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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먹거리

멸치 어간장 만들기

by 내오랜꿈 2015.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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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음식 문화에서 젓갈의 역사는 아마도 된장, 간장보다 훨씬 오래되었다고 보는 게 상식적일 것이다. 문헌학적으로도 된장, 간장을 의미하는 장(醬)보다는 젓갈을 의미하는 지(鮨)가 먼저 쓰인 것으로 나와 있다. 콩을 삶고 메주를 만들고 장을 담그고 숙성시키는 과정 등 여러 공정이 필요한 장류와는 달리 젓갈은 제조공정이 지극히 단순하다. 어패류를 소금에 절여서 일정기간 저장하기만 하면 젓갈은 완성된다. 


젓갈은 숙성기간에 따라 젓과 젓국으로 나눌 수 있다. 1~3개월 정도 단기 숙성시켜 원재료의 형체가 남아 있을 때 먹는 것을 '젓'이라 하고, 6개월 이상 숙성시켜서 찌꺼기를 걸러낸 것을 '젓국'이라 한다. 여기에 더해 걸러낸 찌꺼기에 물과 소금을 추가해서 한 번 끓인 다음 맑은 액젓으로 걸러낸 것을 '어간장'이라 부른다. 곧 어간장이란 단순히 시간이라는 요소만 더해져 자연숙성시킨 젓갈이 아니라 끓이는 과정이 추가된, 가공 과정을 거친 것이다. 시중에서 흔히 투명한 액체 상태로 '무슨무슨액젓'이라 유통되는 젓갈 대부분은 이런 가공 과정을 거친 어간장이라고 보면 된다. 여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 멸치 액젓과 걸러 낸 찌꺼기를 넣고 한두 시간 정도 달인다. 달이면서 위로 뜨는 불순물은 제거해 준다.


젓이나 젓갈은 원재료와 소금(재료에 따라 10~35% 사이)만 들어가기에 억지로 양을 늘릴 수가 없다. 문제라면 단지 위생상의 유해 여부가 개입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간장'은 가공 과정을 거치기에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양을 대폭 늘릴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물과 소금을 대량 투입하면서 화학조미료를 쓰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니 투명한 액체 상태로 유통되는 '~액젓'이라는 이름의 젓갈은 사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우리네 젓갈이라기보다는 물과 소금을 혼합하여 양을 늘리는 가공 과정을 거친 '어간장'이 대부분이다. 이런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으면 맛 없는 '액젓'이 왜 그리 많이 유통되는지 이해가 쉬울 것이다.



▲ 달인 액젓을 채망에 걸러 낸 뒤 무명천을 깔고 다시 한 번 걸러준다. 색깔이 달라진다.


김치를 담그기 위해 1년 6개월 숙성시킨 멸치 젓갈을 걸러 액젓을 얻었다. 1.8L 페트병으로 5개. 몇 병 정도는 더 만들 수 있지만 나머지는 어간장을 만들기로 했다. 액젓 원액이 어느 정도는 들어 있어야 어간장의 풍미가 뛰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걸러낸 젓갈 찌꺼기를 솥에 넣고 남아 있는 액젓 원액 만큼의 물을 더 추가한 다음 두 시간 정도 은근하게 달인다. 이 과정에서 떠오르는 거품은 가능한 한 제거해 준다. 거의 대부분 액젓의 기름 성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식기를 기다려 채망으로 거른 뒤 무명천을 받쳐 한 번 더 걸러 낸다. 액젓을 거를 때보다는 훨씬 쉽게 걸러진다.



▲ 무명천을 받쳐 걸러 낸 다음 커피 여과지를 이용해 다시 한 번 걸러 낸다. 멸치 어간장 완성.


