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현상학> - 일상에 말 걸며 자신을 드러낸다
사물의 체험적 의미로 일상의 구실 재발견… 인간 경험의 지향성 깨닫는 데 이바지
(사진/건축물의 예술성은 재료나 기능으로 환원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자연적 특징을 묶어둘때 어떤 예술성이 드러난다)
프랑스의 현대철학을 소개하는 책에서 뱅상 데콩브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20세기 전반기가 3H의 시대였다면, 후반부는 세명의 ‘의심의 대가’ 시대였다고. 여기서 3명의 H는 헤겔(Hegel), 후설(Husserl), 하이데거(Heidegger)고, 3명의 의심의 대가란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다. 그러나 이는 단지 프랑스만은 아닐 것이다. 20세기 전반기에 후설이 창시하고 하이데거 등에 의해 발전된 현상학이 끼친 영향력은 프랑스만이 아니라 일본이나 한국과 같은 나라를 포함해서 서구의 사유가 적어도 ‘상급지배권’을 행사하던 모든 나라들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확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에릭 알리에즈는 구조주의 이후 프랑스 현대철학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을 현상학과의 투쟁과정으로 묘사한 바 있는데, 이는 거꾸로 현상학의 영향력이, 이미 ‘한물간’ 20세기 후반기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작품에 내재하는 예술의지에 주목
현상학의 영향력은 이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특히 예술과 관련된 영역에서는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심지어 현상학이란 이름으로 세간에 알려지기 이전부터, 그 창시자인 후설의 직접적인 영향과 독립적으로 ‘현상학적으로’ 사유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컨대 20세기 초의 유명한 예술사가였던 알로이스 리글은 가령 건축물의 예술적 성격은 목적이나 기능, 재료 등과 같은 자연적 특징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런 자연적 특징들을 ‘괄호로 묶고’ 일상적인 삶에서 분리시켜야 예술적 본질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즉 어떤 건물이 무엇을 위해 지어졌는가가 아니라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체험되는가를 볼 때 비로소 예술작품에 내재하는 ‘예술의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경우 현상학이란 대상을 체험적인 의미를 통해 포착하는 일반적 사유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진/빈센트 반 고흐의 <구두>)
현상학적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이데거가 인용해서 더 유명해진 반 고흐의 <구두>를 보자. 여기 그려진 이 물건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를 먼저 판단한다. 그리고 이게 농부의 구두인지, 노동자의 구두인지, 아이들의 구두인지 어른의 구두인지, 혹은 가죽으로 만든 건지 비닐로 만든 건지 등을 판단한다. 이런 태도를 현상학에서는 ‘자연적 태도’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런 자연적 태도를 갖고는 이 구두가 갖는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고흐가 우리 눈앞에 내놓은 이 구두의 본질을 보려면, 자연적 태도가 야기하는 판단들을 모두 ‘괄호로 묶어서’ 옆으로 치워두어야 한다(이를 현상학에서는 ‘판단정지’라고 부른다). 그러면 그때 비로소 그 구두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부드러운 대지를 밟던 농부의 건강한 걸음이 눈에 들어올 수도 있고, 여름날 뜨거운 태양 아래 김을 매던 농부의 땀이 느껴질 수도 있으며, 차디찬 겨울의 대기를 마시며 섬돌 위에서 농부의 밤을 지키던 고독이 슬며시 손을 내밀 수도 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어떤 일체감을 느끼고 내면을 울리는 어떤 감동을 체험했다면 말이다. 하이데거는 그것은 구두 내지 구두를 그린 저 그림(존재자)을 통해서 ‘존재’가 말을 걸어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일상적 삶 속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어떤 것이었고, 자연적 태도를 통해서 거꾸로 은폐되었던 ‘진리’의 드러남이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망각되었던 사물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존재자에서 존재로 눈을 돌리게 된다(이를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부른다). 반면 저 구두는 농부의 구두가 아니라 노동자의 구두였다고 하면서 ‘주인’을 찾아주는 것은, 말을 걸기 시작한 존재에 다시 귀막고 존재자로, 자연적 태도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인 셈이다. 한마디로 ‘깨는’ 것이다.
