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년 넘게 산 책들이 서가에 넘친다. 주간지나 월간지, 빛바랜 책 등은 창고 구석에 처박아 두었는데도 몇 권이라도 새로 책을 구입하면 놓아 둘 자리가 없어 책상 위에 자꾸 책이 쌓인다. 이사를 가던가 하면 한 번 정리할 텐데 그냥저냥 지내고 있다.
가끔씩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면 내 지난 삶의 흔적들이 나에게 말을 건다. 어쩌다 들추게 되는 30년도 더 지난 철학 책을 보면 20살의 열정이 묻어나고, "도꾸가와 이에야스" 같은 전집류를 보면 삶의 무게가 버거워 즐겨 읽던 사회과학 류의 '무거운' 책을 멀리하고 가벼운 문학 관련 책만 찾게 되던 40대의 내가 생각난다. 그러다 6년 전, 시골로 들어오고부터는 원예학이나 식물(생태)학, 농사 관련 서적 그리고 '노자'나 '장자', 벤야민의 책을 주로 읽고 있다.
이런 류의 책을 주로 읽는다고는 하지만 무슨 뚜렷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니기에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 드는 편이다. 옛날하고 바뀐 게 있다면 무조건 책을 사서 읽는 게 아니라 "군립도서관"이나 "평생교육원"에서 빌려 보는 경우가 많다. 내가 원하는 책이 없을 경우 구입 신청을 하면 거의 대부분 구입해 준다. 2년 동안 평생교육원에 이백여 권이 넘는 책을 신청했는데 절판되거나 기존에 있는 걸 모르고 신청한 경우를 빼고는 전부 다 구입해 주었던 것 같다. 한적한 시골 평생교육원에서나 누릴 수 있는 호사다.
만약 평생교육원이 없었다면 "한국식물생태보감"이나 "식품과학기술 대사전", "식물병해충 도감" 같은 고가의 책은 내 돈 주고 구입해서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책들은 아무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는 책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찾아보게 되는 책들이기에 선뜻 사기가 망설여진다. 물론 식물이나 생태, 환경 관련 공부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책이긴 하지만 권당 십만 원이 넘는 가격은 늘 필요함을 이겨내기 마련이다.
처음 귀촌해서는 평생교육원과 군립도서관을 번갈아가며 이용했는데 지금은 거의 평생교육원만 이용한다. 교육청 소속인 평생교육원과 군청 산하의 도서관은 장서 양이나 직원들의 전문성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다른 곳은 몰라도 내가 있는 지역의 경우는 하늘과 땅 차이다.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군립도서관은 공무원들이고 평생교육원은 서비스업 종사자다. 이용자들을 대하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함량도 미달인데 '꼴값'하는 공무원 상대하고 싶지 않은 건 당연지사. 오해 마시라. 지금 공무원 욕 하는 거 아니다. 평생교육원 직원도 공무원이다. 서비스나 전문성을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이삼 년 동안 거의 매주 들러 책을 빌렸더니만 올해 들어와 평생교육원에서 '깜짝 이벤트' 두 개를 선물한다. 초등학교 졸업하고는 한 번도 받아 본 일이 없는 상장이란 걸 준다. 상 이름도 참 직설적이다. '다독상', '책 읽는 가족'상. 상반기에는 '다독상'을 주면서 도서상품권 두 매를 선물로 주기에 쑥스러워 하면서도 고맙게 잘 썼는데 이번에는 '책 읽는 가족'으로 선정되었다면서 상품권 대신 아크릴 명패를 만들어 준다. 참 나, 이걸 집에 붙이란 말인가? 상장 케이스도 너무 고급스럽다. 솔직히 낭비란 생각이 절로 들지만 그건 뭐 나름의 형식이니까 그렇다 쳐도 아크릴 상패는 좀 심하다는 느낌이다. 차라리 그 돈으로 도서상품권이나 사 주었으면 훨씬 더 고마워했을 거 같은데 말이다.
어쨌거나 평생교육원은 나에게 아주 고마운 곳이다. 내가 원하는 책을 구입해 줄 뿐더러 한적한 시골인지라 붐비지도 않으니 수많은 책이나 자료들을 거의 내 것처럼 활용할 수 있으니까. 도서관 운영 뿐만 아니라 주민들을 상대로 한 다양한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이걸 이용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부디 이런 보편적 복지 관련 예산은 제발 삭감하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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