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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일상

시골에서 뮤지컬 보러 가기란...

by 내오랜꿈 2015.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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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에 살 때는 수시로 영화관을 드나들었다. 여수에 적을 두고 있을 때도 주말에 집에 올라 가면 시네마정동이나 피카디리 같은 곳에서 토요일마다 세 편 연속 상영하는 심야영화를 충혈된 눈으로 새벽까지 즐겨 보곤 했다. 영화 마니아 수준은 아니지만 꽤 좋아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시골로 들어온 뒤로는 나의 이런 영화 보기가 자연스럽게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 한 편 보러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세 번 갈아타거나 한 시간 넘게 차를 운전하고 가야 한다. 그 한 시간이 서울 도심길 한 시간 거리가 아니라 70Km가 넘는 거리를 가야 하는 한 시간이다. 그러니 아무리 영화를 좋아한다 해도 그만둘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시골생활이라는 게 현관문만 나서면 일거리다. 하다 못해 잔디밭에 풀이라도 뽑아야 하고 주인만 쳐다보는 개들과도 놀아 주어야 하니 따로 영화를 보러 갈 틈을 내는 것도 만만찮다. 물론 그 즈음부터 갓 개봉한 영화만 아니라면 언제든 다운로드 받아서 볼 수 있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도 한 몫 했을 거다.


그래서 영화 관람 같은 문화생활은 거의 연례 행사 수준이다. 가끔은 친구들이 보여 주는 문화 관련 공연 티켓이 있을 경우 오랜만에 도시로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때가 맞아야 한다. 다른 일들이 겹치거나 해야 나가지 공연 하나 보러 두세 시간 거리를 무작정 가기는 뭣하니까.




지난 주 친구가 오랫만에 전화를 했다.


친구:일요일 저녁에 시간 있냐?

나  :어. 뭐 별일 없는데?

친구:너 와이프는?

나  : 와이프도 뭐 별일 없을 건데... 왜?

친구:일요일 저녁에 창원으로 넘어 와라.

나  :창원? 무슨 일로?

친구:"명성황후" 보러 와라. 티켓이 있거든.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나  :?!?!

.....

나  :야, 여기서 창원까지 뮤지컬 보러 가라고?

친구:나도 부산에서 넘어가야 돼. 한 시간 걸려. 니도 그 정도면 올 수 있지 않나?

나  :?!?!?!


이럴 때 뭐라고 해야 하나? 완전 '헐~'이다. 고흥에서 창원까지 무슨 수로 한 시간 만에 갈 수 있으랴. 우리 집에서 가면 창원까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두 시간 반 거리다. 휴게소 한 번 들르면 세 시간이고. 보고 난 뒤 다시 세 시간을 달려와야 한다. 시골에 처박혀 있는 친구한테 뮤지컬을 보여 주겠다는 성의는 눈물나게 고맙지만 이건 그 친구의 '몰지각한' 공간감각이 빚어낸 에피소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흥하고 창원을 한 시간 거리로 보는 건 좀 심하지 않나? 더군다나 이 친구는 부산 모 방송사의 현직 보도국장이다. 보도국장이라는 자리가 온갖 뉴스의 편집권을 쥐고 있는 자리인데 거리감각이 이렇게나 없어서야 급박한 순간에 올바른 판단을 하는데 지장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예컨대 보도국장을 하늘같이 바라볼 햇병아리 기자한테 어느 날 갑자기 방송 시간 몇 시간 앞 두고 "너 고흥 가서 '무엇' 취재해 와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그 기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이, 국장님. 부디 이런 명령은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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