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1) B.C. 587년, A.D. 70년 : 몇 가지 기호체제에 관하여
언어학의 공준을 다룬 4장에서는 기존의 언어학적 통념에 반하는 화용론적 언어개념, 이른바 ‘반음계주의적 언어학’을 제안한 바 있다. 그것은 언어를 그 외부를 통해서, 그것을 내적 요인으로 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었다. 언어학에 대한 이러한 화용론적 비판은 언어활동을 정치로, 언어학을 정치학으로 재정의 하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관점에서 기호의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종류의 기호이론(semiotics)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장에서 제시되는 몇 가지 기호체제의 개념은 이러한 기호이론을 긍정적으로 구성하기 위한 하나의 실험적 시도로서 기호체제들의 작동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5장에 있는 4개의 절은 각각 분리되어 설명된다기보다는 하나의 절이 다른 절을 설명하고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각각의 절들은 독립된 하나의 내용을 지시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서로 반사되며 그 의미를 증폭시키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1.기호체제의 개념
1)기호체제와 미시정치학
기호체제의 개념에서는 기호체제를 화용론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화용론이 미시정치학과 만나게 되는 부분에 대해 설명한다. 화용론은 언어의 자체의 고유한 내적 본질이나 보편적이고 항상적인 본질은 없으며 다양한 외부적 요인에 따라 그때마다 달라지는 변이의 연속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기호체제에서 화용론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언어적 ‘권력’을 다루는 정치학적 언어학의 입장에서 기호나 언어를 다루는 새로운 이론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학을 ‘체제(regime)’로서, 언어를 ‘정치’로서 다룬다는 점에서 화용론이 미시정치학과 겹쳐지는 지대를 표시하는 개념이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현행 언어학적 권력 주변에 소수적인 변이와 변환의 선을 범람하게 할 수 있는 전략적 침로를 찾아내고 이를 위해 전투의 조건이 되는 권력의 지형을 포착하는 것이 목표.
cf.) 퍼스의 기호이론semiotics
2)기호체제의 개념
들뢰즈/가타리는 특정한 표현의 모든 형식화를 최소한 그 표현이 언어적인 한에서 기호체제라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의 기호체제는 하나의 기호계를 이루고 그것의 표현형식이 언어적 형식을 취할 때 그것을 기호체제라고 정의한다. 이는 라깡의 정신분석학에서 설정하고 있는 상징계와 비슷해지는 지점인데, 라깡은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고 하면서 구조화된 언어들이 갖는 힘을 ‘기표의 물질성’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라깡이 정관사(le)를 써서 상징계의 ‘단일성’과 ‘보편성’을 설정한다면, 들뢰즈/가타리는 부정관사(un)을 써서 다른 종류의 기호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는 하나의 보편성 및 단일성을 갖는 기호계란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우리는 특정한 표현의 모든 [종류의] 형식화를, 최소한 그 표현이 언어적인 한에서 기호체제라고 부른다. 하나의 기호체제가 하나의 기호계를 이룬다.”(I, 118)
이러한 정의는 언어적인 형식을 취하는 모든 종류의 표현형식에 관한 것인데, 이는 결코 언어적이라고 할 수 없는 하나의 배치 안에서, 그 배치의 한 성분으로 언어적 내지 기호적인 것을 다뤄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기호계가 결코 일차적 내지 특권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함축하는 정의다.
이처럼 기호계를 ‘기호체제’로 보는 것은 이것을 하나의 세계로 질서지우고 유지하는 '권력의 배치'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즉 기호체제란 기호계적인 권력이 작동하는 ‘정권’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용론에서는 언어활동이 그 자체만으로는 보편성을 갖지 않으며, 기표적인 형식화도, 기호학이나 일반적 메타언어도 갖지 않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특수한 상황과의 만남을 통해 언어활동의 영역을 증폭시킨다.