이 상태로도 액젓 원액보다는 아주 맑고 고운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어 그냥 사용해도 될 정도지만 투명한 어간장을 얻기 위해서는 한 번 더 걸러야 한다. 주로 무명천을 겹으로 깔거나 코팅 안 한 한지 등을 사용하는데 나는 커피여과지를 이용한다. 그리 많지 않은 양이기에 깔때기를 이용하여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좀 번거롭다. 오며 가며 한 국자씩 떠 넣는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어간장 6병 만드는데 사흘이나 걸렸다. 액젓 거르기 시작한 때부터 따지면 5일이 넘는다. 시간은 좀 오래 걸렸지만 색깔은 더없이 깨끗하고 붉은 빛이 도는 진홍빛 갈색이다. 일반 간장보다는 훨씬 덜 짜고 젓갈 특유의 풍미가 있기에 된장을 쓰지 않는 무침이나 나물 요리에 쓴다면 한결 깊은 맛을 낼 수 있다.


젓갈은 기본적으로 원재료인 어육의 단백질이 가수분해되어 액체로 된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젓갈의 숙성이니 어쩌니 하는 게 사실은 어육이 연화, 분해되어 그 형체를 잃고 액체 상태가 되어 구수한 맛을 내는 과정을 일컫는 것이다. 이 과정도 두 단계로 나뉘는데 생선에 포함된 소화효소가 자가소화를 일으키는 과정과 외부에서 유입된 미생물이 단백질 가수분해효소를 생성하여 어육을 분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실제로 소화효소가 많이 포함된 생선의 내장기관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젓갈을 담그면 숙성이 늦어지고 생선 고유의 냄새와 맛이 없어진다고 한다. 곧 젓갈이 숙성되는 초기에는 생선 내장에 많이 포함된 소화효소에 의한 자가소화를 통해 미생물이 활동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고 그 다음에는 미생물이 만들어내는 단백질 가수분해효소에 의하여 숙성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우리가 젓갈을 담글 때 생선의 내장을 손질하지 않고 통째로 담그는 건 이렇듯 과학적인 이유가 있는 셈이다.



▲ 어간장을 만들고 난 찌꺼기는 바닷물과 빗물을 반반 섞은 뒤 EM 발효액을 넣어 액비를 만든다.


그렇다면 젓갈을 담글 때 소금의 역할은 무엇일까? 보통 젓갈은 생선의 종류에 따라, 담그는 시기의 온도에 따라 소금 농도를 원재료 무게의 10~25% 정도로 조절한다. 멸치 젓갈의 소금 농도는 대개 20% 전후다. 젓갈 숙성 과정에서 소금의 역할은 한 마디로 말하면 부패 방지다. 적정량보다 덜 넣으면 발효가 아니라 부패할 위험이 있고 많이 넣으면 숙성이 더디다.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젓갈을 개봉했을 때 부패가 진행되었다면 소금이 모자랐을 확률이 제일 크고(부패는 소금 농도 뿐만이 아니라 공기의 유입 등 다른 원인도 있을 수 있다) 생선살이 삭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면 소금 농도가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젓갈에 들어가는 소금은 어떤 소금이냐보다는 적정 농도가 제일 중요하다. 다음으로는 가능한 한 불순물이 덜 포함되어 있는 소금이 좋다. 특히나 간수가 덜 빠진 소금은 젓갈 맛을 떨어뜨리는 주범이다. 간수의 주성분은 염화마그네슘이나 황산마그네슘인데 마그네슘(Mg)은 음식 맛을 쓰게 만든다. 시중에 파는 멸치 액젓에서 쓴 맛이 난다면 그건 필시 간수 덜 빠진 소금을 사용했기 때문이라 보면 된다. 간수가 충분히 빠지지 않은 천일염 쓸 바에야 젓갈에는 정제염을 쓰는 게 훨씬 좋다. 요즘 같은 영양 과잉 시대에 몇 가지 미네랄 성분 더 먹자고 불순물 덩어리 천일염 고집할 이유는 전혀 없다. 젓갈은 원재료 특유의 영양 성분과 풍미를 맛보기 위한 것이지 소금에 포함된 극소량의 미네랄 성분 먹자고 만드는 음식이 아니다. 천일염이 정제염보다 무조건 좋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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