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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10. <오리엔탈리즘과 포스트식민주의> - ‘백색신화’에 돌을 던진다

by 내오랜꿈 2009.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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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오리엔탈리즘과 포스트식민주의> - ‘백색신화’에 돌을 던진다

서양 중심론이 낳은 일그러진 동양의 표상… 타자를 주체로 내세운 비판적 사유


오리엔트(orient), 잘 알다시피 ‘동양’이라는 말이다. 서양(occident)에 대해, 우리가 사는 세계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동양’에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동양이란 대체 어떤 곳인가? 지구의 동쪽에 있는 세계? 그것뿐일까? 근대화에 뒤처진 낙후된 세계, 문명화에 뒤처진 미개한 세계, 민주주의의 전통 대신에 오래된 아시아적 전제정의 전통이 있는 세계, 합리주의 대신 이른바 ‘동양적’ 신비주의가 지배하는 세계. 이런 표상들 없이 ‘동양’을 떠올리거나, 동양사상, 동양적 전통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19세기, 아니 20세기 초반의 동양을 떠올린다면 어떨까? 여기에 불결함과 비위생적인 환경, 가난과 질병, 미신과 무지 등의 수많은 악덕들이 필경 추가되어 떠오를 것이다. 그래, 우린 그런 세계에 살고 있고, 그게 바로 ‘동양’이다. 동양은 그저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는 지역이 아니라, 이런 표상들과 밀접하게 결부된, 그것으로 표상(재현/대표)되는 세계다. 따라서 만약 동양이 지리적 개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런 표상들, 이미지들로 구성되는 지리적 개념이고, 이런 이미지를 만드는 담론이나 책들, 혹은 상상력 속의 공간이다.


동양을 배제하면서 얻은 서양의 정체성


그러나 여기서 정의되고 있는 동양이란 근대화, 문명, 민주주의, 합리주의, 과학, 위생, 부유함 등과 같이, 서양에 특징적인 것을 결여한 사회다. 서양에 특징적인 것을 잣대로 삼아, 그것이 없는 사회로 동양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동양’이란 사실 동양이라기보다는 비-서양일 뿐이다. 그러나 좀더 냉정하게 따져본다면, 사실은 반대인지도 모른다. 동양이라고 불리는 저 어둡고 비참한 세계와 달리 ‘우리 서양’에 있는 것, ‘우리 서양’에 고유한 것, 그래서 서양을 저 미개하고 뒤처진 사회와 달리 앞서고 발전된 사회로 만드는 것(이게 바로 막스 베버가 평생 추구한 주제였다), 그게 바로 합리주의고, 근대화고, 민주주의고, 과학이고, 위생이라는 것이다.


(사진/마네의 <올랭피아>)

이로써 서양은 스스로 안도할 수 있는 자신만의 정체성(동일성)을 획득한다. 동시에 동양은 결여의 형식으로 그러한 동일성을 보증해주는 ‘타자’가 된다.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나는 곳이 있으려면, 그것의 배경이 되는 어둠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건강함을 정의하려면 질병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그런 식의 정체성(동일성)을 정의하는 척도로서 서양적 미덕은 동양과 서양에 공히 적용돼야 할 보편적 척도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질적인 두 세계에 이미 적용되었고, 그것을 통해 두 세계가 구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제 그런 ‘보편적’ 척도를 아직도 어둠에 묻혀 있는 ‘동양’이 받아들이고, 그 기준에 따라 자신의 세계를 재편하며 문명화의 경로를 따라 진보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식이라면 어차피 계속 2류, 3류임을 모면할 수 없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둠을 떨치고 밝은 빛을 따라 합리적 보편성으로 계몽되는 것이, 까놓고 말하면 잘먹고 잘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리엔탈리즘>에서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처럼 ‘동양’이라는 말이 나타날 때면 항상 따라다니며 다시-나타나는 ‘동양’에 관한 관념과 이미지들을 추적하며 보여준다. 미국에서 강의하는 아랍 출신의 영문학자였던 그는 다양한 문학적 문헌들에서 반복하여 나타나는 일그러진 동양, 어두운 동양, 미개한 동양의 이미지를 한꺼번에 모아놓는다. 그리고 그 밑에서 어떤 것도 그러한 ‘동양’이라는 표상에 포개고, 그런 이미지로 덮어씌우려는 ‘일반의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저 이질적인 세계의 모든 것을 ‘동양화’하려는 이러한 ‘일반의지’에 대해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어이없는 말로 불리는 침략과 팽창, 그 밑에 깔려 있는 서양중심주의, 그것의 짝으로서 열등한 족속들에 대한 인종차별주의 등에 보편성과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동시에 그러한 권력으로부터 보편적 진리라는 현세적 위치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보편적 진리’는 동양이라는 세계 속에 다시 투사되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 자신의 보편적 가치가 되며, 그들 자신의 삶의 척도가 된다.


