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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Note

12.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공준 4장-(3)

by 내오랜꿈 2009.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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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언어학의 외부 : 반음계주의적 언어학을 위하여 4장-(3)

1. 언어활동은(langage)은 정보적이고 소통적이다?

2. ‘외생적인’ 어떤 요소에 호소하지 않는, 언어라는 추상적 기계가 존재한다?



3. 언어를 동질적인 체계로 정의할 수 있게 해줄 보편성과 항상성이 존재한다?


언어학의 이 공준은 기존 언어학의 다른 측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학의 같은 면(보편성과 동질성, 항상성)을 취급한다는 측면에서 두 번째 공준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며, 굳이 나누어놓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굳이 차이점을 보자면 두 번째 공준에서 저자들은 공통성을 추출하려는 언어의 불충분한 추상기계를 비판하며 배치의 4가성의 관점에서 표현의 형식에서 내용과 표현의 다이어그램으로 기존의 언어학을 확장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세 번째 공준에서는 그러한 기존의 언어학이 그 보편성과 항상성으로 인해 과학성을 획득해 인문과학의 여러 방면에 응용되어가는 상황들, 그리고 그 상황이 ‘과학성’ 만으로 그치기 어려운 어떤 권력적 욕망을 표출하는 상황들이었음을 지적하며 적극적으로 그런 기존의 영토성에서 탈주해 소수어의 변이를 창조해내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화된 반음계주의’란 그러한 저자들의 적극적인 시도를 담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네 번째 공준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제시한 실천전략으로서의 ‘소수어’라는 관점으로 나아간다.


1)상수의 체계와 변수들의 체계


언어학과 불변성 : “구조적 불변성의 문제, 그리고 구조는 불변적인 것-그것이 원자적인 것이든 관계적인 것이든--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는 관념은 언어학에 본질적인 것이다.”(I, 97) 랑그/파롤의 구별, 언어능력/수행성의 구별. 소쉬르 보편언어학(일반언어학)의 구조적 불변성이나 촘스키의 보편적 언어능력과 이항적 수형도, 야콥슨, 트루베츠코이, 레비스트로스의 이항대립적 변별자질 등을 가리키는데 이는 과학적, 수학적 보편성에 대한 미련과 지향 때문일 수 있다.


촘스키와 라보프 : 들뢰즈/가타리는 기존의 언어학의 전형이라고 파악한 촘스키와, 소수어의 변이를 적극적으로 포착하고 있다고 평가한 라보프를 비교하며 비판의 단초를 제공한다. 표준적인 영어로부터 흑인들의 슬램언어로, 또 거기서 표준어로 18번이나 넘나드는 한 흑인청년의 예를 두고, 촘스키라면 그 두 가지 종류의 언어를 각각의 동질적인 체계로 간주하며, 그 두 체계의 공통점을 추출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라보프라면 그 두 가지 언어를 따로 분리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변해가는 그 언어들의 ‘내적 변이’를 부각시켜나갈 것이다.


문제는 하나의 언어 안에서 작용하는 이 계속적 변이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것. -->언어학의 추상기계가 불변적 상수가 아니라 가변적인 변인들과 변화 주위에서 구성되는 것은 불가능한가?


“동일한 하루 동안에도 개개인은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끊임없이 넘나든다.”(I, 99) 연인에게는 유아적 언어로, 강의실에선 교사의 언어로, 어릴 적 친구를 만나면 그 시절의 언어로, 술집에선 술자리의 언어로···. 이것을 통상적인 언어학자처럼 상수로의 환원을 통해 동일한 언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여기서 가변적인 것은 단순히 상황적인 것이 아니라 원리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변화가 체계적 단절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를 ‘수행성’이나 개별적 요인으로 환원하지 않고, 언어의 본질적인 것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언어학적 추상기계가 올바로 정의되는 것은 이러한 한에서다. 이러한 언어적 변화는 “체계적 단절보다는 차라리 주파수의 점진적 변용에 의해, 상이한 용법의 공존과 연속성에 의해 발생한다.”(I, 100) 이 변이의 연속체를 포착하는 언어학적 추상기계를 들뢰즈/가타리는 ‘반음계주의적 언어학’이라고 부른다.