2. 네 가지 기호체제
1) 기표적(의미작용적) 기호체제
어떤 기호가 연관된 다른 기호들의 관계 속에서, 그것에 고유한 의미를 획득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기호체제. 여기서 기표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기호다. “세계는 기표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는 채 기표에 의해 시작되었고, 기의는 알려지지 않은 채 주어져 있다.”(I, 119) 태초에 기표들이 있었던 것이다. 기호가 일단 존재하며, 존재하는 기표들 간의 상호관계 내지 상호작용이 존재할 뿐이다. 그 자체로 대응하는 어떤 의미를 이미 갖고 있는 것이 아닌 이 기표는, 소급적으로 참조되는 다른 기표들 간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기호는 기호로 소급되며, 오직 기호로 무한히 소급될 뿐이다.”(I, 119) 이런 의미에서 기호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으며, 다른 기표들과의 그물망 안에서 고유한 의미를 획득하는 기표다. “기표는 기호로 넘쳐흐르는 기호다.”(I, 119)
의미작용이란 이러한 기표들 간의 서로 소급되는 상호작용일 뿐이다. 라캉 식으로 말하면, “기의 위로 기표들은 미끄러진다.” 기호는 기표들 간에 발행하는 (기표의) 의미작용 내지 (기표의) 의미화를 통해 의미를 획득한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기표들의 그물망은, 기표화 된 세계 안에서 기호를 사용하려는 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기표들의 사용은 그 그물망을 짜는 기표들 사이에서, 그것들 상호간의 규칙과 배열 안에서 다만 사용할 것인가 아닌가 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만큼 의미 이전에 의미작용의 그물망이 선재한다. 기표와 기의의 그물망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기표적인 기호의 세계 안에서 주체의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이미 그 자체로 질서화 된 기표들의 힘을 빌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의미와 기호 사이에 근본적인 분열이 발생한다. 여기서 기표적인 기호체제의 질서는 기표들의 구조화된 질서를 통해 사람들의 관계가 조직되고 그것에 따라 무의식이 형성된다는 점을 함축한다.
cf.) 레비-스트로스의 ‘호칭의 관계’ --> 이것은 레비스트로의 호칭체계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는데, 근친상간 금기는 우생학이나 생물학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호칭의 체계를 근본적으로 와해시키기 때문이다(한 여자가 내게 아내인 동시에 엄마일 경우).
eg.) 프로이트의 ‘Fort-da 게임’(어머니의 부재를 대신하는 기표로서 실패). 라캉의 ‘남근의 의미작용’(grand phi). 라캉의 도식 L에서 큰 타자와 작은 타자, 작은 타자에 대한 상상적 동일시.
이러한 기표의 무한소급을 정신분석학의 경우 어머니나 남근을 설정해서 해결. 정신분석에서 기호 체계는 ‘결핍’을 상정하면서 이를 통해 팔루스의 기표로 특권적인 기표, 특권적인 중심의 역할을 하게 한다. 이러한 기표들은 팔루스의 기표 주위를 떠돌며 남근의 의미 작용을 통해 그때마다 어떤 기의에 정박하게 되지만 이것은 잠정적인 봉합일 뿐이고 이로 인해 욕망의 기표들은 끊임없이 다른 기표들로 치환되고 이를 욕망의 환유 연쇄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기표들 하나의 중심적인 기표, 특권적인 기표로 환원되는 것으로 귀착된다. 그래서 이러한 환원 가능성으로 인해 기표적인 기호체제를 ‘편집증적인 체제’라고 부른다.
