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몇 년 만에 서울을 다녀왔다. 시골에 들어온 뒤로 해마다 한두 번은 꼭 우리 집에 들리던 친구가 있는데, 이런저런 일로 바쁜 그 친구 부부를 대신해 우리 부부가 올라간 것이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오롯이 놀기 위한 목적으로. 뭐 논다고 해봐야 친구 집에서 이틀 동안 술 마시고 이야기하다가 온 게 전부다. 특별한 것이라곤 점심을 웬만한 중소기업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으로 추정되는 집에서 13,000원짜리 곰탕을 먹고 봉은사 경내를 산책했다는 것, 술에 취해 못 일어나는 남자들을 놔두고 여자들끼리 조조할인 <국제시장>을 보고 와서 씹어댄 것 정도다.
술 덕분에 아침까지 곯아떨어지지 않았더라도 보러갈 영화가 <국제시장>이었다면 난 아마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한 달 전부터 <영화가 좋다> 같은 각종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지겹도록 반복하는 통에 마치 영화를 이미 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인데다 보고온 지인들의 평은 한결 같이 '비추'라는 신호를 보내오던 터이기 때문이다. 굳이 봐야 한다면 케이블 TV에 돌고돌 때 봐도 늦지 않을, 돈 주고 극장에서 볼 영화는 아니라는 판단을 내려버린 터다.
▲ 이미지 출처=아이엠피터 블로그
그런데 나의 이런 다짐과는 상관없이 <국제시장>은 여러 방면에서 내 주변을 계속 맴돈다. 어제는 파란 집에 사는 어떤 여자가 <국제시장>을 언급하면서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나오니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걸 언급하며 나라사랑의 바로미터로 이해한 나머지 애국심을 강조했다고 하더니 오늘은 모 정당에서 <국제시장>을 보며 종무식을 겸한다는 소리도 나온다. '종북'이라는 단어 하나로 2014년을 휘젓고 다니더니 2015년은 '애국'이라는 단어로 컨셉을 정할 모양이다. 설마!!?
백 번 양보해서 <국제시장>이 '아버지 세대의 희생과 땀으로 이루어진 대한민국'을 찬양한 것이고 여기에 열광하고 공감하는 건 각자의 몫으로 인정한다고 치자. 그런데 부부싸움 하다가 애국가 나온다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나라라면 그게 과연 제대로 된 나라일까? 푸코식으로 이해하자면 '생체권력'적 통제 메카니즘이 작동하는 사회라 할 수 있을 정도다. 그걸 보고 애국심을 연상하는 사람의 머리 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 있을까? 그 '어떤 여자'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
이래저래 2014년은 악몽으로 시작해 악몽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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