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葛藤)이란 한자어가 있다. 여기서 '갈(葛)'은 칡을 뜻하고 '등(藤)'은 등나무를 뜻한다.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①일이나 사정이 서로 복잡하게 뒤얽혀 화합하지 못함의 비유 ②서로 상치되는 견해ㆍ처지ㆍ이해 따위의 차이로 생기는 충돌 ③정신 내부에서 각기 틀린 방향의 힘과 힘이 충돌하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정의되어 있다. 자신의 진행 방향에 장애물이 나타나면 무엇이든 감고 올라가는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혀 있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니 한자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사전을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그 의미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 칡과 등나무. 서로 감는 방향이 반대다.
여기서 식물의 생태에 조금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칡과 등나무는 다른 대상을 감고 올라가는 건 같지만 칡은 왼쪽으로 감고(twined leftward) 올라가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twined rightward) 감고 올라간다. 같은 대상을 두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감고 올라가는 것처럼 서로의 이해관계가 뒤엉켜버리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힘들게 되는 상태, 그야말로 갈등의 상황을 맞게 된다. 한자어가 가진 묘미를 느낄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식물사회학은 여기서 우리의 사고를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등나무의 식생을 따라가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
등나무는 난온대 지역에서 자생하는 덩굴성 목본식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따뜻한 남부지방, 일본의 경우는 혼슈 이남 지역에 자생하는 나무라고 한다. 물론 지금은 우리나라 전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 퍼져 있지만 자생종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식재한 것이다. 중국 역시 따뜻한 동남부 지역에 몇 종이 있지만 중국 고유종이라기보다는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라 한다. 한자 '등(藤)'을 추적하면 당나라때부터 사용된 글자라고 하는데 이것은 등나무가 중국 고유종이 아니라 당나라 때 외부에서 이식된 종이라는 걸 의미한다. 한자는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만들어지는 뜻글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갈등'이란 단어는 당나라 시대 이후 중국에서 사용된 말이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일 것이다. 그러나 식물사회학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중국에는 4종의 등나무가 있는데 중국을 대표하는 등나무는 '자등(紫藤)'이라고 한다. 보라색 꽃이 피는 등나무라는 뜻인데 이 중국의 자등은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종류라고 한다. 오른쪽으로 감는 보통의 등나무와 다른 것이다. 이 자등과 칡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감는 식물이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는다. 때문에 갈등이란 단어는 중국에서 만들어졌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 식생 분포를 따지면 오른쪽으로 감는 등나무와 왼쪽으로 감는 칡이 함께 자라는 지역은 극히 제한적이다. 칡은 냉온대 식생지역에 분포하고 등나무는 난온대 식생지역에 분포한다. 등나무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이 두 종을 함께 볼 수 있는 지역은 냉온대와 난온대가 교차하는 일부 지역, 곧 우리나라의 남부 일부 지역, 일본의 혼슈 이남 지역, 중국의 동남부 일부지역에 국한된다. 그런데 중국의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는 자등이다. 따라서 갈등이란 단어는 일본산 한자 합성어라는 게 식물사회학이 유추해 내는 결론이다. 갈등이 만연하던 시대에 자연을 예리하게 관찰한 일본의 어느 현자가 만들어낸 합성어라는 것. 이상이 식물생태학자 김종원 교수의 결론이다("한국식물생태보감", pp686~689)
▲ "한국식물생태보감" 목차
이 결론이 100% 사실이든 아니든 식물사회학(plant sociology)은 단순히 식물의 식생이나 생태만 따지는 학문이 아니다. 식물군락 또는 식생을 연구하는 식물생태학(plant ecology)의 한 분과인데 식물을 사회적 또는 집단적 유기체로 간주하여 식물군락과 환경의 상호관계 등을 파악해 내는 상당히 매력적인 분야다. '꿩의다리'란 식물이 왜 그렇게 불렸는지, 백합과 식물을 지칭하는 순 우리말인 '나리'와 '참나리'에서 유추해 내는 '개나리'란 이름의 황당함,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손길이 더해져 더럽혀진 땅에서만 자라는 돼지풀의 슬픈 역사, 같은 식물을 두고 동양인, 서양인, 양반, 민초들이 어떻게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지를 보여주는 할미꽃. 이 책에서 다루는 식물 하나하나가 모두 인간의 생활이고 역사다.
▲ 칡꽃
할미꽃을 다루는 말미에 인용되는 간디의 말은 이 책의 지향점을 드러내 준다.
"저항력이 없는 생물일수록 인간의 잔인함으로부터 인간에 의해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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