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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11. <페미니즘> - 성의 해체로 차별을 넘어…

by 내오랜꿈 2009.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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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페미니즘> - 성의 해체로 차별을 넘어…


사적인 영역의 대상화된 존재를 전면에 내세워… ‘유사 남근주의’ 흔적을 지울 길 없나



(사진/공적·사적 영역에서의 여성 차별을 반대하는 여성들의 시위모습)


여러 가지 이름이 붙을 수 있겠지만, 20세기는 확실히 ‘페미니즘의 시대’였다. 프랑스 혁명을 모르지 않았던 ‘계몽주의의 완성자’ 칸트는, 노예나 이교도와 더불어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주어선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였을까? 여성들이 참정권을, 그것도 지난한 투쟁 끝에 획득한 것은 20세기를 한참 지나서였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아직도 평등하게 나누어 받아야 할 권리는 매우 많다. 갈 길이 먼 것이다. 남성들과 동등해야 할 여성들의 권리. 그래서 19세기 후반에 서서히 시작된 이래 페미니즘은 오랫동안 ‘여권운동’이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페미니즘의 첫 번째 시기를 명명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법적인 것이 억압의 중요한 지표고, 제도화된 형태임엔 분명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여권운동으로 시작한 페미니즘의 역사는 20세기 중반을 통과하면서 근본을 향한, 그 근본적인 억압을 찾아내려는 본격적인 탐색을 시작한다. 억압의 법적인 지표를 찾아내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의 원인, 억압의 방식, 억압의 다양한 효과들에 대한 끈질긴 추적이 시작된다.


여권운동은 근본적인 억압에 대한 탐색


(사진/여성들은 오랫동안 스스로의 관심과 욕망 등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여성을 상품화하는 미인대회에 반대하며 연 '안티 미스코리아')


이들이 주목하고 지적하는 것은 먼저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권리뿐만 아니라, 직장에서 고용이나 임금 등의 차별, 사회적 활동을 위한 기회의 차별, 가족 안에서 분배되는 권력의 차별 등등. 가령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이 가장 주목하는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들은 여성 노동에 대한 성적 차별을 통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공모가 지속된다고 주장한다.


사실 부르주아지는 19세기 이래 가족을 사회로부터 분리하여 내밀성의 영역, 사적인 영역으로 만들었으며, 그 사적인 영역에서 가정을 관리하고 가사를 수행하는 것으로 여성의 활동을 할당했다.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에 의해 구매되고, 자본의 잉여가치를 증식시키는 활동만이 생산적 노동으로, 아니 노동으로 정의된다. 노래부르는 건 노는 거지 노동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밥짓는 일은 식당에서 하면 노동이지만 집에서 하면 노동이 아니다. 이럼으로써 여성들의 활동은 노동이 아닌 것, 가치를 낳지 않는 것, 따라서 생산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성을 사회적 활동에서 격리시키고, 그들의 활동을 가치가 없는 것, 혹은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만드는 이런 조건을 통해, 사회적인 영역에서나 가정적인 영역에서 성적인 차별이 반복적으로 재생산된다.


여성성이 의존성이나 수동성과 같은 관념들로 채워졌던 것은 이러한 사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페미니즘이 사회적 차원의 차별을 넘어 성차나 성별 자체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게 되었던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급진적 페미니즘이라고 불리는, 혹은 진정한 페미니즘이라는 의미에서 ‘페미니즘적’ 페미니즘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관점의 형성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것은 사르트르의 유명한 연인 드 보부아르였다. 그는 <제2의 성>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여성들이 어떻게 하여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어지고 체험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수정(능동적 정자와 수동적 난자), 출산, 모성 등과 같은 생물학적인 모델, 잉태의 순간부터 태아의 노예가 되며, 탄생한 후에도 아이의 삶에 묶이는 어머니의 노릇은 여성이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없도록 만드는 실존적 조건이다. ‘제2의 성’, 그것은 어쩌면 2명이 달리는 시합에서 2위와도 같은, 열등한 위치를 부여받은 여성성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보부아르가 보기에 여성 해방은 남성의 구성물인 그러한 여성성, 모성성에서, 그 학습된 무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여성성에 대한 그러한 거부가, 마치 여권운동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의 획득을 향해 나아간 것처럼, ‘제1의 성’인 남성성의 획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한편으론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아이러니하다. 남성은 여성의 목표가 된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바로 여성 억압의 주요한 메커니즘이라는 이러한 생각은, 가족의 생물학적 재생산이나 모성에 대한 거부라는 전략과 더불어 미첼이나 밀레트, 파이어스톤 등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에게 유사한 양상으로 이어진다.