“중요한 것은 기호의 이러한 순환보다는 차라리 그 원환이나 연쇄의 복수성이다. 기호는 단지 동일한 원환 상의 다른 기호로 소급될 뿐 아니라, 오히려 다른 원환이나 다른 나선환의 기호로 소급된다.”(I, 120) 그러나 “비약은 규제되거나 금지되기도 한다. 가장 외부의 원환을 벗어나서는 안되며, 가장 중심에 있는 원환에는 근접해서도 안된다(가령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적 욕망 ; 카프카의 <성>에서 ‘성’과 K 간의 상보적 관계).”(I, 121)
반면 “끊임없는 원환이나 나선의 확장을 보장해야 하며, 체제에 고유한 엔트로피를 정복하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원환이 펼쳐지고 낡은 원환이 재양육될 수 있도록 기표를 재공급해야 한다.”(I, 121) 주석 내지 해석이 그것이다. 해석해주는 사제, 예언자는 전제적 신-관료의 일종이다. 사제의 속임수라는 새로운 양상의 속임수가 나타난다. 이러한 해석은 의미화에 종속된다. 신경증으로서 의미화와 해석.
eg.) 정신분석가가 행동이나 말을 기표로서 다루는 방식.
cf.) 이러한 의미화에 종속된 해석은, 전제군주적 기표를 제거하고 해체한 데리다의 경우 의미의 산포로 나타난다. 주어진 원환은 교란되고, 다의성은 탈중심화된 새로운 기표의 원환을 그리기 시작한다.
기표와 안면성
“언어활동은 언제나 안면성이란 특질을 수반할 뿐만 아니라 얼굴은 잉여성의 총체를 응결시킨다. ···목소리가 나오는 곳은 얼굴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제국적 글쓰기 기계의 근본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글이 책과 같은 특징이 아니라 구두적인 특징을 갖는 것이다. ···기표는 언제나 안면화된다. 안면성은 이 모든 의미화 및 해석의 총체 위에 물질적으로 군림한다.”(I, 122)
가면은 얼굴이다. 사제는 신의 얼굴을 관리한다. 얼굴이 지워질 때, 우리는 다른 체제에 들어선 것이다. 사진의 문제. 반-신체로서 사형 당한 자의 신체 내지 얼굴. 부정적 탈주자, 속죄양.
eg.) 체제는 사진을 거는 것으로 안면화된 권력을 명시하고, 체제에 반하는 혁명은 사진을 찢음으로써, 혹은 대체함으로써 진행된다. 김수영, ‘이제 그 놈의 사진을 찢어서 밑씻개로 하자’ ; 『블레이드 러너』에서 아버지-신의 거부.
반면 “얼굴이 지워질 때, 얼굴의 특질이 사라질 때, 우리는 분명히 다른 체제에 들어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죽음의 얼굴이며 죽음을 통해 새로운 얼굴로 탄생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 이것은 기표연쇄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첫걸음으로 신의 얼굴을 살피기를 중단한 자의 형상이다. 신이 부과하는 탈주자의 부정적 형상은 저주와 증오, 사형의 문장/선고-탈주자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탈주자에게 내리는 전제군주의 사형선고가 그에게 부정적 형상을 덮어씌운다는 점(eg. 빨갱이). 따라서 얼굴을 가리는 데에서 낡은 체제를 전복하려는 혁명적이고 잠행적인 삶은 비로소 시작된다.
eg.) 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르는 것, 김삿갓, 그리고 사파티스타의 가면.
2) 전기표적(전-의미작용적) 기호체제
기표되기 이전의 기호계로서 기표적인 기호들과 달리, 자연적이고 신체적인 형식을 취하기에 대개 신체적 내용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의미/표현을 갖는 기호고, 따라서 기표들의 그물망으로 절단/채취되는 어떤 의미작용이 선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는 어떤 것도 표현의 유일한 실체로서 안면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기호적 추상을 위해 신체적인 것의 제거가 없고, 기호나 표현을 얼굴로 재영토화하지도 않는다.
"기표에 의한 권력장악을 피하고 내용 그 자체에 고유한 표현형태를 보존하는 표현형식의 다원성과 다의성을 위한 것. … 신체성, 몸짓성, 리듬, 춤, 제전의 형태가 이질성 안에서 음성적 형태와 공존한다.”(I, 124).
