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2) B.C. 587년, A.D. 70년 : 몇 가지 기호체제에 관하여
1.기호체제의 개념
2. 네 가지 기호체제
3. 주체화 체제와 이중체
1) 주체화 체제의 얼굴
언표행위의 주체의 얼굴돌리기와 배신으로 시작된 이러한 탈기표적 체제, 주체화의 체제는 탈주선을 그리기 시작하는 주체화의 점에서 시작한다. 배신, 얼굴돌리기는 그 점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탈주선 내지 탈영토화의 선은 모든 종류의 지층을 벗어나는 절대적 탈지층화로 나아가기보다는 다른 영토를 찾아 재영토화된다. 이것은 상대적 탈영토화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주체화는 다시 새로운 ‘큰 주체’에 예속되는 예속화로 귀착된다. 앞 절에서 예를 든 신의 호명과 모세의 대답에서 보이듯 그들의 마주보기는 호명하는 주체와 대답하는 주체가 호응하고 공명하며 서로 하나로 포개진다. 그들은 둘이지만 사실은 하나인 주체이다. 이것을 ‘이중체’라고 부르고 이런 주체가 구성되는 것을 이중화라고 한다. 이중화는 상이한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독신자적인 의식 안에서 진행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정염적인 커플의 이중체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2) 코기토의 의식적 이중체(주체화의 결합적인 축)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데카르트) ⇒ 여기서 앞의 나는 일차적으로 언표행위의 주체(정신적 실체로서 나)며, 언표됨으로써 언표주체(이 경우에도 정신적 실체다)가 된다. 뒤의 나는 언표주체(만약 존재하는 것이 신체적인 것이라면 신체적인 실체다)며, 결코 언표행위의 주체가 아니다. 하지만 동일한 언표주체는 겹쳐지면서 하나의 언표주체가 되고, 앞의 ‘나’에서 이미 발생한 겹침(포갬)을 통해 다시 언표행위의 주체에 가서 겹친다. 이 겹침을 통해 정신적 실체였던 ‘나’, 생각하는 나는 존재하는 나에 예속되고, 존재하는 나에 결부된 많은 다른 개념과 법칙들에 예속된다. 두 개의 주체를 포개는 이러한 코기토 식의 의식적 이중체는 어떤 지배적인 질서가 요구하는 규범이나 규칙에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 메커니즘을 형성한다. 근대적 법들은 원리상 모두 ‘내’가 입법자로서 제정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그에 따르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입법한 것을 스스로 따르는 것이 된다. “네가 지배적인 현실의 언표에 복종하면 할수록 너는 정신적 현실의 언표행위의 주체처럼 더욱더 명령하게 될 것이다.”(I, 137)
따라서 데카르트가 철학의 확고한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던 코기토의 주체는 확실해야 하는 나, 나의 의식인 나, 내가 갖고 있는 생각으로서의 나가 확실한 나, 생각하는 나를 끊임없이 배신하고 있다. “코기토는 언제나 과정/소송(proces)으로서 다시 시작하고 거기에는 배신의 가능성이 언제나 따라 다닌다.”(I, 136)
cf.) 이런 두 주체의 겹침과 포갬을 통해서 동일시의 메커니즘이 본격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 바로 언문일치 운동의 요체다. 그리고 그런 동일시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언표들의 체계로서 근대적인 문체 내지 문법이 탄생하게 된다.
3) 커플의 정염적 이중체
코기토적 이중체가 ‘나’와 다른 ‘나’가 포개지고 동일화되는 방식으로 이중화되었다면, 커플의 정염적 이중체는 남자와 여자, 의사와 환자처럼 상이한 주체가 공명하여 서로에게 이끌리고 빠져드는 방식으로 동일화가 발생. 분석가와 피분석자가 존재하는 정신분석이나 트리스탄-이졸데와 같은 정염적 사랑은 커플적인 형태의 이중화를 보여준다. 마주보는 두 명의 주체고, 정염에 의해 서로 끌려가면서 결합되고 포개지는 이중체이다.
“주체화의 선은 이중체(le Double, 분신)에 의해 완전히 점유되어 있지만, 두 종류의 이중체가 있듯이, 주체화의 선 역시 두 개의 형상을 갖는다.”(I, 139) “이중화된 의식에는 독신자적 측면이 있고, 의식이나 이성이 더 이상 필요없는 정염적 사랑에는 커플이 있는 것이다.”(I, 139) 그러나 이 양자는 이원적 분할의 선을 따르지 않는다. 즉 “코기토가 그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정염이듯이, 정염적 사랑은 두 사람의 코기토다.”(I, 139)
4) 두 가지 잉여성
⒜ 기표적 체제의 잉여성은 기호나 기호의 요소들에 영향을 미치는 객관적인 주파수 현상으로, (음고, 음색, 볼륨, 톤 등의 음향학적 특성) 기표의 최대주파수와 다른 기호와 관련된 기호의 비교주파수가 있다.
