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0,000년: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3장-(3)
1. 지층화와 이중분절
2. 지층과 추상기계
3. 내용과 표현: 구별의 유형들
1)구별의 본성에 관한 질문
“내용과 표현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지층에서 다른 하나의 지층으로 옮겨갈 때 변하는 것은 무엇인가?”(I, 64) --> “한 지층에서 다른 지층으로 이행할 때 변하는 것은 이 실재적 구별의 본성, 그리고 구별된 항들 각각의 위치다.”(I, 64)
-->내용/표현의 구별 자체가 가변적이라는 것. 지층의 이행에 따라 때론 이 구별은 분자적/몰적이라는 규모 내지 크기의 차이가 되기도 하고, 사물이 통과하는 다양한 상태들의 차이, 형식적 이성들 간의 차이, 하나의 형식을 띤 사물과 그것의 변용물 간의 차이 등을 갖게 되고, 그에 따라 지층 위에서 내용과 표현의 분배가 달라진다.
2)실제적 구별의 세 가지 유형
① 크기들 질서 간의 실재적-형식적 구별 : 분자적인 것과 몰적인 것의 구별. “분자적인 최소단위에서 이루어지는 분절과, 그것의 몰적인 집합에서 이루어지는 분절은, 음소와 형태소의 경우처럼 ‘크기’에서 구별되거나, 선별과 배열의 ‘질서’에서 구별되지만, 사실은 하나의 동일한 지층 안에서 발생한 구별.” (226~227쪽) 물론 이 양자 사이에는 수많은 매개적 상태들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지질학적, 결정체적, 물리화학적 지층 등에 해당된다.
eg.) 평균율화된 음악적 소리와 화성적인 소리는 조성이라는 단일한 지층을 구성한다.
② 서로 다른 주체들 간의 실재적-실재적 구별 : 표현이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으로, 자율성을 획득하는 경우. 즉 형식적 구별을 넘어서 서로 다른 독립적 지층을 형성. 이는 주로 유기체적 지층에 해당된다. 형식적이지 아니라 실재적인 이 구별은 크기의 질서로부터 독립하여 분자적인 것을 관통한다.
eg.) 핵산과 단백질의 관계 : 핵산은 유전정보를 갖고 단백질을 합성하는 기능을 하지만 단백질의 분자적 구성요소가 아니다. 단백질의 분자적 구성단위는 아미노산이어서 단백질을 이루는 실체이다. 즉 여기서는 단백질이 내용의 형식이고, 아미노산이 내용의 실체를 이룬다. 핵산이라는 표현의 형식의 실체를 이루는 것은 뉴클레오티드이다. 즉, 핵산과 단백질은 표현과 내용의 관계를 이루지만, 각각 별개의 지층을 이루고 있으며, 표현은 내용에서 독립성을 획득하고 있는 ‘실재적-실재적 구별’이다. 이러한 구별은 변환을 위해서는 일대일 대응이 되어야한다. (핵산-아미노산-단백질)
③ 서로 다른 속성들 내지 범주들 간의 실재적-본질적 구별 : 이는 두 개의 층위가 본질적으로 다른 지층을 형성하는 경우의 구별로서,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것의 구별로서 저자들이 말하는 기계적인 것과 언표적인 것의 구별이 여기서 탄생한다. 그러나 이 양자 모두 독립적 실존을 가지며 독립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모두 기계들이다. “내용은 손과 도구가 아니라 그것들에 앞서 존재하는, 힘의 상태 내지 능력형성체를 구성하는 기술적 사회적 기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표현은 단순히 얼굴과 언어활동, 언어가 아니라 그것들에 앞서 존재하며 기호체제를 구성하는 집합적 기호기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I, 69) 이후 이 책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는 기계에 대한 분석은 주로 이러한 세 번째 지층의 차원에서 행해진다.
eg.) 손-도구(내용)와 얼굴-언어(표현). 먹는 기계로서의 입은 신체적, 기계적인 내용의 층위이지만 말하는 기계인 입은 비신체적이고 언표적인 표현의 층위이다. 마찬가지로 신체로부터 탈영토화된 얼굴은 감정을 신체적인 것과 연관되든 연관되지 않든 간에 표현하기에 머리와 달리 비신체적인 것이다. 이렇듯 내용과 표현은 상응성이 사라져서 표현은 선형적(일대일 대응)인 것에서 나오지 않고, 초선형적인 것에서 나올 수 있다.