이는 원시인들의 제의나 삶에서 흔히 발견되는데 표현형식과 표현의 실체가 단일하지 않아서, 때론 신체적 제스춰(환영의 동작, 저주의 동작, 애도의 동작, 기원의 동작 등)가, 때론 집합적 동작의 공동 리듬(의례로서 공동의 춤에서 리듬적인 분절)이, 때론 음성적 실체의 분절이 무의미한, 그저 소리를 낸다는 동작이 중요하게 되는(주문을 외거나, “야호”를 하거나, 구호를 외치거나 하는 경우) 식으로 표현의 실체/형식이 가변화된다. 따라서 “그것은 선분적인 기호계지만, 기표적인 순환성과 싸우는 다선적이고 다차원적인 기호계다.”(I, 124)
eg.) 인디언들의 사냥 제의(베어하트,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디언의 지혜』 참조)
3) 반기표적(반-의미작용적) 기호체제
기표적인 의미작용에 반하는 기호들로 구성되는 체제로 암호, 번호적 기호(그 자체론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에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는 것), 유목민의 번호적 조직(전쟁기계에 기원을 둔 형태) 등. 즉, 일반화된 의미작용을 피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기호로 의미작용에 반하는 기호이면서, 기표에 반하는 기호이다.
“번호적 기호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표시 외에는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으며, 다양하고 유동적인 재분할을 표시하며, 그 자체로 기능들과 관계들을 수립하며, 총체를 이루기보다는 배열(arrangement)을 이루며, 수집보다는 분배를 행하며, 단위의 조합보다는 절단과 이행, 이동과 축적에 의해 작동한다. 이러한 기호는 국가장치에 반하여 그 나름대로 지휘되는 유목적 전쟁기계의 기호계에 속한다.”(I, 125) 번호적 조직과 그에 연관된 공간적 조직은 거대한 유목에 적합한 군사적 체계를 보여준다. 비밀과 정탐은 전쟁기계의 이 번호적 기호계에 중요한 요소다.
cf.) 암호로서의 번호와 표상으로서의 수의 구별 : 수 아닌 다른 것에 의해 야기되는 수의 표상. 척도를 포함하는 수는 선분성을 갖는다. 반면 다른 말로 ‘명목수’라고도 불리는 번호는 이름을 대신하는 기능을 할 뿐이며, 어떤 척도(기수)도, 어떤 순서(서수)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름을 대신하는 이 수는 이름이 야기하는 표상에 반하기 위해, 그것을 감추기 위해 사용된다. 그런 만큼 반-표상적인 이 기호는 표상의 원천으로부터 탈영토화되어 있다.
eg.) 군대의 번호적 조직은 이런 점에서 표상에 반하는 비밀적 성격을 가지며, 또한 경찰의 지역적-영토적 조직과 반하는 탈영토적 성격을 갖는다. 군대는 공격할 수 있지만, 경찰을 방어할 수 있을 뿐이며, 군대는 쿠데타를 할 수 있지만, 경찰은 그럴 수 없다. 탈영토성의 문제, 유목적인 이동의 문제.
4) 탈기표적(탈의미작용적) 기호체제
탈기표적 기호체제는 기표적인 의미화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체제로, 탈주선에 의해 시작되는 체제고, 전제군주의 기표(기표적 기호체제)에서 벗어나는 ‘주체화의 점’에서 시작되는 체제이며,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 주체가 포개지는 방식으로 새로운 의미화 체제로 들어간다.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 주체가 포개지는 선형적 과정에서 호명과 대답의 반복적인 과정은 언제나 이들이 일탈할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따라서 ‘배신’ 내지 ‘얼굴 돌리기’는 주체화 체제의 중요한 특징이다. 신이 인간을 배신하는 한, 새로운 긍정성을 정의하는 신의 분노 안에서 진정한 인간 역시 끊임없이 신을 배신한다.
eg.) 제국으로부터 탈주하는 히브리인(편집증적 파라오와 대립하는 정염적 히브리).