2) 일반화된 반음계주의


어떻게 보면 상당히 낯선 개념이기도 한 ‘반음계주의’란 것은 사실 3장에서 제시된 개념들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어떤 의미를 표현할 때 필요하다면 원래 음계에는 없는 반음들을 사용하는 것이 반음계주의”이고(304쪽) “소리의 색깔이나 느낌, 어조 등을 바꾸기 위해, 혹은 다양한 종류의 음색과 어조 등을 만들기 위해 모든 주파수의 소리를 사용해 그에 필요한 음성적 뉘앙스를 만들어내는 방법이 ‘일반화된 반음계주의’”(305쪽)라는 것이다. 곧 언어를 기표와 음색, 어조 등등의 연속체로 정의하는 것, 연속적인 변이로서 언어활동을 포착하는 것을 들뢰즈/가타리는 ‘일반화돤 반음계주의’라고 명명한다. 결국, 언어학적 추상기계란 음고, 음색, 볼륨, 강세, 억양, 속도 등의 복합체인 소리 자체를 변이시킴으로써 뜻하는 바를 표현하는 방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eg.1)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음색 ‘변조’에 의해 악기화되는 음성.

eg.2) 베리오의 주파수변조의 예.


들뢰즈/가타리가 ‘일반화된 반음계주의’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의 언어학이 취급하는 기표들의 연쇄를 넘어서는 다양한 잉여들을 적극적으로 언어학에 끌어들이고, 그것들이 기존의 기표들의 연쇄망(체계)을 보충하는 체계 외부의 어떤 것이 아닌, 그 자체 적극적으로 언어 내부에서 언어를 구성하며 변이하는 그러한 언어학을 발명해야 된다는 것이다.


3)언어를 더듬거리게 하기


이러한 일반화된 반음계주의라는 개념은 이제 보편성과 공통성을 담지한 언어체계에 대한 공격지점으로써 ‘문체’를 들고 나온다. 우리는 흔히 ‘표준어’로 명명되는 정해진 문법체계를 중심에 두고 그 체계와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다양한 언어들을 ‘사투리, 방언, 특이한 문체’ 등으로 주변화하며 표준적인 문법체계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데, 들뢰즈/가타리는 사실 그러한 표준적인 문법체계야말로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어떤 것이 아닌, 하나의 ‘문체’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음을 환기시킨다. 문법조차 문체, 그것도 특정한 어법과 문체가 일반화하거나 보편화함으로써 성립된다는 것. 그러므로 “언어학에 의해서 세워진 모든 이원론 가운데 언어학과 문체론을 가르는 것보다 근거가 박약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I, 103).


다시 말하면, 문체가 언어로 되는 것이다. 언어란 다양한 문체 중 영향력 있게 %E산된 것이 일반홑8? 보편화된 것이다. 국어니 표준어니 하는 것들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고, 시니 소설이니 하는 문학 갈래도 그렇게 볼 수 있다. 이는 반대로, 언어를 변이시키는 중요한 공격지점이 문체라는 것을 말한다. 문체라는 하나의 변이선으로 새로운 표현형식, 새로운 언어를 창안해내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들뢰즈/가타리는 ‘언어를 더듬거리게 하기’라고 부른다. 이는 새로운 잉여성의 형식이다. --자신의 언어에서 ‘이방인-되기.’


모든 사람이 각각 이방인 되기? 소통은 가능한가? 나아가 모든 사람이 각자 스스로에 대해 이방인 되기? 분열의 가능성?


eg.1) 카프카의 경우.

eg.2) 김삿갓의 경우.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스무 나무 아래 서로운 나그네/ 망할놈의 집에서 쉰 밥을 먹는구나/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차라리 돌아가 설은 밥을 먹으리)

eg.3) 종결어미의 계보학 : ‘더라’에서 ‘이다, 하다’ 등의 종결어미가 일반화된 과정의 예. 김동인 등의 <창조> 동인. (언문일치 운동을 조건지운 근대적 언표행위의 배치와 그 안에서 변이의 지대로서 문체)


4. 다수적인, 혹은 표준적인 언어 아래서만 언어는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


표준적 언어라야 과학적 연구가 가능할 거라는 공준에 대해 표준어 자체가 근대적 역사적 특수성일 뿐임을 알려준다. 언어의 통일성은 무엇보다 정치적인 것이다.(eg. 훈민정음의 의도). 언어적 통일성을 형성하는 것은 정치적 권력이라는 것. 따라서 표준말은 권력의 지표가 된다, 다른 지방어에 대해/ 지방 사람에 대해.


