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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먹거리

밤 껍질을 까면서...

by 내오랜꿈 2015.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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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 적에는 밤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 고향 동네에서는 그랬다. 우리 집만 하더라도 배, 복숭아 과수원이 야산에 접해 있었음에도 밤나무 한 그루 심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주인 있는 동네 야산에서 자라는 밤나무를 둘러싸고 가을이 되면 내 또래의 아이들과 주인의 숨바꼭질이 반복되곤 했다. 주인 몰래 주워 먹는 밤은 또 왜 그리 맛있는지. 삶아 먹을 것도 없이 생으로 우적우적 씹어 먹던 그 토종 날밤의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다 좀 많이 주운 날은 쇠죽 끓인 아궁이 숯불에 구워 먹는 행운을 맛보기도 하던, 지워지지 않는 내 유년의 추억들.



▲ 껍질 벗긴 밤 말리기


공부하느라 도회지 학교로 떠나 있던 십여 년 동안 우리 집 과수원 한편에도 밤나무가 심어져 더 이상 남의 집 야산 밤나무를 탐내야 할 이유는 사라졌다. 70년대, 아마도 마을 인근의 야산은 죄다 민둥산이던 시절, 유실수 심기 운동의 일환으로 엄청나게 공급된 밤나무 묘목이 우리 집 과수원에까지 흘러들어 왔던 모양이다. 이때 전국적으로 심어진 밤나무들이 자라 지금은 웬만한 시골 동네마다 넘치는 게 밤나무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요즘은 주울 사람이 없어 야산에 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동네 어르신들이 산속으로 밤을 주우러 가지 않으니 도심의 등산객이나 주말에 부모님 뵈러 들리는 자식들이 조금씩 주워 갈 뿐이다.



▲ 온통 밤나무 천지인 숲에서 한 시간도 안 되어 주운 밤이 컨테이너 박스 하나 가득이다.


아내의 친정집 동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동네 뒷산이 온통 밤나무 숲인데 동네 어르신들이 아무도 주우러 가지 않는단다. 그래서 주말에 들린 김에 밤줍기에 나섰다. 처제까지 동행, 세 명이서 플라스틱 컨네이너 박스 하나와 비닐 봉투를 들고 나섰는데 채 한 시간도 안 되어 박스 하나가 가득 찬다. 산 전체가 온통 나무에서 떨어진 밤송이와 알밤이 널브러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욕심을 더 부린다면 들고 갈 걸 걱정해야 할 지경이다.



▲ 겉껍질을 벗기고 물에 담궈 불린 뒤 하나하나 속껍질을 벗긴다. 이게 보기와는 다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주워 온 밤. 이제는 보관하는 게 문제다. 일부는 삶아 먹기 위해 김치냉장고에 넣고 나머지는 껍질을 까 말리기로 했다. 밥에도 넣어 먹고 시루떡에도 넣어 먹을 요량으로. 그런데 밤 껍질 까는 게 만만찮다. 하나하나 겉껍질을 분리하고 속껍질까지 긁어내야 한다. 이게 뭐 몇십 개도 아니고 몇백 개인지도 헤아리기 힘드는 양이다 보니 완전 중노동에 가깝다. 처음에는 둘이서 하루나 이틀이면 다 까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세 시간 정도 까다 보니 손가락에 마비가 올 지경이다. 이 템포면 아마도 사나흘 저녁은 더 고생해야 할 거 같다. 어쩐지 몸에 좋은 거 먹자고 몸 고생시키는 거 같다.



▲ 밤 속껍질 벗긴 것 말리기. '율피'라 불리는, 훌륭한 맛사지팩 재료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나는 밤 껍질 까면서 먹을 거 만들 것만 생각하는데 여자들은 그것만이 목적은 아닌 모양이다. 밤 속껍질 벗긴 걸 버리지 말라는 옆지기. 왜 그러냐고 물으니 아주 훌륭한 맛사지팩 재료란다. 뭐 이왕 벗기는 거 모으기만 하면 되지만 생각하는 방향이 다르면 쓰임새도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다. 난 겨울에 실내에서 키우는 화분 위에 올릴 훌륭한 멀칭 재료로 생각했는데 맛사지팩 재료로 쓴다는 소리에 아무 말 없이 껍질만 벗긴다. 피부 미용에 쓰겠다는데 화분 멀칭 이야기 꺼내 봐야 본전도 못 찾을 게 뻔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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