고흐의 <구두>를 보는 다른 관점들
(사진/에드문트 후설, 마르틴 하이데거, 장-폴 사르트르(맨위부터))
하지만 후설이라면 좀 다르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이데거처럼 저 구두에서 농부의 삶을, 직접적으로는 그려지지 않은 그 대지와 태양을 느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혹은 반대로 그 구두를 보면서 기름때 가득한 노동자의 삶을, 침침한 공장과 거대한 기계의 표상이 떠올랐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그것은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삶이나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저 구두를 통해 현재로 ‘다시 끌려나오기’ 때문이거나, 미래에 대한 자신의 꿈이 저 그림을 통해 현재로 ‘미리 끌려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어떤 대상을 체험한다는 것은, 체험하는 ‘나’의 의식이 그 대상과 결부된 어떤 과거를 다시 끌어당기는 것이거나(‘다시-당김’ Retention이라고 한다), 어떤 미래를 미리 끌어당기는 것(‘미리-당김’ Protention이라고 한다)과 같은 작용을 통과하는 것이다. 그런 작용을 통과함으로써 눈앞에 있는 저것은 대지와 태양, 한여름의 땀을 머금은 농부의 구두로 ‘구성’되기도 하고, 기계의 그림자가 만드는 어둠 속에서 기름때에 전 노동자의 구두로 ‘구성’되기도 한다. 대상이란 이처럼 의식의 작용 아래(체험적인 대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때 그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으로 다가온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그것은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식으로 말하면 ‘이름을 불러주는’ 작용이 바로 의식의 작용이다. 이는 나와 대상을 이어주는 작용이고, 나의 의식으로 하여금 어떤 대상을 향하게 하는 작용이며, 하나로 일체감을 체험하게 해주는 작용이다. 이를 후설은 ‘지향성’(Intention)이라고 부른다. 가령 보름날 깡통에 불을 넣어 돌리는 쥐불놀이를 보면서, 우리는 원을 그리는 불을 본다. 그러나 사진으로 찍어보면 알 듯이, 어느 시점에도 원은 없다. 어떤 시점에 깡통은 한 점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원으로 지각한다. 이유는 뭘까? 그건 깡통의 현재 위치에, 방금 지나온 과거를 ‘다시 당기고’, 앞으로 나아갈 미래를 ‘미리 당겨서’ 원운동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다시 당기고 미리 당기는 의식의 지향성이 깡통을 원운동을 하는 것으로 구성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후설이 보기에 눈앞에 주어진 것에서 하이데거가 ‘농부의 구두’를 떠올린 것은, 상실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꿈에 대한 의식의 지향성 때문이다. 여러분이 그 그림에서 다른 무엇을 떠올렸다면,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떠올리는 것은 그처럼 다를 수 있지만, 어느 경우든 나의 의식과 대상을 잇는 의식의 작용, 지향성이라는 작용이 없다면, 누구도 대상을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에게나 공통된 이런 의식의 작용이야말로 모든 체험의 밑바닥에 있는 것이고, 체험의 순수한 본질이다. 이것은 이런 경험, 저런 체험에 선행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란 점에서 ‘선험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어디에 속해 있는 게 아니라 의식작용이 발생하는 ‘나’라는 주체(자아) 안에 있는 것이란 점에서 ‘선험적 자아’며, 그것의 순수한 본질이란 점에서 ‘순수 자아’다. 이처럼 대상에서 순수한 본질로, 순수 자아로 나아가는 것을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부른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현상학은 ‘현상’에 관한 학이다. 현상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대상이 어떻게, 어떤 의미로 체험되는가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현상학은 그러한 체험의 양상 밑바닥에 있는 ‘무엇’을 보려고 한다. 이러기 위해 현상학은 앞서 예에서처럼 세계와 의식, 대상과 자아간에 미리 주어진 내적인 상호관계에서 출발한다. 즉 의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이며, 대상이란 의식의 작용 속에서 ‘무엇으로’ 체험되는(구성되는) 대상이다. 여기서 어떤 것을 대상으로 구성하는 의식의 작용을 후설은 ‘노에시스’라고 불렀고, 그것을 통해 구성되는 대상을 ‘노에마’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적인 태도 속에서 흔히 생각되듯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과정을 이루는 두 측면이다. 이런 식으로 후설은 객관과 주관, 세계와 의식을 분리했던 근대적 사유(갈릴레이의 객관주의와 데카르트의 주관주의)를 극복하려고 했던 셈이다.
물론 후설이 체험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선험적 자아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선험적 관념론’이었다면, 하이데거는 체험되는 대상을 통해서 존재가 말을 걸어온다는 점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상반되는 방향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르트르나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등은 현상학이 이 어느 것과도 다른 여러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물론 모든 것을 ‘의미’의 문제로 보는 현상학에 대해서, 의미 이전에 작동하는 ‘권력’을 보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세계를 보고 대상을 보는 지극히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점만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진경/ 성공회대 강사
한겨레21 2000년 06월 01일 제3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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