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해체주의> - 의미를 포장한 문자의 편견
이성과 합리성 내세운 로고스중심주의 탈피… 텍스트 사이의 텍스트를 찾아 새로운 의도 규명
해체주의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사상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고, 그의 영향 아래서 이른바 예일학파가 주도하여 70년대 미국의 비평계를 휩쓸었던 문학비평의 사조를 가리키기도 하며, 1988년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열린 심포지엄과, 같은 해 6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존재증명을 얻게 된 건축상의 한 사조를 지칭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떤 초월적인 본질이나 중심, 그것의 현현(presence), 혹은 그것을 구현하는 정전과 제도에 대해, 그 내부에 존재하는 불일치와 균열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대결하는 전략이 작용하는 모든 곳은 해체(deconstruction)의 사유, 해체의 작업이 작용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해체주의는 철학이나 문학, 건축과 같은 특정한 영역을 넘어서는 ‘일반성’을 갖고 있다. 더구나 데리다 자신이 미국의 해체주의에 대해 인정한 바 있듯이, 해체주의는 단지 데리다만의 사상이 아니며, 데리다의 사상으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데리다는 다만 해체주의의 ‘기원’일 뿐이다. 물론 데리다도 말하듯이 기원은 어떤 초월적인 기의(의미)나 본질로 동질화하는 기제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해체주의가 겨냥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기원을 상기시키는 것은, 해체주의의 경우에도 그게 무언지를 이해하도록 정리하는 데 차라리 필수적이다.
초월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언어의 논리
(사진/국제 갤러리.해체주의는 철학이나 문학사조일뿐 아니라 불일치와 균열을 드러내는 모든 사유의 이름이다)
데리다가 상기시키는 ‘기원’을 이용해 해체주의로 접근해보자.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이집트 신화를 인용하여 문자의 해악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어느 날 이집트 왕 타무스에게 기하학, 수학, 천문학, 문자 등을 발명한 신 투트가 찾아온다. 그는 문명의 기초가 되는 이러한 발명품을 타무스 왕에게 선물로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사려 깊은’ 타무스 왕은 신중한 고려 끝에 문자를 거절한다. 투트의 말대로 문자는 기억을 용이하게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낯설고 생명이 없는 기호요 기록에 지나지 않는 반면 그것을 이용하면 인간은 더이상 무언가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진정한 기억력은 급속히 쇠퇴할 것이며, 그 결과 생명 없는 문자가 음성언어의 진정하고 생생한 현존을 대체할 것이다. 나쁜 기억이 좋은 기억을 대체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음성언어란 내면의 목소리다. 그것은 “내가 말하려는 진정한 뜻”이다. 하지만 그걸 문자로 표시하자마자 그 진정함은 사라지고, 다만 피상적인 문자만 남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오독된다. 이처럼 본질이 담겨 있는 내면의 음성이 바로 서양에서 말하는 진리요 로고스(Logos)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할 때, ‘생각’이란 바로 ‘나’라는 주체의 내면적인 저 음성이다. 또한 그것은 신의 뜻에 상응하는 초월적인 기의요, 신 자체에 상응하는 초월적인 본질이다. “태초에 말씀(Logos)이 있었느니라.” 기호나 언어는 바로 이것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사실 서양의 신학이나 철학, 혹은 문학은 이런 내면의 음성을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서 발견하려고 했다. 가령 스콜라 철학은 모든 것에서 신의 손길, 신의 음성을 보았으며, 근대철학은 ‘나’라는 초월적인 주체, 혹은 선험적 자아를 통해서 진리의 ‘근거’를 마련하려고 했다. 진리란 그런 로고스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양 형이상학은 한마디로 ‘로고스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또한 그러한 로고스는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모든 것은 그러한 로고스의 나타남(presence)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현현(presence)의 형이상학에 사로잡혀 있다. 플라톤에서 루소 등으로 이어지는 문자에 대한 거부감은, 로고스의 현현을 훼손하고 생명 없는 기록들로 그것을 대체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문자화 이전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라
(사진/건축사조의 해체주의를 보여주는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로고스중심주의와 현현의 형이상학이 바로 데리다나 해체주의자들이 언제나 공격하려고 하는 타깃이다. 문학평론가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가령 어떤 시를 보면서 그 안에 숨어 있는 의미와 의도를 찾으려는 것은 시가 되어 나온 어떤 로고스, 그 음성을 찾아내려는 시도라는 것이고, 작품은 그런 음성의 충실하고 동질적인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음성도 문자로 표시되는 한에서만 존재하며, 문자에 의존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로고스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문자란 독이면서 동시에 약인 셈이다. 데리다가 플라톤에게 선물한 ‘파르마콘’이라는 개념은 그리스어로 약과 독을 동시에 뜻한다는 점에서 음성과 문자의 이런 관계를 잘 보여준다.
