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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먹거리

장 가르기

by 내오랜꿈 2015.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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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울산이다. 장 담그기에서 울산이란 지방은 조금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장은 메주를 띄운 뒤 항아리에 메주와 소금물을 넣고 일정 시간이 경과한 뒤 메주는 된장으로 장물은 간장으로 가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울산이나 경주를 축으로 하는 경남 동부 일부 지역은 처음부터 된장과 간장을 따로 담근다. 곧 장 가르기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된장 항아리는 처음부터 메주를 가득 넣은 뒤('꾹꾹' 눌러 담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소금물을 채우고 간장 항아리는 메주를 절반 정도만 넣은 뒤 소금물을 가득 채운다. 이렇게 따로 담근 뒤 3개월 정도 지나고 나면 된장 항아리의 메주와 장물은 모두 된장을 담그는 데만 쓰인다. 메주의 전분과 콩단백질 성분이 우러난 장물을 그대로 된장에 넣어주는 셈이니 당연히 된장 맛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한편 간장은 된장 담글 때 같이 담그기도 하지만 보통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담근다. 6개월 이상을 장 항아리에서 묵히는 것이다. 메주의 전분(간장의 단맛을 결정한다)과 콩단백질(간장의 구수한 맛이 된다) 성분이 최대한 우러나도록 하는 것. 당연히 간장 맛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이때 간장을 담그고 남은 메주는 다시 된장을 담그는 게 아니라 소 먹이로 쓰인다. 소여물을 끊일 때 조금씩 넣어주는 것. 이런 된장, 간장을 먹고 자란 때문에 처음 간장 뺀 된장을 접했을 때 그 역한 냄새를 너무나 싫어했다. 부산에서 처음 접한 간장 뺀 된장의 향과 색깔은 내 고향에서 소여물로나 주던 메주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것. 그래서 도회지 생활을 할 때도 된장은 늘 고향집에서 담근 걸 가져다 먹었다. 더 이상 고향집 장을 가져다 먹을 수 없게 된 지금은 직접 담궈서 먹는데 담그는 방식은 어릴 때와 조금 다르다.




메주 띄워 장 담근 지 60일째. 장 가르기 할 때가 지났다. 장을 가른다는 건 장 항아리에서 메주와 장물을 분리하여 된장과 간장으로 나눈다는 말이다. 나의 경우는 보통 장을 담그고 50일 정도 지나면 메주와 장물을 분리했는데 올해는 10일 정도 더 묵힌 셈이다. 보통 장을 오래 묵히면 간장 맛은 좋아지지만 된장 맛은 떨어진다. 따라서 된장 맛을 좋게 하려면 가능한 한 빨리 장을 가르는 게 좋다. 장 가르기는 지역이나 담그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그 시기가 달라지는데 빠를 경우는 장 담근 지 한 달 만에 가르기도 하고 늦을 경우는 세 달 만에 가르기도 한다. 정답은 없다. 된장에 주안점을 두느냐 간장에 주안점을 두느냐에 따라 장을 담그는 사람이 선택할 문제다.




장 항아리에서 메주를 건져 내고 남은 장물을 면 보자기를 받쳐 깨끗하게 걸러내 따로 숙성시키는 게 전통적인 조선 간장이다. 이때 장물을 달이는 방법도 있고 그대로 두는 방법도 있다. 나의 경우는 달여서 담그기도 하고 달이지 않고 그대로 두어도 보았는데 맛은 특별한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다만 달이지 않고 그대로 둔 경우는 여름에 하얀 골마지가 생기기도 한다. 이곳 날씨가 바닷가 근처라 워낙 습한 까닭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첫해 여름이 지나고 나면 더 이상 골마지가 생기지는 않는다. 간장 윗 부분에 소금 결정이 생기면서 골마지가 끼이는 걸 막아주는 것 같다. 아무래도 장은 발효 식품인 까닭에 끓이거나 하는 게 좋을 리가 없다. 되도록이면 달이지 않고 그대로 숙성시키는 게 좋을 것이다. 특히나 중부 산간 내륙 지방 같이 건조한 지역은 아주 저염도로 담근 게 아니라면 굳이 달일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래도 굳이 달여야 한다면 팔팔 끓이거나 하지 말고 은근한 불에서 두세 시간 동안 오래도록 달이는 게 좋다.



▲ 담근 지 3년된 간장. 간장 윗부분에 소금결정이 생겨 있다.


▲ 새로 장 가르기 한 햇간장. 모든 걸 다 반사시키는 투명한 빛깔이다.


된장과 달리 간장은 이제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달리 더 추가하거나 인위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오롯이 시간과 햇볕이라는 자연에 맡겨 두면 된다. 그래도 볕 좋은 날 항아리 뚜껑을 열어 주거나 일주일에 한두 번 항아리를 닦아주는 일들까지 자연에 맡길 수는 없는 법이니 사람의 손길이 전혀 안 갈 수는 없다.


간장과 달리 된장은 여러 형태로 사람의 손길이 더해지고 다른 재료도 첨가되는 까닭에 담그는 사람에 따라 그 맛이 천차만별이다. 장 항아리에서 꺼낸 메주를 곱게 으깨어 장물을 추가하면서 약간 묽다 싶을 정도의 농도로 만든 뒤 항아리에 넣어 준다. 이때 담그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를 넣는데 나의 경우는 메줏가루와 보릿가루만 더 첨가한다. 간장을 뺀 메주이기에 메줏가루를 보충하여 된장 맛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함이다. 새로운 재료를 추가한 만큼 소금도 적당히 추가해야 한다. 아무래도 여름을 나야 하기 때문에 염도가 낮으면 장 표면에 골마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 장 항아리에서 꺼낸 메주


▲ 메주에 메줏가루와 보릿가루, 소금을 넣고 장물을 부어가며 으깨 준다.