① 기표의 최대주파수에 상응하는 얼굴을 보여주는 뭉크의 <절규>
② 낮은 주파수의 소리는 높은 주파수의 소리에 대비되는 배경이 된다.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에서 배경으로 작용하는 것들의 주파수를 최소화하면 기호가 새겨지는 ‘벽’ 내지 ‘흰 벽’이 된다. 바로크 화가들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듯한 어둠”(램브란트)
⒝ 주체화 체제의 잉여성은 주관적 공명. 주체화 체제에는 주파수가 기재되는 벽이 없다. 왜냐하면 다양한 기표들을 향해 방사되는 중심의 기표나 다양한 의식들을 동일화하는 의식이 아니라 단지 코기토적인 이중체 안에서 진행되는 독신자의 자기의식 일 뿐이거나, 서로 마주보며 공명하는 커플의 코기토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면으로 그려진 얼굴 대신에 분신간의 끌어당김과 끌려감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기표가 기록되는 흰 벽 대신에 의식과 정염을 끌어당기며 그것을 공명시키는 검은 구멍이 존재한다.
"이런 공명의 잉여성 안에서 의식의 절대성은" 정염의 이끌림에 대해 무력하다는 점에서 "무능력의 절대성이고, 정염의 강렬도는" 맹목적이며, 검은 구멍에 빠져버린다는 점에서 "텅 빈 열기다."(I, 141) 주체화는 의미화 만큼이나 지층적이다.
5) 탈지층화의 선
기표적인 체제와 주체적 체제를 구별하는 데 잉여성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탈영토화이다. 기표화 하는 의미화 체제는 나쁘고, 탈기표화하는 주체화 체제는 좋은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주체화 체제에서 탈영토화의 양상이 의미화 체제와는 달리 긍정적이고 절대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거꾸로 커플의 자폐증이라는 커플의 검은 구멍을 만들 위험이 있고, 그런 식으로 탈주선이 죽음의 선을 그리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주체화는, 다른 하나의 과정이 다시 시작하기 전에 이미 하나의 과정이 끝나버리는 식의, 본질적으로 완료된 선형적 과정을 이룬다. 이처럼 코기토는 항상 다시 시작하고, 정염과 요구도 언제나 재반복된다. 검은 구멍에 이끌려 각각의 의식은 자신에 고유한 죽음을 추구하고, 각각의 사랑-정염은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추구하며, 모든 검은 구멍이 함께 공명한다. 거기서 주체화는 탈주선에 끊임없이 그것을 재부정하는 선분성을 부과하며, 끊임없이 차단하고 방향을 돌리게 하는 폐지의 점을 절대적 탈영토화에 부과한다.”(I, 141)
주체화 또한 지층 안에 있다. 우리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고 있다. 그런데 ‘나’라는 주체화의 점에서 시작한 탈주선은 모든 세계를 향해 확장되며, 모든 세계를 담을 수 있는 것이 된다. 혹은 ‘나’를 정해진 언표 주체와 포개기보다는 차라리 부재하는 언표 주체를 창안하는 것. 아마도 그것이 주체화 체제에서 탈주선이 절대적 긍정성을 획득하는 지점일 것이다. “의식을 삶의 실험으로 만들고, 정염을 연속적 강렬도의 장으로, 기호-입자의 방사로 만들라. 의식과 사람의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들라. 주체화를 폐기하기 위해 의식과 사랑을 이용하라. … 동물-되기를 위하여 ‘나는 생각한다’를 이용하고 남성의 여성되기를 위해 사랑을 이용하라. 의식과 사랑을 탈주체화하라.”(I, 142)
cf.) 의식과 사랑의 탈주체화란 모든 타자를 향해 열린 의식, 모든 타자들을 향해 이끌리는 ‘정염’? 어떤 대상이나 짝에 머물지 않는, 사랑과 의식의 형태로 열리는 것인 한 모든 대상, 모든 짝을 향해 열리는 탈영토화된 의식과 사랑. 어쩌면 ‘주체도 대상도 없는 사랑?’ ‘나’라는 의식이 무의미해지고(無我?) 의식, 짝을 향한 사랑이 무의미해지는(無執?) 사랑? 이른바 ‘만인-되기.’ 현실에서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4. 기호체제의 혼성과 변환
1) 기호체제의 혼성성
대부분의 기호체제는 순수하고 단일하지 않으며, 대개는 둘 이상 섞여서 이뤄진 혼성적 체제이다. 혼성의 과정에서 혹은 다른 배치 속에 어떤 기호체제가 도입될 때, 하나의 기호체제는 다른 기호체제로 변환되기도 한다. 각각의 기호계는 하나, 또는 다른 많은 파편들을 강제로 포획한다. 따라서 기표적 기호계에 일반성 내지 보편성이라는 형태로 특권을 부여할 수 없다.