cf.) 전환점으로서 사무엘/사울(왕을 요구하는 백성과 사무엘의 비판. 신의 허락. 사무엘의 경고와 백성의 감내의 결의). 다윗에 의한 제국적 영토화, 솔로몬에 의한 ‘문명화된’ 국가의 건설. 성전의 건설. 언약궤를 안치한 성전의 두 차례의 파괴-B.C. 587 & A.D. 70(이 장의 제목에서 차용한 연대기). ==>성전의 파괴는 국가장치화한 체제의 파괴이고, 국가적인 방식으로 조직된 삶의 파괴이며 새로이 유동하고 부동하는 삶의 재시작을 의미한다. 언약궤는 단지 그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실행조건을 상실한 기호들의 집합에 불과한 것이 된다. 탈주자들을 속죄양 내지 사형수로 처벌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며, 탈영토화의 선이 범람하게 되었고, 새로운 주체화의 선이 그리는 게 가능해진다.
결국, 기표적인 체제가 속임수의 체제였다면 주체화의 체제는 배신의 체제였던 것이다. “기표의 얼굴과 선지자의 해석에, 또 주체의 치환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더이상 날조와 속임수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배신의 체계, 보편적 배반의 체계로서, 거기서는 신이 인간을 배신하는 한, 새로운 긍정성을 정의하는 신의 분노 안에서 진정한 인간 역시 끊임없이 신을 배신한다.”(I, 131) 기표적인 체제와 주체화의 체제를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잘 보여준다. 오이디푸스는 두 가지 상이한 부분으로 나뉜다. 예언이 실현되고 그 자신이 범죄자라는 것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편집증적이고 해석적이며 예언적인 구성이고, 오이디푸스가 눈을 찔러 얼굴을 지우는 것은 속죄양의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 되고, 부정적인 색깔로 칠해진 탈주선을 기꺼이 타는 것이며, 운명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속이고 자신의 부친을 속인 신에게서 얼굴을 돌리는 것이다. 후반부는 자신의 얼굴과 신의 얼굴로부터 이중적인 얼굴 돌리기의 탈주선을 보여준다. “전반부 전체는 제국적이고 전제적이며, 편집증적이고 해석적이며 예언적이다. 하지만 그 후반부 전체는 오이디푸스의 방황에 관한 것으로, 그 자신의 얼굴과 신의 얼굴로부터 이중적인 얼굴돌리기의 탈주선을 보여준다.”(I, 132) 니체에 따르면 (후반부의) 오이디푸스는 프로메테우스와 반대로 그리스의 유태적 신화다. 그러므로 속임수와 배신은 본질적으로 다른 체제에 속하는 것이다. 즉, 속임수는 기표의 체제이며, 배신은 주체의 체제이다.
속임수와 배신의 차이 : 속임수는 기표적인 체제, 전제적인 체제에 고유한 것이라면, 배신은 탈기표적인 체제에 고유한 것이다. 이를 혼동하면 안 된다. 반면 보르헤스의 소설은 속임수와 배신을 구별하지 않는다(가령 보르헤스의 「배신자와 영웅에 대한 논고」, <픽션들>)에서 아일랜드의 영웅 컬 패트릭은, 반란을 끊임없이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 배신자였음이 밝혀진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배신자를 찾아서 처형하도록 서명한 사람이었다. 속임수와 배신이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그에 대한 처형도 도시 전체를 극장으로 하는 하나의 연극으로, 수치스런 배신을 감추어 영웅으로서 죽게 하는 속임수로서 행해진다. 그것은 배신자를 다시 배신케 하는 또 하나의 배신이기도 했다).
cf.)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언표행위의 주체인 (생각하는) 나는 방법적 회의라고 하는 탈영토화의 선을 따라 사고한다. 속이는 신과 교활한 천재. 반면 언표주체인 (존재하는) 나는 탈영토화하는 언표행위의 주체를 확실성의 대지 위로 재영토화한다. 그러나 코기토는 언제나 과정/소송을 다시 시작하고, 거기에는 배신의 가능성이 언제나 따라 다닌다(이는 데카르트 이후에도 그러하다. 가령 흄도, 칸트도, 후설도, 사르트르나 라캉도 그러하다).
