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포스트구조주의> - 관계 속에도 차이는 있다
하나의 틀에 모두 묶는 건 또다른 억압… 타자를 솎아내는 서구의 이성주의에 주목
해체주의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데리다를 포함해서 푸코, 들뢰즈와 가타리, 그리고 후기의 라캉 등이 보통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해 언급할 때 거명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 사유의 원천에서나, 그 경로에서나 많이 달라서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결코 편안하지는 않은 인물들이다. 푸코는 구조주의자로 시작하지 않았지만, 66년경에는 대표적인 구조주의자가 되었다가, 68년을 거치면서 구조주의에서 벗어난다. 구조주의자였던 적이 없는 들뢰즈는 니체주의자로 시작했는데, 한때는 스피노자주의자로서 구조주의에 호의적으로 다가갔지만, 70년대 들어와 다시 거기서 멀어진다. 하이데거를 사유의 원천으로 삼은 데리다 역시 구조주의자였던 적은 없는데, 68년 이후 구조주의의 가장 명시적인 비판가로서 부상하며, 이후 해체주의라고 불리는 자신의 영향권을 형성한다. 레비 스트로스와 함께 가장 적극적인 구조주의자 가운데 하나였던 정신분석가 라캉은, 구조주의가 퇴조할 때 거기서 발을 뺐다.
그렇다면 포스트구조주의란 어떤 것인가? 먼저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관계 속에서 포착한다. 그러나 구조주의와 달리 관계들의 동형성을 찾으려 하지 않으며, 다양한 현상들의 심층에 숨어 있는 어떤 구조를 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형성이나 동일성으로 귀속되지 않는 차이를 사유하려고 한다. 따라서 관계들의 다양성을 어떤 하나의 척도나 구조로 귀착시키는 게 아니라, 그 다양성 자체도 조그마한 변형 하나만으로도 또다른 다양체로 변이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동일성에 귀속되지 않는 차이 찾아
(사진/근대 서구의 이성은 타자에 대한 배제와 억압을 통해 탄생되었다. 부랑자와 빈민 등은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질서 속에서 배제되어 특정시설에 갇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날아가는 공이 있다. 이 공의 의미는 무엇일까? 공이라고? 맞다, 공은 공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건 동어반복이고, 따라서 틀릴 위험은 없지만, 그 공의 의미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흑인은 흑인이다”를 반복할 뿐이다. 그런데 만약 날아가는 공 앞에 시원하게 뻗은 한국 선수의 발이 있고, 그 공의 뒤에 다른 한국 선수의 발이 연결된다면 어떨까? 이때 우리는 그 공의 의미를 안다. 흔히 그걸 ‘패스’라고 한다. 반면 그 공이 ‘한국 선수의 발→공→일본 선수의 발’과 같은 계열을 그린다면 어떻게 될까? 알다시피 ‘패스 미스’다. 여기서 공의 의미는 앞의 것과 전혀 다르다. 일본 선수의 발 대신에 골 그물과 계열화된다면? 맞다, ‘골인’이다. 그런데 그 골대에 한국의 골키퍼가 다시 추가되며 계열화된다면? 애석하게도 ‘자살골’이다.
이처럼 공의 의미는 그것과 이웃하는 다른 것들과 어떻게 계열화되고,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의해 달라진다. 다시 말해 이웃한 항의 차이, 이웃관계의 차이에 의해 사물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차이’란 바로 이처럼 어떤 것이 의미를 갖게 하며, 또 그 의미를 다르게 만드는 결정적 요소다. 따라서 모든 것은 관계에 의해, 관계 속에서 위치에 의해, 혹은 이웃관계에 의해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보통 ‘관계주의’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들이 구조주의자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구조주의자들과 달리 이렇게 만들어지는 계열들 사이에서 동형성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살골’의 경우처럼 다른 항이 하나 추가되는 것만으로도 기존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는 게 이들에겐 중요하다.
그래서 이들의 화두는 ‘차이’다. 동일성으로, 혹은 동형성으로 소급되지 않는 차이 그 자체, 그리고 그것을 통해 생성과 변화를 사유하는 것. 하지만 주의할 것은, 이 경우 차이라는 개념은 흔히 자유주의자들이 그러하듯 너와 나의 차이, 한국과 일본의 차이, 혹은 공과 발의 차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이런 식의 차이 개념은 분류학적 과정을 거쳐 결국은 다시 하나의 정점에, 동일성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A와 B가 접속되어 제3의 것인 C가 된다는 것이고, 이처럼 새로운 것의 생성을 포착하게 해주는 차이 개념이다.