“모든 기호계는 혼성적이며, 오직 그렇게만 기능한다. 각각의 기호계는 하나 내지는 다른 많은 파편들을 강제로 포획한다(코드의 잉여가치).”(I, 143)
eg.) 히브리인들의 기호체제 : 기표적인 기호들로서 십계와 기타 규칙들, 모세의 반기표적인 번호적 조직들, 탈주선에서 시작하며 배신과 얼굴 돌리기, 그리고 호명에 의한 포개기를 반복하는 기호들 등의 혼성적인 체제.
2) 기호계의 변환/번역 가능성, 혹은 변환의 유형들
하나의 기호계는 다른 기호계로 번역되거나 변환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환은 단순한 일대일 대응의 번역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계를 다른 기호계로 변형시키는 일이고 그것은 창조의 선을 포함하고 있다.
①유비적 변환 : 어떤 기호계를 전-기표적 체제로 옮겨놓는 것.
eg.) 무용극 <백조의 호수>에서 차이코프스키는 문학적인 기표적인 기호들을 신체의 동작이라는 전기표적 기호들로 변환시킨다. ; 혹은 "주자가례"를 통해 유교의 교리를 구성하는 기호들의 기표적 체제는 ‘예’라고 총칭되는 특정하게 코드화된 신체적 동작으로, 전기표적 체제로 변환된다. ; 뉴기니 시안족에 백인들이 화폐를 도입했을 때, 그들은 지폐와 동전을 서로 교환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바꾸어버린다.
② 상징적 변환 : 어떤 기호계를 기표적 체제로 옮겨놓는 것.
eg.) 17세기 궁정 사회의 매너는, 가령 의자를 빼는 동작, 식기를 움직이는 동작, 치마를 걷으며 앉는 동작 등의 전기표적인 동작들을 세련됨 내지 품격의 기표로, 계급의 기표로 변환시킨다(이 점에서 유교의 예와 정반대의 변환을 보여준다). ; 정신분석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동작이나 행동을 성욕과 남근 등에 관련된 의미로 해석될 징후로, 기표로 변환시킨다.
③ 논쟁적 내지 전략적 변환 : 어떤 기호계를 반기표적 체제로 옮겨놓는 것.
eg.) 정보원들이 사용하는 암호나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암호들. 80년대 운동권들의 용어. ; 한편 음악이나 미술작품을 디지털화하는 것은 색조나 소리라는 전기표적 기호들을 반기표적 기호로 변환시킨다.
④ 의식적 내지 의태적 변환 : 어떤 기호계를 탈기표적 체제로 옮겨놓는 것.
eg.) 백인들의 노래는 흑인 노예들을 거치면서 흑인영가로, 블루스로, 재즈로 변형된다. ; 다다이스트들은 기성의 오브제들을 다른 이름을 붙여 다른 공간에 놓음으로써 다른 오브제로 바꾸어 버린다(뒤샹의 변기). ; 평론, 예컨대 지라르의 도스토예프스키론이나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에 대한 평론은 원작자의 작품을 탈영토화하여 다른 작품으로 변형시킨다.
⑤ 다이어그램적 변환 : 어떤 기호계를 절대적이고 긍정적인 탈영토화가 이루어지는 일관성의 구도 위로 폭발시키는 것.
eg.) 선사들의 화두는, 혹은 ‘방할’은 불교의 교리라는 기표적인 기호체제를 기호들이 통하지 않는(不立文字, 혹은 “알음알이가 끊기는”), 그렇다고 전기표적인 동작의 집합도 아니고, 반기표적인 변형도 아닌, 표현형식 자체가 소멸되는 지점으로 급전직하시킨다. 즉 어떤 표현형식의 지층에서부터도 탈영토화된, 절대적이고 긍정적인 일관성의 구도로 폭발시킨다.
