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국가에서 시행하는 시험을 치른 건 전부 다섯 번. 고등학교 올라갈 때 치른 '연합고사'(이름이 맞나?), 대학갈 때 치른 '학력고사' 그리고 운전면허시험. 여기까지는 대학을 간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면 누구나 한 번 쯤은 치렀을 시험이다. 전공이 상경 계열이었기에 이공계 출신들이 치르는 무슨 '기사' 시험 같은 건 칠 이유가 없었다. 요즘이야 대학생들이 '스펙' 쌓는다고 국가에서 주관하는 온갖 시험을 치며 자격증을 따고는 하지만 우리 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기업체 취직시험도 없었다. 졸업도 하기 전에 기업체에서 보낸 추천서를 받아 들고 면접보러 가서는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 취직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시의 상경계열 학과들은 그랬다. 물론 나하고는 상관없는 삶이었지만.
이런 면에서 난 내 또래의 대기업 50대 부장급이나 임원들은 복 받은 인간들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 중에 운전면허증 말고 다른 자격증 있는 이들은 아마도 열에 한둘 정도일 거다. 물론 자격증이 그 사람의 능력을 나타내는 건 아닐 테니 자격증 유무를 말하려는 건 아니다. 대학 들어가기는 지금보다 어려웠지만 그 댓가로 그만큼 편하게 취직해서 편하게 살아오고 있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하 직원들한테 '꼰대' 짓 같은 건 하지 말고 살라는 이야기 정도는 하고 싶다.
각설하고 이렇게 시험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던 내가 최근 2년 동안 두 개의 시험을 치뤘다. '유기농업기사' 시험과 '농산물 품질관리사' 시험.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노니 장독 깬다'고 그냥 한 번 쳐 본 시험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농산물 품질관리사'는 공인노무사나 감정평가사 같은 국가자격시험이기에 누구나 응시할 수 있다. 그러나 '유기농업기사' 시험은 그렇지 않다. 토목기사 시험, 건축기사 시험과 같이 관련 분야를 전공했거나 관련 분야에 몇 년 동안 종사했던 사람에게만 시험 자격이 주어지는 응시 제한 시험이다. 당연히 나는 자격이 안 된다. 그래서 준비한 게 '유기농업 기능사' 시험이다. '기사' 시험과 달리 '기능사' 시험은 응시자격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유기농업 기능사' 시험 과목을 보니 세 개였다. 유기농업일반, 작물재배, 토양관리. 유기농업은 늘 보던 책이고 작물재배는 원예작물학의 분과학이기에 이 역시 별 문제 없을 것 같고, 토양관리 한 과목만 따로 공부하면 될 것 같았다. 덕분에 토양의 생성이나 성질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책 한 권 사서 읽고 준비한 다음 찾아간 순천제일대학교 시험장. 자리에 앉아 시험을 칠려고 하니 뭔가 이상했다. 내가 준비하고 간 '유기농업 기능사' 시험은 60문항에 60분인데 들어온 감독관이 하는 이야기는 100문항에 120분이라는 거다. 그제서야 수험표를 들여다 보니 '유기농업 기능사'가 아니라 '유기농업 기사' 시험 수험표였다. 당시만 해도 이 둘의 구분을 확실하게 알지 못했던 탓에 '유기농업 기능사' 시험 응시한다는 게 '유기농업 기사' 시험에 응시했던 것이다. 이 모든 시험은 한국산업인력공단 홈페이지인 'Q넷'에서 관리하는데 'Q넷' 아이디를 만들면 입력된 정보로 응시자격 여부를 판단해 준다. 자격은 안 된다고 가르쳐 주면서 응시는 왜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다. 자격이 안 되면 응시도 안 되게끔 막아야 하는 것 아닌가?
어쨌거나 기왕에 들어온 거 시험이나 치고 나가자는 생각에 두 시간 동안 갇혀 있다 나왔다. '유기농업 기능사' 시험 세 과목 외에 유기농업 관련 법령과 유기농업 유통론이 추가된 것 같았다. 책 한 권 안 들여다 보고 상식으로 치기에는 약간 애매한 것도 있었는데 4지 선다형이라 문제만 잘 이해하면 2지 선다 정도로 축소할 수 있었고 그 덕에 과락(40점)은 면한 것 같았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 1차 시험에 합격을 했으니 2차 시험 준비를 위해 자격증이나 경력정보를 제출해야 하는데 나에게 있을 리 없으니 제출시한 마감날까지 몇 통의 문자를 받고서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감날 아침부터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오는 것이다. 062가 찍혔으니 광주인데 느낌에 한국산업인력공단 전남·광주 지원인것 같았다. 몇 통 오고 말겠지 하며 받지 않고 버티고 있는데 저녁 8시가 가까워 오는데도 전화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예의상 받아야 되겠다 싶어 받으니 통화하기 왜 이렇게 힘드냐고 하며 제출서류가 도착하지 않아서 전화하는 거란다. 내 원 참, 친절하기도 하지. 바빠서 잊고 있었다고 대충 얼버무리니 내일까지 제출할 수 있냐고 묻는다. 어렵게 합격했는데 서류를 제출하지 않아서 떨어진다면 아깝지 않느냐는 거다. 이 사람, 지금까지 내가 만난 공무원 중에 가장 친절한 공무원이었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고 없는 자격서류를 제출할 수는 없는 일. 덕분에 '유기농업 기사' 자격증이 아니라 자기 일처럼 아쉬워하던 이 사람의 목소리만 간직하고 있다.
작년에 '농산물 품질관리사' 시험 치느라 미뤄두었던 '유기농업 기능사' 시험을 이번 주말에 친다. 내일 모레다. 재작년에 한 번 공부했었고, 작년의 '농산물 품질관리사' 시험도 유기농업과는 무관하지 않기에 별로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유기농업 기사' 시험도 합격했는데 '유기농업 기능사' 시험 쯤이야 하는 자만심의 발로랄까.^^ 그래도 시험에 대한 예의상 며칠은 공부하자 싶어 책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성적우수자가 아닌 60점 이상이면 무조건 합격이라는 안전장치가 있는 탓에 할 짓 못 할 짓 다 하면서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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