편집증적이고 기표적인 체제에서와 달리, 정염적이고 탈기표적인 체제에서 책은 정염의 신체, 성스런 것이 새겨진 대문자 책이 된다. 이 책에는 얼굴 대신 나팔과 음성이 말하고, 해석은 “최소한의 변화나 첨가, 논평조차 금지하는 순수한 문자암송 덕택에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 바그너, 말라르메, 조이스, 맑스, 프로이트는 또 다시 성서가 되었다.”(I, 135) 이것은 “책과 외부의 모든 관계를 절연해버리는 것으로 기표의 노래보다도 더 나쁜 것이다.”(I, 135)
3. 주체화 체제와 이중체
4. 기호체제의 혼성과 변환
*)
beyond님께 : 아시겠지만, 들뢰즈/가타리의 <천의 고원>은 어떤 지식이나 이론을 습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책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설명되어지는 것을 하나의 '지식'으로서 이해하고 습득하는 것 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 제가 요약하는 이 5장의 기호체제의 문제에서 굳이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그 어떤 것'을 요약하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님과 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남자'라는 생물학적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주체'인 셈이지요. 언표하는 주체일 수도 있고 언표를 행하는 언표행위의 주체일 수도 있지요. 이 주체를 가지고 5장 전체를 핵심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 남자화장실에 가면 다음과 같은 표어가 붙어 있습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이같은 표어를 접하고서 대한민국 남자는 지배적인 시선이 교차하는 한국이라는 지형에서 이 5장에서 설명하는 기호체제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 표어를 보고 생각에 잠기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자신의 의식 안에서 두 개의 주체가 포개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남자'라는 말은 이 문장의 언표 주체(주어)입니다. 그런데 그 표어를 보면서 나는 생각하게 됩니다. '맞아 나도 남자인데, 아무렇게나 흘려선 안 되지'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의식 안에서 행해지는 이 언표행위의 주체는 그 표어를 보는 '나'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남자=나'라는 등식에 이끌려 이 표어에서 문장의 주어에 나를 일치시키고, 그것을 통해 그 문장을 나에 관한 얘기로, 내가 당연히 해야 할 바라고 생각합니다. 이로써 언표행위의 주체인 '나'는 언표 주제인 '남자'와 포개지게 되고, 그것을 통해 그 언표에서 요구하는 '주체'가 되며, 그런 방식으로 그 언표에 예속화되게 되는 것이죠.
언표주체와 언표행위의 주체가 포개지면서 지배체제가 요구하는 규범이나 질서에 순응하게 되는 과정을 들뢰즈.가타리는 이 5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개인에게 부과되는 다양한 교육 형태나 '규범화' 형태는 그로 하여금 주체화의 점을 변경하도록 하며, 이 점은 언제나 좀더 고상하고 고귀하며, 상정된 이상에 좀더 적합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이 주체화의 점에서, 이 점에 의해 규정된 정신적 현실의 기능으로서 언표행위의 주체가 발원한다. 그리고 언표행위의 주체[그 말을 듣고 생각하는 나]로부터 이번에는 언표 주체['남자']가, 다시 말해 지배적인 현실에 부합하는 언표 안에 포착된 주체['남자'로서의 나]가 발원한다."(I, 137)
이처럼 두 개의 주체를 포개어 동일시하는 과정은 어떤 지배적인 지배질서가 요구하는 규범이나 규칙에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 메커니즘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죠. 내가 남자인 한, 저 표어에서 언표하는 사실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그것도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옳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결과로 말입니다. 이것은 법적인 규칙 전반에 대한 '나'의 복종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겠죠.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지배질서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주체화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탈기표적 기호체제, 주체적 기호체제의 출발점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고, 이것을 잡다하게 어렵고 잡학적인 지식을 동원하는 예들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이렇게 생각한다면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어려울 것도 없을 것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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