된장은 담그고 나서 바로 먹는 게 아니라 최소한 6개월 이상 숙성시킨 다음 먹는 음식이다. 가능하다면 1년 정도 묵히는 게 좋다. 긴 시간 동안 발효시키다 보니 된장 맛을 좋게 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동원된다. 가을에 메주를 만들 때 메주콩 삶은 물을 된장 항아리에 넣고 다시 버무려 주기도 하고 이듬해 장 가르기를 할 때 장물 찌꺼기를 넣어 버무리기도 한다. 아예 새로 메주콩을 삶아 다시 섞어주기도 한다. 이렇게 1~2년 발효시키면 처음 만들었을 때의 쓴맛은 사라지고 입에 착 감기는 단맛을 품은 된장으로 발효된다. 


그러나 된장은 무턱대고 오래 묵힌다고 무조건 맛이 좋아지는 건 아니다. 장은 근본적으로 발효 식품이다. 발효란 어느 정도 진행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발효 음식의 대표격인 김치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김치는 발효 정도에 따라 신맛의 정도가 다르다. 어느 정도 신맛이 나는 김치가 맛이 좋은 김치인가는 먹는 사람의 입맛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장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발효된 장이 맛있는가 하는 건 먹는 사람의 취향이 개입되는 문제다. 물론 된장은 식물성 단백질을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김치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많이 변한다. 더 많이 변한다는 것, 곧 발효가 많이 된다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어느 정도 선에서 그 접점을 찾을 것인가는 결국 선택의 문제고 취향의 문제다. 정답은 없다.


요즘은 무슨 항암 된장이니 하며 여러 가지 특이 성분이 들어 있다는 재료를 추가하기도 하는데 된장의 항암력은 콩에 들어 있는 '이소플라본(isoflavone)'이라는 콩단백질 성분 때문이다. '이소플라본'이 된장의 발효 과정에서 '아글리콘형 비배당체 이소플라본'으로 분해되는데 이것이 항암 작용을 하고 여성의 골다공증도 예방한다고 알려져 있다('이소플라본'의 효능에 대해서는 "한국인에게 장은 무엇인가", pp56~59 참조). 곧 된장의 항암력은 된장의 발효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지 상황버섯 같은 항암 성분이 들어 있는 재료를 추가한다고 새로 생기는 게 아니다. 항암 성분이 뛰어난 재료는 그 자체로 그냥 드시기 바란다. 왜 항암 성분이 있는 재료를 굳이 짠 된장에 넣어서 나트륨과 같이 섭취해야 하는가?



▲ 갓 담은 햇된장


된장이 우리 몸에 좋기는 하지만 나트륨 과잉 섭취는 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능한 한 저염도 된장을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하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항암력이 높다고 알려져 있는 재료를 굳이 된장에 넣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된장 말고도 항암력이 높은 재료를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을 것이다. 당근은 베타카로틴 함량이 놓아 항산화 효과가 높은 식품이고 토마토도 라이코펜 함유량이 높아 항산화 효과가 높은 음식이다. 요즘 인기 높은 블루베리 같은 검은색 과일도 안토시아닌 성분이 많이 들어 있어 항암력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이런 식품을 된장에 넣어 먹을 이유가 있는가? 일부러 나트륨을 더 섭취해야 하는 희귀병 환자라면 모를까. 그럼에도 굳이 어떤 재료를 된장에 넣어 항암 된장 운운하는 건 내 입장에서 볼 때는 상술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자기 먹을 거 담그는 거라면 모르겠는데 판매를 목적으로 하면서 항암 된장 운운하는 것에 너무 혹하지 마시기 바란다.


항암 성분이 포함된 식품은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항암 효과는 달라질 수 있다. 앞서 예를 든 당근의 베타카로틴은 껍질 부위에 많이 함유되어 있으므로 껍질째 먹어야 섭취량이 많아진다. 또 베타카로틴은 지용성이므로 생으로 먹는 것보다는 올리브유 같은 기름에 볶아서 먹어야 흡수율을 높일 수 있다. 실험에 따르면 당근을 생으로 먹을 경우 베타카로틴 흡수율은 8%에 불과하지만 기름에 조리해서 먹을 경우 흡수율은 60~70%까지 높아진다고 한다. 토마토의 라이코펜 역시 생으로 먹는 것보다 식용유로 조리해서 먹을 경우 흡수율이 5배나 높아진다고 한다. 이렇듯 항암 성분이 들어 있는 음식이라고 해도 그 성분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먹는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 무턱대고 생각없이 먹다간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좀 생각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여러 식품에 포함된 이런저런 항암 성분은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효과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항암력이 좋은 식품이라면 나는 무턱대고 된장에 넣어 먹기보다는 어떻게 먹는 것이 효과적인지 찾아보고 그것에 맞는 방법으로 조리해서 먹겠다.


된장은 담그고 나서 오랫동안 두고 먹는 음식이니 늘 가까이서 돌아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장 담그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담그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담근 뒤에 손 보는 게 어려운 것 같다. 사실 장 담그는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다. 메주에 염도를 맞춘 소금물 부어 놓았다가 적당한 때를 잡아 된장과 간장으로 분리한 다음 항아리에 넣어 두면 끝이다. 그 다음은 자연에 맡겨 두면 된다. 하지만 늘 장 항아리를 들여다보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필요하면 뚜껑도 여닫아 주어야 하고 항아리도 닦아주어야 한다. 장 표면에 골마지나 불순물이 생기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작물만 주인의 발자욱 소리를 듣고 자라는 게 아니라 장도 주인의 발자욱 소리를 듣고 익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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