반면 해체주의자들은 거꾸로 문자의 일차성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음성을 발하게 하는 어떤 기의도 우리의 ‘영혼’에 먼저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건 생물이 아니야”라는 음성을 내려면, ‘이건’에 해당하는 돌멩이가, 그리고 생물이라는 말에 상응하는 어떤 것들이 먼저 우리의 ‘영혼’에 기록되어야 한다. 즉 음성조차도 이미 내 머리 속에 기록된 어떤 사태의 ‘흔적들’(traces), 관계의 흔적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런 ‘흔적’들을 원문자(archi-criture)라고 부른다. 이런 점에서 문자란 언어나 기호는 물론 음성보다도 선행하는 것이다. 이처럼 흔적들, 문자들로 기록된 것을 데리다는 텍스트라고 부른다. 따라서 책뿐만 아니라, 흔적들이 새겨진 우리의 ‘뇌’, 혹은 외상(trauma)이나 상처가 기록된 우리의 신체와 정신, 혹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다는 원자폭탄도 하나의 텍스트다. 데리다가 제창한 ‘문자학’(Grammatology)이란 이런 텍스트들을 뒤져서 거기에 새겨진 흔적이나 문자를 읽는 작업이다.
그런데 문자나 흔적들은 자음이나 모음처럼 낱낱으로 기록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묶음으로 엮여 있고, 묶음으로 다른 텍스트나 글(criture) 속에 들어간다. 가령 마르크스의 <자본>이라는 책은 리카도의 글, 스미스의 글, 헤겔의 개념들, 19세기 공산주의의 관념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은 물론 그 책 안에서 새로운 위치를 부여받고,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지만, 이전의 텍스트들로부터 분리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그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들로 가득 찬 것이고, 다른 텍스트들로 흩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텍스트에 새겨진 문자들의 의미는 그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들 사이(inter)에서 형성된다. 즉 모든 텍스트는 사이-텍스트(inter-text)다.
따라서 어떤 텍스트의 의미를 하나로 결정하는 것, 그 텍스트에 어떤 단일한 본질(로고스)에 상응하는 동질성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결정 불가능한 것들이 텍스트-사이에, 그 ‘사이’의 여백에 가득하며, 그것들이 읽는 경우마다 다른 방식으로 튀어나오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텍스트들이, 읽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읽히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 아주 다른 텍스트로 읽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는 단일한 의미, 로고스에 상응하는 단일한 진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직 의미의 산포/산종(dissemmination)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텍스트 안에 있는 또다른 텍스트들로서 문자란 이미 새로운 의미의 씨(semmi, 정자)라는 것이다.
권력을 행사하는 관념에 대한 비판
(사진/해체주의 탄생의 산파 구실을 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
‘해체’란 로고스를 찾아냈다는, 혹은 진리에 관해, 혹은 어떤 규범에 관해 말하는, 대개는 동질적이라고 간주되는 텍스트 안에 들어가, 동질성을 만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균열을 드러내고, 어떤 텍스트의 ‘사이’에 있는 다른 텍스트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그것은 어떤 텍스트를 통해 말하려고 했던 것을 뒤적여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것이 말해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가령 문자에 대해 그렇게 혐오했던 플라톤이 자신의 ‘음성’(Logos), 진리의 음성을 알리고 남겨두기 위해 대화로 스승 소크라테스의 음성을 문자로 기록하게 되었던 아이러니, 니체가 여성에 대해 퍼부은 공격적인 문장들이 사실은 남성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진리와 로고스에 대한 비판의 기록이 되었다는 아이러니 등을 드러낸다. 여기서 해체는 거꾸로 문자의 일차성이나 여성성의 힘을 새로이 찾아낸다. 해체가 단지 파괴라는 부정적 작업이라는 비난을 반박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확실히 해체는 성전, 정전화된 어떤 텍스트들, 그것을 통해 로고스로 군림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어떤 관념들에 대한 비판이요 해체다. 그렇기에 그들은 흔히 비난받는 것과 달리 ‘정치’로부터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근본적 정치를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데리다가 자신의 모든 작업이 마르크스적인 것이었다고 하면서 마르크스와 자신을 연결했던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텍스트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텍스트 내부로 끌어들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를 텍스트적인 것으로 변환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에는 아직 해체주의자들의 작업이 충분하지 않은 듯하다.
이진경/ 성공회대 강사
한겨레21 2000년 06월 08일 제311호
'스크랩 > 인문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낯설게 본 변절과 전향 - 말과 행동의 정치적 분열증을 넘어 (0) | 2009.11.06 |
---|---|
낯설게 본 변절과 전향 - ‘전향’마저 과분한 당신들의 대한민국 (0) | 2009.11.06 |
12. <현상학> - 일상에 말 걸며 자신을 드러낸다 (0) | 2009.11.01 |
11. <페미니즘> - 성의 해체로 차별을 넘어… (0) | 2009.11.01 |
10. <오리엔탈리즘과 포스트식민주의> - ‘백색신화’에 돌을 던진다 (0) | 2009.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