3) 기호계의 성분들
① 발생적 성분 : 기호체제의 개념은 혼성적 체제를 구성하는 일종의 발생적 요소들이다. “다양한 추상적 체제들이 어떻게 구체적이고 혼성적인 기호계를 이루는지, 또 그것은 어떤 변수와 더불어 그러하며, 그것들은 어떻게 결합되는지, 거기서 지배적인 것은 또 무엇인지를 보여준다.”(I, 147)
eg.) 천도교의 담론을 구성하는 기호체제에서 도교적 요소, 불교적 요소, 유교적 요소, 기독교적 요소 등이 어떻게 차용되었으며, 어떻게 다른 것과 섞이는지, 여기서 지배적인 것은 무엇인지 등에 관한 분석이 있을 수 있다. ; 근대 한국어문법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과 그것을 하나의 체계로 만드는 지배적 요소와, 그러한 체계라 구성되는 양상 등등.
② 변환적 성분 : 하나의 기호계가 어떻게 다른 기호계로 변하는지, 어떻게 해서 변이가 발생하는지를 설명하는 요소. “이는 기호체제들이 어떻게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변하는지, 더우기 새로운 것을 창출하면서 그러는지를 보여준다. ··· 혼성적 기호계가 반드시 적극적인 창조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진정한 변환없이 결합의 가능성에 만족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호계가 어떤 순간 어떤 영역에 끼어들때, 그 체제의 독창성만큼이나 혼성의 새로움을 고려해 주는 것은 바로 변환적 성분이다.”(I, 147)
eg.) 볼셰비키적인 유형의 언표들이 언제 나타났으며 레닌주의가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질문할 수 있으며, 사회민주주의와 단절한 때에 진정한 변환이 나타난다고, 그것이 불가피하게 스탈린적 조직의 혼성적 기호계로 전락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인 기호계가 창조된다고 대답할 수 있다.
③ 다이어그램적 성분 : 다이어그램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기호지만 이미 기호적 형식화에서 벗어난 기호란 점에서 그 자체로는 표현도 아니지만, 또한 그것이 물리적 내지 신체적 내용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용도 아니지만, 표현의 층위는 물론 내용의 층위에서도 작동하는 힘과 변화의 양상을 표시하는 표현이다. “더 이상 형식화되지 않는, 하나를 다른 하나에 결합할 수 있는 비형식적 특질을 갖는 기호-입자를 추출하기 위해 기호체제나 표현 형식을 포착하는 것”(I, 153). 이는 추상기계를 찾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추상기계 그 자체는 기호계보다 결코 더 물리적이거나 신체적이지 않다. 그것은 다이어그램적이다.
eg.) 기독교와 불교는 다를지 몰라도, 예수와 석가는 다르지 않다. 예수와 석가는 다를지 몰라도 그들이 본 절대세계는 다르지 않다. 여기서 기독교와 불교는 나름의 표현형식(기호체제)과 내용형식(기계적 배치)을 갖는 지층이라면, 예수와 석가는 그 안에서 삶의 흐름에 특정한 강렬도와 방향을 부여한 일종의 추상기계다. 예수-기계, 석가-기계. 그들이 제시한 다이어그램은 분명히 다르다. 가령 하나는 사랑을 통해서 다양한 삶의 흐름을 방향 짓는다면, 다른 하나는 애증을 떠난 중도를 통해 그렇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이 다이어그램들은 각각 실재적인 추상이다). 이 상이한 추상기계는 하나의 동일한 ‘일관성의 구도’에 이른다. 절대적 세계가 그것이다. “가장 탈영토화된 것은 다른 문턱을, 즉 각각의 탈영토화를 하나의 공통된 가속화로 통접할 수 있게 해주는 다른 문턱을 넘어선다. 그것은 추상기계의 긍정적이고 절대적인 탈영토화다.”(I, 149-150)
④ 기계적 성분 : 추상기계가 일관성의 구도와 지층에 양다리를 걸치고 이중의 운동을 하는데, 하나는 추상기계가 지층들을 가공하고 끊임없이 어떤 것을 그로부터 탈주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추상기계가 지층에 의해 실질적으로 지층화되고 포획되는 것이다. 이는 추상기계가 구체적 배치를 통해서 작동한다는 점, 그런 만큼 지층 안에 있다는 점으로 인한 것이다. 한편 지층들은 다이어그램의 소재와 기능을 포획하지 않고서는 조직되지 않으며, 이것을 표현과 내용이라는 이중의 관점에서 형식화한다. 그러므로 추상기계란 구체적 배치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추상기계와 결부된 기계적 배치가 기계적 성분인 것이다.
