). 언제쯤 최소한의 규모의 경제를 도입할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어떤 경우에도 판매할 생각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의 손맛을 이야기하고 고향의 맛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맛을 표현하는 데 있어 식상할 정도로 남발되는 게 어머니의 손맛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어머니의 손맛이란 건 아마도 하나의 실체로서의 맛이라기보다는 그리움이나 추억의 다른 이름 것이다. 오늘 같이 추운 날이면 절실히 생각나는, 고구마와 함께 먹는 살얼음 떠다니는 동치미 국물은 그 시대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에게서나 공유할 수 있는 맛이다. 가래떡에 조청만 있어도 행복하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막을 내렸다. 치킨과 피자 맛에 길들여진 세대에게 어머니의 손맛은 어쩌면 'BBQ'나 '피자헛'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조청이 잊혀져 가는 추억이 되고 있는 것처럼 장맛과 김치맛도 그런 날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맛의 공유에서도 세대간의 차이는 점점 더 심화된다. 그렇다고 있는 차이를 없는 것처럼 꾸며낼 이유는 없다. 맛은 원래 쉽게 변하는 것이다. 혀는 말로서든 맛에서든 본디 믿을 게 못 되는 법이니까.

 

무조청을 만드는 이틀 동안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내게 조청은 그다지 별스러울 것 없는 유년의 추억 한 조각일 뿐인데도 머릿속은 제 맘대로 몇십 년의 시공간을 넘나들고 있다. 혀 못지않은 불완전한 기억들 사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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