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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농사

'인간관리기'가 되어...

by 내오랜꿈 2015.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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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거의 모든 게 기계의 손을 빌어 이루어진다. 농사도 마찬가지다. 벼농사는 파종부터 수확까지 전부 기계화가 이루어진 까닭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못자리에서 모를 쪄 못줄을 대 모내기 하던 풍습은 이제 점점 다큐멘터리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어 가고 있다. 밭농사 역시 예외일 수 없어 조금 규모가 크다 싶은 땅은 트랙터나 관리기를 이용해 이랑과 고랑을 만들어 파종밭을 만든다. 사람 손으로는 며칠 걸릴 일이 관리기로 하면 한두 시간이면 끝나니 어느 누가 기계의 힘을 빌지 않으랴.




그러나 관리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언제나 삽과 괭이로 파종밭을 만든다. 텃밭 수준의 넓이는 물론이고 천 평이 넘는 땅도 관리기 없이 일구어 본 경험도 있다. 물론 효율성을 생각한다면 '제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니 효율성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를 추구해야만 가능하다. 나에게 그 '무엇'은 살아있는 땅 만들기다. 이 밭 역시 5년 전에 관리기를 돌려 본 적이 있는데 밀가루처럼 부숴져 다져지는 땅을 보고서는 이건 아니다 싶어 그 뒤로는 관리기를 쓰지 않는다.


살아있는 땅이란 입단화가 형성되어 토양 속의 공극률이 높아져 공기나 유효수분 함량이 높은 땅이어야 한다. 화학비료나 과도한 유기질 퇴비를 투입하지 않는 농법에서 토양의 공극률은 작물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쉽게 말해서 토양 속에 품고 있는 공기와 수분이 비료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니 이 비율을 높이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여태껏 관리기를 멀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머리로는 가능해도 몸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오로지 삽과 괭이, 줄자만 이용해 파종밭 이랑 만들기를 하고 있다. 이랑 너비 120cm, 고랑 너비 45cm로 맞추어 오십 미터 길이 하나 다듬는데 한 시간 가량 걸린다. 나는 삽을 들고 옆지기는 괭이를 들고 오전에 세 개 오후에 세 개를 만들고 나니 하루가 후딱 지나가 버린다. 그나마 이 땅이 사양토에 가까운 양토인지라 손만으로도 삽이 깊이 들어가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백 평이 넘는 땅을 하루에 끝내리라던 계획은 틀어지고 한나절을 더 투입해야 할 상황이다. 그래도 '인간관리기'가 좋은 점은 이랑을 기계보다 반듯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앞으로 이 땅은 여름엔 메주콩 가을엔 마늘이나 양파 재배용으로 이어짓기 할 계획이다. 지력 소모를 줄일 수 있는 조합으로는 마늘 재배 뒤 스스로 질소질 비료를 만들어 쓸 수 있는 메주콩 이어짓기가 최상인 거 같다.




뙤약볕에서 하루 종일 삽질을 하다 보니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러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 되어서야 하던 일을 멈춘다. 주말 농사꾼의 비애다. 이 땅은 주말에만 손볼 수 있기에 조금씩 무리를 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여름엔 조심해야 할 거 같다. 서둘러 까맣게 익어가는 오디를 수확하고 하루를 마감한다. 오디는 작년에 이어 두 해째 수확인데 조금씩 오디 균핵병이 생기고 있다. 곰팡이균에 의해 옮기는 병이다. 올 가을엔 생석회로 토양 소독을 해 주어야 할 거 같다.


마지막으로 태어나 토양의 입단화를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하다가 나의 삽질에 잘려 나간 수많은 지렁이들에게 애도를 표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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