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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Note

10.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공준 4장-(1)

by 내오랜꿈 2009.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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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언어학의 외부 : 반음계주의적 언어학을 위하여 (1)



앞 장의「도덕의 지질학」에서 제시된 개념들 가운데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에 대한 사유를 펼치면서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것의 질적인 구별’, ‘기계적 배치와 언표행위의 배치 간의 질적인 구별’에 관한 것을 다루었다. 이 장에서는 3장의 개념 가운데 표현의 형식 내지 언표행위의 배치에 관한 자신들의 사유를 표현형식으로서 언어에 대한 기존의 4가지 중요한 관념 내지 발상을 ‘언어학의 공준’이라는 이름으로 명제화하여 그것을 반박하는 방식을 취하여 펼치고 있다. 즉 “언어는 정보적이고 소통적이리라”는 관념에 대해 언어의 본질은 명령이라는 명제를, “외적인 요소에 기대지 않는 순수한 언어적 추상기계가 존재하리라”는 발상에 대해 언어는 외적인 요소를 내적인 것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명제를, “언어의 동질성을 정의하는 보편성과 항상성이 존재한다”는 명제에 대해서는 언어란 변인(變因)들의 체계라는 명제를, “언어 연구의 대상은 표준적이고 다수적인 언어”라는 관념에 대해서는표준어가 권력을 전제하며, 그에 반하는 소수적 언어가 오히려 일차적이고 중요하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들뢰즈/가타리의 명제들에 대해 우리의 몸과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언어학의 상식화된 관념들의 저항이 만만찮을 듯하다.


소쉬르나 라캉 계열의 언어학에서 언어의 보편적이고 항상적인 면에 주목하여 일관된 법칙을 찾으려했던 것과는 달리 들뢰즈/가타리는 언어의 가변성에 주목한다. 그것은 언어가 기본적으로 정보의 소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령을 담지한다는 그들의 주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명령어로서의 언어, 그것은 레닌의 슬로건(eg.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그들은 언어를 학문적 분석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언어학을 무슨 ‘유일한 인문과학’이라는 식으로 체계화하지도 않는다. 학문의 영역은 끊임없이 삶과 현실로 지평을 넓혀 나갈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골방에 틀어박혀 이 책 저 책 읽은 걸 자랑으로 여기는 부류들에게 이들이 제시하는 언어학의 새로운 명제들은 너무나 정치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어떤 면에선 들뢰즈/가타리를 ‘이해한다’는 말조차 사치이리라. ‘삶 그 자체’를 이해한다고 말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그들은 새로운 언어학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써의 언어를 이야기 한다.



1. 언어활동은(langage)은 정보적이고 소통적이다?


1) 언어활동의 본질 : 명령과 훈육


비트겐슈타인의 '원초적 언어'는 언어가 소통과 정보전달이라는 사실보단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활동을 하게 하는 '명령'에 가깝다는 사실을 드러낸다(eg. ‘벽돌!' 이란 말). 이는 언어(활동)을 매끈한 공론장에서 정보들의 합리적 소통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닌, 언어활동을 삶의 형식이나 활동, 실천의 문제로 보는 ‘화용론’의 관점에 가깝다. “단어의 의미는 그것의 용법이다.” (비트겐슈타인)


여기서 저자들의 새로운 공준이 나온다. “언어활동의 기초단위인 언표는 명령이다.” 여기서 언어활동의 기초단위를 ‘기표’(기호학)나 음소, 형태소라고 정의했던 다른 입장들과 차이를 보이는데,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에서 담론을 ‘담론적 사건들(효과를 수반한)의 집합’으로 정의한 것처럼, ‘효과를 겨냥한 기호들의 집합’으로 언표를 정의하며 사용한다. ==>이는 모든 것을 기의를 갖는 기표로 보는 기표의 제국주의적 시각(소쉬르, 바르트, 라캉 등)을 비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좀 더 나아가면 데리다까지).


“언어활동의 본질은 명령이다. 언어는 의미작용이나 정보의 전달, 의사소통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명령에 관계된 것이다.”(263쪽)


따라서 언어의 본질은, ‘기능하는 말들의 전달’이라는 점에서 간접화법이다. 즉 그것은 심지어 교사가 수학적 공식을 가르칠 때조차 “이렇게 계산하고 이렇게 사고하라”는 명령어를 전달하는 것이란 점에서 간접화법/간접담론이다.


2) 명령어


언표와 행동의 관계는 동일성이 아니라 잉여성의 관계다. “명령어의 잉여성이 일차적이며, 정보란 단지 명령어의 전달을 위한 최소조건이다.”(I, 85)


“추워”라는 말은 언표행위의 배치에 따라 “문 닫아”라는 명령어를, “썰렁하니 그만해”라는 명령어를, “안아줘”라는 명령어를 (암호처럼) 포함하고 있는데 이 경우 하고 싶은 실질적인 말은 “추워”라는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말해진다. 곧 ‘문 닫아라 !’라는 직접적인 명령보단, ‘추워’라는 말에 험악한 주파수와 공명을 첨가해 ‘문 닫아라’라는 명령을 간접적으로 전하는 방식(잉여성)으로 주로 말해진다고 저자들은 설명한다. 하지만 이때의 잉여성은 그 자체가 언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는 점에서, 정보이론의 잉여성(정보전달의 미비를 보충하기 위해 잉여적으로 첨가하는 정보)과 다르다.