보편적 가치 추구… 식민지 인종은 여성적?


(사진/서구 제국주의에 '신대륙'은 정복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18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남아메리카 식민지 영토분할을 둘러싼 원주민 집단학살이 등장하는 영화 <미션>)


오랫동안 그 미덕을 의심치 않았던 르네상스의 ‘휴머니스트’들이, 새로 ‘발견’된 신대륙의 인디언들(여기도 ‘동양’이었음은 이 명칭이 잘 보여준다!)이 과연 인간인지를 두고 논란을 벌일 때, 그래서 그들을 노예로 사용해도 좋은지를 두고 싸움을 벌일 때에도,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한점 의혹이나 이견이 없었다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왜냐하면 ‘동양’을 정의할 때 그랬듯이, 인간을 정의할 때도 역시 그들은 자신들만이 갖고 있는 특성을 척도로 이미 설정했던 것이기 때문이고, 이미 인간은 백인 중년남자를 모델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서 그랬듯이, 인간이라는 이름 아래서도 ‘동양’의 사람들, 혹은 식민지의 사람들은 자신이 인간임을 입증하는 어떠한 주장도 말할 수 없었다. 말해도 들리지 않는 침묵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동양의 어둠에 항상 따라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그들은 서양인들이 자신들을 ‘대변’하고 대의해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혹여 그런 대변자들이 나타난다면, 그들은 정말 이 침묵 속에 갇힌, 동양이라는 어두움 표상에 묻힌 이들을 대변할 수 있을까? ‘주체’라는 개념으로 시작된 서양의 근대 역사에서, 이들은 스스로 말할 수 없고,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스스로 사유하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데카르트적 주체의 타자였을 뿐이다. ‘하위주체’.


따라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이 문명과 계몽, 보편성, 진보, 주체, ‘인간’ 등의 관념을 함께 겨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가령 식민주의자들이 자신들(만)의 척도를 식민지인들 또한 당연히 받아들이게 만드는 전제요 통로였기 때문이다. 사이드도 그랬지만, 그의 뒤를 이은 포스트식민주의 비평가들은 서양 형이상학의 백색신화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이나, 계몽과 보편성, 인간 내지 인간주의에 대한 푸코의 비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점에서 오리엔탈리즘 비판이나 포스트식민주의적 비판은 타자성이나 차이에 관한 포스트구조주의의 문제의식과 비판적 연구에 긴밀하게 잇닿아 있다.


더불어 포스트식민주의 비평가들은 이러한 식민주의가 남근중심주의와 공모하는 양상에 주목한다. 그들에 따르면 대부분의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인종들에 약하고 여린 여성성을 부여한다. “벵골인의 신체조직은 여성과 같다고 할 정도로 유약하다. …여러 시대 동안 그는 용감하고 대담한 남자들에게 짓밟혀왔다. 용기, 독립, 정직과 같은 특질들은 그의 체격과 상황에는 한결같이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영국인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식민화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타고난 우세가 식민관계의 또 한 가지 이유라는 것이다. 식민주의와 초기의 인류학 사이의 공모가 이와 무관할까? 반면 식민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 또한 종종 이러한 남성성에 반하는 또다른 남성성의 표상을 통해 형성된다. 이로 인해 식민지의 여성들은 반식민주의 안에서도 부차적인 지위로 밀려난다. 그렇다면 포스트식민주의적 비평가들은 반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의 연대를 주장하려는 것일까?


실재적 저항을 수반하지 않을지라도…


포스트구조주의와 식민주의 비판의 결합을 통해서 제기된 이러한 오리엔탈리즘 비판과 포스트식민주의는, 직접적인 식민주의의 퇴조 이후에 잔존하는 ‘동양’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게 했다. 그것은 아직도 서양인들의 담론과 문화, 서양이라는 정체성 내부에 존재하는 타자의 존재를 가시화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인들 내부에 존재하는 ‘동양’, 식민지인들이라는 타자들 내부에 존재하는 ‘타자’까지도 사유할 수 있는 통로를 열었다. 식민주의의 ‘청산’은 이제야 시작된 것일까? 물론 이러한 비판이 아직도 대부분은 이른바 제1세계 내부에 존재하는 타자성의 추적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런 점에서 그것은 일차적으로 서양인의 문제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있다고 해도, 그리고 포스트식민주의적 비판이 서양의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서 포스트식민주의 비평가들의 실재적 저항과 긴장을 수반하지 않는 한,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는 데 머물고 만다는 비판이 있다고 해도, 새로이 그려지기 시작한 또 하나의 비판적 사유의 선이 갖는 중요성을 무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진경/ 성공회대 강사


한겨레21 2000년 05월 18일 제3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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