급진적 페미니즘의 다양한 도전들


(사진/<제2의 성>에서 여성이 길들여지는 과정을 묘사한 시몬 드 보부아르(아래). 어머니의 몸으로 말하는 새로운 혁명의 언어를 제시한 줄리아 크리스테바(위))


그런데 문제는 차별보다도 더 깊은(?) 곳에 있는 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러한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러한 차별을 여성의 운명으로 당연시하는 것, 나아가 여성 자신에 의해 그런 차별이 재생산되는 것이다. 여기서 여성들은, 생각하되 남성들의 관념으로 생각하고, 말하되 남성들의 목소리로 말한다. 그런 점에서 여성들은 일종의 깊은 침묵 속에 갇혀 있다. 자신들이 꿈꾸는 세계에 대해,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자신들의 신체에 대해, 자신들의 욕망에 대해, 자신들의 정서에 대해 여성들은 말하지 못했다. 대신 남성들이 말하고 남성들이 만들어낸 이상과 욕망, 신체, 정서 등에 대한 관념을 자신의 것으로 갖거나, 혹은 그것과 대칭적인, 대개는 남성적인 특성의 결핍으로 정의되는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말하고 그것으로 사용했다. 더불어 여성들은 이처럼 자신의 욕망,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는 데서도 남성들의 목소리를 빌어야 했던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중요한 것은 남성들이 ‘대신’ 말하고, 남성들이 ‘대신’ 사유한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남성들이 여성들을 대변하리라는 순진한 믿음도 당연히 함께 버려야 한다. 그리고 여성들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신체, 자신의 욕망, 자신의 삶과 꿈에 대해 직접 사유해야 하고 말해야 한다. 여성 자신에 대해 말하기(parler femme), 여성 자신에 대해 쓰기(ecriture femme), 혹은 음경의 가시적 특징을 통해 구성된 남근중심적 욕망에 반하여 음순과 음핵의 생물학적 특성을 상징적으로 재구성한 여성적인 욕망으로 반격하고 대체하는 것, 이는 남성들의 남근중심주의적 상징계를 해체하고, 그것과 독립적인 여성적인 상징계를 구성하고자 하는 루스 이리가레이의 전략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아버지의 이름, 법과 거세가 지배하는 상징계에 반하여, 그에 선행하는, 원초적인 리비도의 복수적인 힘이 작동하는 기호계를 어머니의 신체와 연결된 전복의 공간으로 부각시킨다. 기표나 법의 이성적인 논리를 깨는 시적 언어의 혁명은 어머니의 몸으로 말하는 새로운 혁명의 언어인 셈이다. 여기서 공통된 것은 여성성이 남성성에 비해 열등한 특성들의 집합이 아니라, 반대로 남성적 질서를 깨고, 그것에 결여(!)된 것을 거꾸로 남성들에게도 줄 수 있는 긍정적 특성들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성이란 여성의 자유를 가로막고 수동성과 의존성을 부과하는 ‘악덕’이 아니라, 반대로 여성 자신의 신체, 여성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미덕’이 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부정되어야 할 ‘차별’이 아니라, 그 자체로 긍정되어야 할 ‘차이’인 것이다.


사실 1970년대 이래 페미니즘의 이론은 이러한 몇몇 예들로 한정되지 않은 다양한 사유과 이론적 다양성을 펼쳐왔다. 때로는 정신분석과 동맹하기도 했고, 때로는 정신분석과 대결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마르크스주의와 동맹하기도 했고, 때로는 그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성의 문제를 이성애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넘어서 호모―레즈비안과 같은 동성애적 관계를 통해 두 성 간의 관계를 좀더 근본적으로 사유하려는 비판적 흐름도 있었다. 20세기가 페미니즘의 시대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여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나, 여성들이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남녀의 문제를 넘어서, 이제까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지배적이었던 남근중심적 문화에 대해서, 결국은 남성성 자체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게 만든 다양한 사유의 평면을 펼쳐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항성을 벗어나라


펄펄 끓는 뜨거운 도가니. 현재진행형인 페미니즘 이론의 현황에 대해 이렇게 요약해도 좋을까? 그러나 아직 오래된 난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근중심주의는 여성들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조차 일종의 ‘이중구속’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즉 대립 내지 적대가 되어버린 남성과의 차이를 극복하여 남성과 동일하게 되려는 것은 남성과의 동일시를 추구하는 것이란 점에서 남근중심주의의 한 형태다. 반대로 남성과의 차이를 고유한 여성성으로 찬양하며 ‘차이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은 자칫하면 현재의 성차나 차별을 인정하고 온존시킬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남근중심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얘기를 하는 나도 어색하다. 남성이 여성을 말하는 것은 남근중심주의의 일부이기에 그렇다. 그렇다고 외면하는 것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나도 동일한 이중구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혹시 남성(성)과 여성(성)의 양자택일과 동일한 난점은 아닐까?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항성을 던져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빠져나갈 수 있는 그런 구속은 아닐까?


이진경/ 성공회대 강사


한겨레21 2000년 05월 25일 제3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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