4. 내용과 표현의 관계
“내용과 표현 간의 관계는 정확히 어떤 것이며, 그것들 간에는 어떤 유형의 구별이 존재하는가?”(I, 70)
1) 내용과 표현은 말과 사물, 기표와 기의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 ‘언어의 제국주의’(소쉬르, 바르트)에 대한 비판
기표의 제국주의, 기호학(sémiologie)에 대한 비판. “모든 지층에 공통적인 기호체제는 없다.” 그렇다면 언제 기호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표현의 형식과 내용의 형식 간에 실재적일 뿐만 아니라 범주적인 구별이 있을 때”다. 앞서 말한 세 번째 지층이 그것이다. 이는 그 때 비로소 “추상기계가 ‘글쓰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정립된 위치를 정확히 취하기 때문이다.”(I, 71)
“기표의 애호가는 말과 사물이라는 과잉단순화된 상황을 암묵적 모델로 삼는다. 그들은 말로부터 기표를 추출하고, 말과 일치하는 기의를 사물로부터 추출한다.”(I, 72) 문제는 감옥에 대한 푸코의 분석이 보여주듯이, 내용의 형식은 하나의 사물로 환원되지 않으며, 표현 역시 기표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말과 사물이 아니라 표현이라는 담론적 다양체와 내용이라는 비담론적 다양체가 있는 것이다. 이는 “내용을 기의로 환원시키고, 표현을 기표로 환원시키는 것”(I, 72)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양자가 일치하는 일은 결코 없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나오는 제4장 "언어학의 기본전제들"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2)내용과 표현은 하부구조/상부구조, 혹은 그것의 철학적 번역으로서 ‘내용/형식’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 하부구조/상부구조의 관계에 대한 비판
여러 이론들에서 일반적으로 내용은 형식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우위성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일정한 상응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맑스주의자로 자처함에도 맑스주의 이론에서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내용이 형식을 규정한다는 도식을 비판한다. 첫째 이유는 내용과 형식의 관계에서 형식은 내용의 형식만을 다루는 것이므로, 내용과 구별되는 형식을 말하려면 ‘표현’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내용 형식의 관계에서는 내용의 우위성과 서로간의 상응성이 있지만 내용과 표현 사이에서는 표현 또한 스스로의 형식을 가지므로 서로 간에 우위성이나 상응성을 적용시킬 수 없다.(243~244쪽)
eg.) 보르헤스, 「피에르 메나르, 돈 키호테의 저자」 --> 내용이 같더라도 전혀 다른 표현형식으로 쓰여진 글이나 표현이 같더라도 그 내용이 아주 달라진 경우
여기서 보르헤스는 먼저 동일한 기표(글자 하나 안 틀리는 동일한 문장들)가 전혀 다른 표현일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예컨대 세르반테스와 달리 메나르는 고어투의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표현은 기표로 환원되지 않는다. 여기서 보르헤스는 소설책의 지층에 결합된 환경의 차이, 병렬지층의 차이를 상기시키고 있는 셈이다. 다음으로, 그렇다면 동일한 기표들의 집합인 저 두 글은 동일한 내용을 갖는 것인가? 보르헤스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 외부에 대해, 결합된 환경에 대해 전혀 다르게 작용하고 작동하는 다른 기계고,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cf.) 보르헤스의 ‘환상적 현실주의’ : 없는 사람의 책을 인용하거나, 있는 사람의 없는 책을 인용하기도 하고, 없는 사람을 있는 사람의 작품에 끌어넣기도 하는 식의 표현형식을 통해서 그는 허구를 현실화한다. 이러한 허구의 현실화는 역으로 현실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보여주는 역설적인 방식이다.