포스트구조주의에 중요한 또 하나의 화두는 ‘타자’(others)다. 타자란 동일자(the Same)의 반대다. 동일자란 관련된 대상들을 하나의 동일한 질서 속으로 끌어들이며 동일화하는 것이다. 반대로 타자는 거기서 배제되고 억압되는 것이다. 가령 푸코는 이성과 광기에서 이런 양상을 보여준다. 르네상스시대에 광기는 브뤼겔의 그림에서 보이듯이, 혹은 세계를 떠도는 돈키호테가 그렇듯이 특별한 존재- “또라이” -로 취급받긴 했지만, 다만 특별한 삶의 방식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 돈키호테도, 미친 햄릿도 갇히지 않았다.
타자화는 자신을 드러내는 방편이 아닌가
(사진/포스트구조주의자들 내부에서도 관심의 차이가 있다. 데리다, 푸코, 들뢰즈(위부터))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이들은 부랑자나 빈민, 게으름뱅이, 범죄자 등과 더불어 ‘종합병원’이라는 간판이 걸린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크다는 이유로 풍차를 거인과 동일시하고, 붉다는 이유로 포도주를 피로 간주하는 돈키호테식의 사고방식은, 세상을 떠돌며 사회 안정을 위협하는 부랑자와 마찬가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된 것이다. 이들이 바로 ‘타자’다. 이성이란 이 갇힌 자들이 표시하는 정상성의 경계를 통해 정의된다. 광기가 아닌 것, 부랑이 아닌 것, 게으름이 아닌 것 등등이 이성의 외연이다.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이성은 어떻게 자신을 유효하게 정의할 수 있었을까? 이처럼 근대 서구의 이성(동일자)은 광기라는 타자의 배제와 억압을 통해 탄생한 것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동일성(identity)을 확인하는 것이다.
사실 레비 스트로스 역시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비서구인들에게 가해졌던 야만적 폭력에 대해 분노하며 지적한 바 있다(‘슬픈’ 열대). 그리고 서구의 ‘문명’을 다른 세계의 ‘야만’과 비교하여 우월하다고 하는 생각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그렇지만 그는 야생적 사유에 대한 선호에도 불구하고, 서구와 비서구 문화를 상대화하고 등가화하는 데 머물렀으며, 결국 하나의 구조적 동형성으로 그것을 묶음으로써 또다른 동일자를 만들어냈다. 동일자의 이면에는 언제나 그로 인해 배제되고 억압되는 타자가 있다고 보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구조주의와 다시 달라지는 지점이 여기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혹은 ‘신대륙’의 모든 문화를 ‘야만’으로 타자화함으로써 자신의 문화를 ‘문명’이라고 정의한 것은 아닌가? 문명이란 이름으로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타자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아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이성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문화 내부에서,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남성적 동일자 내부에서, 나아가 동일자가 작동하는 모든 영역에서 타자에 대한 이러한 사유를 작동시킨다. 그것은 차이를 문명화하고 동일화해야 할 어떤 것으로 만드는, 혹은 동일화할 수 없는 차이, 허용할 수 없는 차이를 배제하고 억압해야 할 타자로 만드는 모든 종류의 사유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여기서 우리는 타자의 문제가 차이의 문제와 동일한 화두였음을 알 수 있다.
동일화 논리가 지배하는 서구적 사유에 균열
물론 포스트구조주의자들 사이에도 커다란 차이가 있다. 먼저 푸코나 들뢰즈/가타리는 구조주의자와 달리 기호와 상징계에 대해 일차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푸코에게 일차적 관심사는 형법학이나 행형학이라는 텍스트가 아니라 감옥이라는 물질적 장치, 팬옵티콘이라는 건축적 장치다. 들뢰즈는 기호적인 것들의 독자성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것을 언제나 기계적 배치라고 부르는 물질적 현실에 귀속시킨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기호나 기표가 아니라, 그러한 장치나 배치를 통해 작동하는 권력이다. 반면 데리다는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은 문자로 쓰여진 것만이 존재한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그는 ‘원자폭탄도 텍스트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보이듯이 그는 원자폭탄이나 감옥을 하나의 텍스트로서 다룬다는 점에서 그에게 일차적인 것은 텍스트고 기호며 의미다. 푸코나 들뢰즈는 “기표의 독재를 깨부수자”고 말하는 데 반해, 데리다는 독재도 기표요 텍스트라고 보는 셈이다.
어떻든 차이와 타자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통일’과 동일화의 논리가 지배하는 서구적 사유의 내부에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낸다. 혹은 그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을 사유하게 한다. 물론 푸코가 이성 대신 광기를 찬양한 것이 아니었듯이, 동일자 대신 타자를 찬양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은 아니다. 내부의 균열, 외부의 타자를 통해서 이성을 비롯한 모든 동일자의 경계를 가변화하는 것, 그리하여 생성적인 차이의 힘이 작용하게 하는 것. 이는 단지 사유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고 실천의 문제다.
이진경/ 성공회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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