==>이 네 가지 성분이 화용론적 분석의 네 차원을 이룬다. 이 각각은 발아하여 리좀적인 방식으로 뻗어나가지만, 그것을 하나의 원을 그리는 순환적 성분으로 표시할 수 있다. “발생적 성분 안에서 혼성적 기호계의 사본을 만드는 것, 그 사본 위에서 번역, 창조, 발아의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체제의 변환적 지도를 만드는 것, 각각의 경우마다 잠재하거나 실질적으로 출현하는 바 추상기계들을 작동시키는 다이어그램을 만드는 것, 모든 것을 분배하고 운동을 순환시키는 배치들의 프로그램을 그 대안과 비약, 변이와 더불어 만드는 것.”(I, 154)
cf.) 다이어그램화와 공리계화 : 이 양자의 작동을 혼동해선 안 된다. 공리계화 한다는 것은 다양한 명제들을 그 근거가 되는 어떤 공리들로 환원할 수 있는 체계를 세우는 것이고, 최소한의 조건으로 명제들 전체를 형식화하는 것이다. 반면 다이어그램화 한다는 것은 그런 형식적 특성을 넘어서 만들어지는 소리의 양상이나 흐름의 양상을 추상하여 포착하는 것이다(베토벤-기계). 결국, 추상기계는 일관성의 구도로 갈 수도, 지층화로 갈 수도 있는 이중의 운동.
※ 번역의 문제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천의 고원』 번역본은 두 가지이다. 프랑스 미누 출판사로부터 판권계약을 맺은 새물결출판사의 김재인 번역본과 연구공간 ‘너머+수유’의 번역본이 그것이다. 현재 새물결출판사본이 합법적으로 시판되고 있지만, ‘너머+수유’의 번역본도 엄청나게 퍼져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천의 고원』에 관계된 연구서나 논문들은 대부분 ‘너머+수유’의 연구원들이 선점하고 있는지라 인용되는 번역본은 대부분 후자의 번역본 페이지이다.
두 개의 번역본을 비교해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상당히 다른데 읽다 보면 전혀 다른 책을 읽는 느낌이 들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내용이 전혀 다르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일(문체)이 다르기에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만 몇 가지 개념의 번역에서는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데, 제5장에서 심각하게 대두된다.
① 먼저 ‘탈주’라는 이제는 어느 정도 일반화된 개념의 문제
93,4년경, 이진경씨를 필두로 한 ‘서사연’ 멤버들에 의해 발언권을 얻은 ‘탈주’라는 용어는 이제 웬만한 철학관련 논문들에서 그 생존권을 보장받고 있다. 그런데 김재인 번역본에서는 ‘의도적으로’ 탈주라는 용어 대신 ‘도주’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이는 일본의 번역서들이 주로 쓰고 있는 용어라고 하는데, 그 어감 등을 고려할 때 너무 ‘정치적인’ 고려를 내세운 ‘아집’이 아닌가 보여진다.
② fréquence : 주파수’ 또는‘ 빈도’라는 문제설정
fréquence 의 번역을 두고 ‘너머+수유’ 번역본은 주파수라는 용어를, 김재인은 빈도라는 용어를 선택하고 있다. 통상적인 번역에서야 fréquence를 빈도로 번역하는 게 일반적이겠으나 이 책에서는 fréquence의 용도가 발화된 언어의 음고와 음색, 볼륨, 톤 등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에 목소리(=음향)의 주파수 현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예를 들어 “야!”라고 누구를 부르는데 있어 높은 주파수의 톤으로 부르느냐, 낮은 주파수의 톤으로 부르느냐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맞지, 높은 빈도로 부르느냐 낮은 빈도로 부르느냐는 식으로 이해한다는 건 영 어색한 것일 테니까.
③ ‘일관성의 구도’ 내지 ‘고른 판’
plan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의 문제다. 김재인과 박기순(『스피노자의 철학』-민음사판 번역자)은 ‘판’으로 이진경과 이정우는 ‘구도’로 번역하고 있다. 김재인도 ‘판’으로 번역하는 게 옳다는 근거를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언급한 들뢰즈의 말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철학』을 잘 알고 있을 이진경 씨와 이정우 교수는 왜 ‘구도’로 번역할까? 그건 해당 페이지에서 책을 읽어 보면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지만, 단순한 평면을 뜻하는 ‘고른 판’으로 번역하기에는 『천의 고원』의 설명들이 너무나 구상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여러 곳에서 비교해 보았는데, 어떤 곳에서는 단순한 평면을 뜻하는 ‘고른 판’이 어울리고 어떤 곳에서는 정신적 구상의 계획을 뜻하는 ‘일관성의 구도’가 어울리는 것 같다. 일단 여기서는 ‘일관성의 구도’로 통일한다.
2004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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