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같은 금요일 오후다. 서서히 귀성 행렬로 고속도로가 막힌다는 뉴스를 들으며 모처럼 순천으로 나가 명절장을 본다. 내가 사는 곳에선 순천이 서울 같은 곳이다. 번잡하고 정신없는 곳. 몇 년 만에 들른 대형 할인매장이 한없이 크게 느껴진다. 물건 하나 사려니 매대 사이가 왜 그리 넓어 보이는지. 아무래도 내겐 '이마트'보다는 '이마트 에브리데이' 수준이 딱 맞는가 보다.
장을 보고 들어와 텃밭화분에 바질 등 월동용 허브 모종을 옮겨 심고 있는데 옆지기가 호들갑을 떨며 겉절이 김치를 먹어 보라며 건네 준다. '너무너무 맛있다'를 연발하면서. 어제 솎은 무로 김치를 담은 모양이다. 뭐, 솔직히 맛은 아주 좋다. 대답을 강요하는 듯한 옆지기의 눈빛에,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어, 맛있네'라는 무미건조한 멘트를 날린다. 그러고는 속으로 '맛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 아냐?'라는 저항의 멘트를 한 번 더 날린다. 어디까지나 마음 속으로만.
▲ 무 겉절이 김치. 멸치 젓갈에 밥을 갈아 넣고 고춧가루, 붉은 생고추, 마늘, 양파, 깨, 매실효소액 등을 넣고 버무린다.
무 뿐만 아니라 고춧가루, 마늘, 양파, 생고추, 깨 등 밑재료 모두가 직접 기른 것이다. 게다가 겉절이 김치 맛의 절반을 차지하는 멸치 액젓까지 직접 담근 것인데 맛이 없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니냐는 나의 항변인 셈이다. 어디까지나 마음 속으로만 하는 항변이지만.
▲ 무 겉절이 물김치. 보통의 물김치와는 달리 물을 전혀 넣지 않고 찹쌀풀을 쑤어 양파, 마늘, 풋고추 등을 갈아 넣고 담근다. 국물이 거의 없는 여수식 갓물김치 담그는 방식이다.
이것저것 정리하고 마주한 저녁상. 또다시 옆지기가 겉절이 김치 맛의 뛰어남을 강조한다. '내가 만들었지만 진짜 너무 맛있다'는 노골적인 멘트까지 날려 가며 다시 한 번 더 나의 동조를 강요한다. 결국 내 마음 속에서만 존재하던 항변이 발화되어 입 밖으로 나온다.
"이 재료로 맛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옆지기의 인상이 확 변한다. '누구나 다 이렇게 담을 수 있는 줄 아나?',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만 결국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다음부터는 직접 담아 무라!"
"....."
모두 즐겁고 풍성한 한가위 맞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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