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고 보고 듣는 것들/Book

스피노자, 저주 속에서 피어난 긍정의 철학

by 내오랜꿈 2015. 11. 2.
728x90
반응형

 

우리는 바뤼흐 드 스피노자를 파문하고, 추방하고, 비난하고 저주하노라. 여호수아가 여리고 사람들을 저주했던 그 저주로, 엘리사가 소년들을 저주했던 그 저주로, 율법서에 쓰여 있는 모든 징계로 그를 저주하노라. 그에게 낮에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에게 밤에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가 누워 있을 때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가 일어나 일을 때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가 나갈 때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가 들어올 때 저주가 있을지어다. 주께서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주의 진노와 질투가 그를 향해 뿜어져 나올지니라.

 

누구도 그와 교제해서는 안 되며, 글로 교류하는 것조차 안 된다. 그에게 어떤 친절도 베풀어서는 안 되며, 한 지붕 아래 머물 수 없으며, 그와 4큐빗(1큐빗은 대략 45cm-인용자) 이내의 가까운 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가 작성하거나 쓴 논문들을 읽어서도 안 된다. (스티븐 내들러, <에티카를 읽는다>, pp 27~28)

 

이 글은 1656년, 네델란드의 유대교 지도자들이 스피노자를 자신들의 공동체로부터 파문하면서 공표한 문서의 일부다. 아마도 기록으로 존재하는 그 어떤 '저주의 글'도 이보다 잔혹하진 않을 것이다. 자비를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종교 집단의 언사가 어찌 이리 잔인할 수 있을까? '낮에도, 밤에도, 누울 때도, 일어날 때도, 저주받아야 한다'니. 도대체 스피노자는 무얼 그리 엄청난 죄를 지었길래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최상급의 '우아한' 저주를 들어야 했을까?

 

 

 

 

그러나 이토록 요란했던 파문의 직접적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건 없다. 다만 스티븐 내들러가 쓴 스피노자 전기(<스피노자:철학을 도발한 철학자>)에 따르면 모세의 율법을 부정하고 나아가 신의 존재를 부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스로를 '신의 백성'이라 믿는 유대 공동체 입장에서 보자면 스피노자가 전지전능한 유대교적 유일신을 부정했다는 것만으로도 파문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헤렘(herem)'으로 인해 이전의 그 어떤 철학자보다 자유로운 공동체적 선과 공동체적 삶의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한 철학자는 자신의 공동체로부터 파문 당하고 평생을 유리 세공을 하는 안경기술자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럼에도 스피노자는 개인의 자유로운 삶, 모두가 자유인의 삶을 사는 공동체적 삶의 꿈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후세의 철학자들은 그의 정치철학에 대해 '우정의 정치학'이라는 헌사를 바치기도 한다.

 

자신들과 정치사상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 개인을 이토록 증오하고 그의 삶을 고립시키는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있는 집단은 누구일까? 바로 종교 집단이다. 겉으로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종교인들이 사람들을 증오하고 적대하고 서로의 삶을 파괴하는 이율배반. 이는 모두 자신의 신이 아니고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세계 3대 유일신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이들은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온 정치적 '사생아들'이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문제시되는 거의 모든 전쟁과 학살과 약탈은 이들 3대 유일신교들간의 다툼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 아니고는 안 된다는 오만함이나 나 말고는 아무 것도 믿지 말라는 오만한 신이나 그게 그거다. 그 오만한 '믿음=신'은 과연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난 차라리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

 

 

 

 

무한한 긍정으로 충만한 신, 그 어떤 유한함이나 제한도 없는 신, 아무런 배척과 차별과 저주를 품지 않은 신. 내 속에도 있고, 우리 집 삼순이에게도 있고, 울타리에 핀 국화에도 있는 신. 스피노자에게 신은 피조물 바깥에 존재하는 절대자로서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속성이다. 신과 나와 우리 집 강아지는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따지고 들자면 신과 나와 강아지의 속성상의 '공통성'이라는 철학적 용어로 설명되어져야 할 문제긴 하지만. 아마도 저 3대 유일신교 입장에서 보자면 엄청난 '신성모독'일 것이다. 숭고하고 전지전능한 신이 타락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과 동격이라니... 모두(冒頭)에서 인용한 저 증오에 찬 저주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스피노자 사이의 이런 정치사상적 차이를 그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를 읽는다는 것, 그 중에서도 <에티카>를 읽는다는 건 사유하는 것이다.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개념을 새로이 사유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2. 기쁨은 인간의 더 작은 완전성에서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에티카>, 서광사, p189)

"6. 사랑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에티카>, p191)

 

<에티카> 제3부 "정서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에서 48가지 인간 정서를 정의하는 부분에서 발췌한 것이다. 기하학적 증명처럼 앞의 정의와 정리가 뒤로 갈수록 실타래처럼 얽혀 있기에 하나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의', '공리', '정리', '증명'들로 넘쳐나는 긴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그 과정이 만만찮아 많이들 중도에서 포기하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아마도 <에티카>를 읽기 시작한 건 20년도 더 되었을 것이다. 소득 없는 책장 넘기기.

 

 

 

 

그래서 선택한 게 스피노자를 우회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아니라 들뢰즈, 네그리, 내들러 같은 뛰어난 스피노자 연구자들을 통해 스피노자 사유하기. 다른 철학자는 몰라도 스피노자에 관한 한 이 방법은 생각보다는 아주 효율적이다. 어쩌면 "에티카"라는 블랙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보다는 이 편이 정신건강에도 훨씬 이로울지 모른다. 특히 들뢰즈와 내들러의 그물망에 걸린 스피노자는 그 촘촘함으로 인해 빠져나갈 구멍이 빈약하다. 이런 방법을 통해 각각의 철학자들이 스피노자를 '착취'하는 방법을 비교해 보는 건 덤으로 따라오는 즐거움이다.

 

증오로 가득찬 저주의 파문 속에서 파문 없는 사회, 모두가 자유인의 삶을 사는 공동체에 대한 꿈을 꾸었던 철학자 스피노자. 그 꿈을 따라가는 길은 때론 험난하지만 쉽게 포기하기 힘들 만큼 매력적인 길이다.

 

 

 

 

 

B. 스피노자/강영계 옮김, <에티카>, 서광사(1990)

 

질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민음사(2001)

 

질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인간사랑(2003)

 

안토니오 네그리, <전복적 스피노자>, 그린비(2005)

 

스티븐 내들러, <에티카를 읽는다>, 그린비(2013)

 

스티븐 내들러,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 글항아리(2014)

 

이수영,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오월의 봄(2013)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