3)내용과 표현, 혹은 지층 간에 완성의 정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배열되는 진화적 도식을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진화적인 도식, 발전단계에 대한 비판
내용과 표현은 완성의 정도에 따라서 단계적으로 배열할 수 없다. 질료의 흐름을 특정한 양상으로 서로 다르게 절단하고 채취하는 기계들일 뿐이다.
“내용과 표현의 서로 다른 형상들은 단계가 아니다. ··· 고정된 질서는 없으며, 한 지층은 다른 지층에 직접적으로 하부지층으로 복무할 수 있다. ··· 어떤 지층이 다른 어떤 지층과 소통할 것인지, 혹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사전에 알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어느 곳에나 동일한 기계권만이 있을 뿐이다.” (I, 75)
5. 지층과 배치, 추상기계
1) 지층과 배치
우리는 종종 어떤 지층을 동일성에 의해서 포착하지만 그것은 동일성이라는 표상 아래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이때 분절방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지층의 변이 능력(기계가 되는 것)에 접근하는 방법은 상이한 지층들과의 관계 속에서다. 상이한 지층들과의 계열화를 통해서 즉, 상이한 지층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연결을 위한 상응성(대응)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배치’이다. 이 배치는 지층들 사이에서 정의되므로 ‘간-지층’이라고도 불린다.
“기계적 배치는 한 지층 위에서 내용과 표현의 상호적응을 수행하고, 내용의 선분들과 표현의 선분들 간에 일대일 대응관계들을 보장하며, 지층이 수직지층들과 병렬지층들로 분할되도록 유도한다. 지층들 간에서 그것은 하부지층으로 복무하는 것들과의 관계를 보장하며, 이에 상응하는 조직상의 변화들을 유발한다.” (I, 77)
eg.)연주를 하는 데 있어 ‘악기-손-악보’라는 세 지층의 일대일 대응관계.
2) 배치와 추상기계의 관계
배치와 추상기계의 구별 : 추상기계를 우리가 구체적인 기계적 배치라고 부르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배치는 탈영토화의 첨점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영토화하는 성분 또한 가지고 있다. 배치가 작동시키는 탈영토화는 그 자체로는 항상 상대적 탈영토화에 머물 뿐이지만, 추상기계의 탈영토화는 모든 지층에서 탈분절화하고 탈지층화하는 것이고, 본질적으로 절대적 탈영토화를 향해 나아간다.
“배치는 힘의 상태와 기호 체제의 관계가 교차하는 데 필수적이다. 배치는 성분의 통일성이 지층 속에, 한 지층과 다른 지층 간의 관계 속에, 그리고 이 지층들과 일관성의 구도 간의 관계 속에 감싸여지는 데 필수적이다. 일관성의 구도 위에서 전개되거나 지층에 감싸여지는 한, 모든 면에서 기계적 배치들은 추상기계를 실행시킨다.” (I, 77)
일관성의 구도는 탈지층화하는 추상기계와 잇닿아 있다. 추상기계가 추상하고, 탈지층화하여 일관성의 구도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아간 추상기계는 이미 탈지층화된 것이기 때문에 메타지층이라기보다는 지층 사이에 있으면서 지층화의 양상을 변하게 하는 배치이다. 배치는 이미 추상기계를 작동시키고 있지만, 추상기계가 배치인 것은 아니다. 추상기계는 본질적으로 절대적 탈영토화, 일관성의 구도로 나아가는 것인데 반해 배치는 탈영토화 뿐만 아니라 영토화하는 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배치는 어떻게 추상기계를 실행시키며, 어떻게 적절성을 만들어내는가?” (I, 77)
배치와 추상기계가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배치들을 분류하면서 그것을 통해 작동하는 추상기계를 찾아내는 것, 그리고 일관성의 구도로 이어지는 선을 그리는 것. 이것이 모든 고원에서 저자들이 하려고 하는 것이다(그리고 새로이 추가된 개념들은 각각 독립된 장을 차지하여 설명되기도 하고 여러 장에 걸쳐 새로운 의미를 추가하는 형태로 설명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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