여기서 잉여성은 ‘주파수’와 ‘공명’이라는 두 형식을 갖는다. 앞의 예에서 든 ‘추워’라는 말은 어떤 식으로(어떤 음고와 어조 등등으로) 발화하느냐에 따라 ‘문 닫아라’라는 강압적인 명령의 의미를 담을 수도 있고, ‘안아줘’라는 부드러운 애인의 명령의 의미를 담을 수도 있고, 또 ‘안아줘’라는 칭얼거리는 아이의 명령의 의미를 담을 수도 있다. 이때 이러한 하나의 언표에서 다양한 의미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는 어조나 음고 등등이 ‘주파수’이다.


그리고 특정한 주파수를 담은 언표가 내포한 명령을 ‘나’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동일시(주체화! 명령의 동조!) 하는 것을 저자들은 ‘공명’이라고 설명한다. 투명한 의사소통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통’이 실은 명령의 동조를 의미하는 ‘공명’일 뿐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의견이다. 정리하자면, 잉여성은 주파수와 공명이라는 두 형태를 갖는데, 전자는 정보의 의미화와 관계되고 후자는 소통의 주체화와 관계된다.


언표가 담고 있는 잉여성은, 그 자체는 비신체적이지만 신체적 변환을 요구하는 ‘순간’을 형성한다. 이때 신체적, 비신체적이란 말은 ‘실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언표 내지 연표행위는 그 자체론 비신체적이지만 신체적 상태에 개입하여 신체적 변환을 야기한다”(284쪽). 잉여성(명령)은 행동을 겨냥한다.


eg.) 형의 선고의 순간성과 형의 집행의 지속성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명령어/슬로건으로 “프롤레타리아적 조건이 신체로 주어지기 이전에 대중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추출하는 비신체적 변환”을 야기한 맑스(I, 88) ; 사회민주주의자와의 단절을 위해 또 하나의 비신체적 변환을 발명한 레닌의 언표행위(규약 문구를 둘러싼 투쟁의 의미). “진정한 직관은 문법성에 따른 판단이 아니라 언표행위의 내적인 변인들을 상황의 총체와 연관하여 평가하는 것이다.”(I, 89)


3) 화용론 : 말과 행동의 관계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언어활동에 대한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알려주거나 의사소통을 하는 방법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어를 방출하고 받아들이고 변환시키는 이 끔찍스런 능력을 정의”(I, 80)하고 분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언어활동은 삶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삶에 명령/질서를 준다.” 이런 점에서 “문법의 규칙은 통사적인 표지기 이전에 권력의 표지다.”(I, 81)


그런 점에서 언어활동을 행동이나 활동과 결부하여 파악하는 ‘화용론’은 이제 언어학의 중심에 자리 잡으며, 이는 ‘명령’과 ‘비신체의 신체적 변환’,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권력’을 필연적으로 다루게 된다는 점에서 ‘언어의 정치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eg.) “맹세합니다”라는 수행문은 관련된 행동의 조건(재판정, 밀애의 장소, 취조실 등)이 달라짐에 따라 다른 것이 되고(증인의 선서, 사랑의 고백, 진술의 진실성 등등), 행동의 진실성 내지 강렬도에 따라 그 수행성 내지 의미가 달라진다. “총동원을 선포한다”는 발화수반행위는 그에 수반되는 행동을 유효하게 해주는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의미를 상실한다.


언어활동을 행동이나 활동과 결부하여 파악하는 이러한 화용론을 통해 세 가지 결과가 도출.

① 동일한 코드를 통해서 만들어진 동일한 문장이라고 해도 그에 결합된 외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므로 언어는 코드가 될 수 없다. 말을 정보의 소통으로 생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② 화용론과 분리해서는 의미론이나 통사론, 음운론조차 정의할 수 없게 한다.

③ 랑그-파롤 간 구별이 유지될 수 없으며, 랑그의 의미와 통사법은 그것이 전제하는 발화에서 분리해선 생각할 수 없다. “주파수의 차이, 음고와 음색, 음량의 차이 등과 같은 파롤의 요소들이 말의 의미를 결정”하기 때문이다.(282쪽) 요컨대 화용론은 언어의 다른 모든 차원의 배후에 있는 전제조건이다.


cf.) 언어의 본질을 ‘명령어’의 전달로 보는 명제에서 새로이 제시하는 명제는 『철학적 탐구』에서 제시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과 매우 근접하며, 제시되는 예조차 그의 책을 떠올리게 한다. 두 번째 명제에서 제시되는, 언어에 내적인 언어의 외부는 한편으로는 랑그로 환원되지 않는 음성적 요인의 초선형성을 말할 때는 바흐친을 닮았고, 외부로서 기계적 배치에 관해 말할 때는 언어게임의 내재하는 외부로서 삶의 형식과 ‘언어의 용법’을 언급하는 비트겐슈타인을 닮았다. 세 번째 명제에서 보편성과 항상성에 대한 비판 역시 비트겐슈타인과 매우 유사한데, 예를 들어 보편적이고 항상적인 언어의 부재를 ‘언어게임’이라는 개념을 통해 명시하는 지점에서 그렇다. 이렇듯 바흐친과 달리 명시적인 인용은 없으나, 여기서 제시되는 ‘언어철학’은 비트겐슈타인이 전기의 자신을 포함하는 통념적 언어철학에 대해 수행한 비판과 그것을 가능케 한 새로운 언어 개념과 지극히 유사하다.



2. ‘외생적인’ 어떤 요소에 호소하지 않는, 언어라는 추상적 기계가 존재한다?

3. 언어를 동질적인 체계로 정의할 수 있게 해줄 보편성과 항상성이 존재한다?

4. 다수적인, 혹은 표준적인 언어 아래서만 언어는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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