1) 표준어, 혹은 언어의 권력


표준어라든가 문법이라는 것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지표다. 표준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표준어를 선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규범적인 개인으로선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사회적 법에 종속되기 위한 전제다. ... 언어의 통일성은 무엇보다 우선 정치적이다. 모국어는 없으며, 때로는 넓은 전면에 나섰다가 때로는 다양한 중심으로 동시에 달려드는, 지배적 언어를 통한 권력의 장악이 있다.”(I, 107)


2) 다수성과 소수성


다수어로서 표준어와 소수어로서 방언. 그러나 방언이 소수어를 정의하거나 분명히 해주는 건 아니다. 그 반대가 사실이다. 다수성은 항상적인 것의 권력에 의해, 후자는 변이능력에 의해 정의된다.


즉 다수적인 것은 항상적인 것, 척도의 위치를 차지한 것이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며, 그렇기에 권력을 확장할 통로를 다수 확보하여 다수성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수/소수는 수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다수자는 척도요 모델일 뿐이라는 점에서 분석적으로 포착하고자 한다면 아무도 아니다. 반대로 소수자는 사람들이 모델에서 벗어나는 한에서, 만인이 되는 것이다. 동질적이고 항상적인 체계로서 다수적인 것과 창조적이고 창조된 잠재적 생성으로서 서수적인 것. “모든 생성은 소수적이다.”(I, 112)


이러한 다수적 언어와 소수적 언어의 구별은 언어의 두 가지 종류가 아니라 언어의 두 가지 ‘용법’ 내지 ‘기능’이다.

eg.1) 카프카의 언어

eg.2) 통신언어 내지 중고등학생의 언어; 흑인 영어와 랩


3)명령어와 탈주선


하지만 우리는 실상 ‘다수어’를 정확하게 구사하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항상 언어는 무수한 개인들의 ‘발화’로 존재하는 것이며, 다수어는 하나의 분석적 규칙체계로써 개인들에게 부과되는 것으로 존재할 뿐, ‘결코 어떤 누구도 아니며, 언제나 아무도 아니다’. 소수어는 항상 다수어 속에서 ‘다수어’ 자체를 ‘더듬거리게’ 하는 것이며, 다수어 속에서 그러한 변이의 선을 타는 언어를 지칭하는 것이다. ‘다수어는 항상적인 것을 추출하는 것을 통해 성립되며, 소수어는 연속적인 변이화를 통해 성립된다’.


언표의 본질이 명령어라면, “문제는 명령-어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싸안고 있는 사형선고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고, 탈주의 능력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며, 탈주로 하여금 어떻게 상상적인 것에서 탈출하게 할 것인가 내지 검은 구멍에 빠지지 않게 할 것인가고, 명령-어의 혁명적 잠재력을 어떻게 유지하거나 살려낼 것인가”다(116).


곧 소수자의 언어는 명령어와 분리될 수는 없으나 좀 다른 것이다. 그것은 경고하는 외침이나 탈주의 메시지 같은 것이다. 죽음과 반대방향의 선, 죽음을 축소시키고 변이로 만드는 방법이다.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것(보르헤스의 소설 「죽지 않는 사람」에서 ‘만인-되기’를 실천하는 주인공), 변화의 문턱을 긍정하는 것, 현존하는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수없이 많은 이질적 삶의 형태를 긍정하는 것이다.


다수어의 명령은 항상 ‘하지 않으면 죽어’로 귀착되는 ‘선고’의 형식을 띤다. ‘(표준)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면 면접에 떨어질꺼야, 결혼을 하지 않으면 주변에서 이상한 눈초리로 볼꺼야’ 등등의 죽음의 선고는 우리로 하여금 안 굴러가는 혀를 굴리게 만들고, 싫은 맞선을 억지로 보게 만든다. 이렇게 다수어의 명령어 형식은 탈주선을 타려는 잠재적 소수자들을 하나의 표준적인 법칙(표준어에, 관습에, 경쟁에...) 따르기를 강요하며, 따르지 않으면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소수어로서의 명령은 선고의 형식을 창조의 형식으로 바꿔버린다. 혹은 선고 자체를 무시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친다. 따라서 같은 명령어라도 소수어의 명령어는 때론 새로운 종류의 삶을 꿈꾸는 혁명, 새로운 종류의 혁명을 꿈꾸는 ‘전사들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권력자의 언어는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우리가 다 똑같이 되기를 바라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타자입니다. 우리의 죄는 본래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많은 세계가 있을 수 있는 세계이고 하나이면서 다양할 수 있는 세계이다.” (마르코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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