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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Note

7. 기원전 10,000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 3장(1)

by 내오랜꿈 2009.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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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이중분절, 혹은 지질학적 역사유물론 (1)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제3장은 『천의 고원』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개념들의 ‘정의’와 ‘공리’들이 제시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이 제시되는 방식은 기하학적인 위계성과 체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저자들이 이후에 반복적으로 사용할 중요 개념들의 연결과 관계들을 보여주는 다이어그램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저자들이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이란 개념을 창조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했듯이 여기서 제시되는 정의는 사실 이 책에서 펼쳐지는 사유의 전개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이런 이유에서 이 책의 결론은 이 고원에서 정의된 개념들의 새로운 설명으로 끝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모든 개념을 이해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explication)이란 주름(pli)을 펼치는(ex-pliquer) 것이기에, 펼쳐질 어떤 것이 처음부터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여기서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은 정의는 스피노자 말대로 가능한 한 빨리 도달해야 할 ‘원인’ 내지 ‘원리’기 때문이다(“가능한 한 빨리 요약을 해야 하고, 공연한 짓이긴 하지만 용어법을 고착시켜야 한다”(I, 77)). 물론 펼쳐지는 것은 새로운 것을 그 정의로 감싸고 함축하는(im-pliquer) 것이기에, 그러한 펼침과 함축의 운동의 결과 제시되는 결론으로서 개념은 시작할 때의 이 정의들과 차이를 가질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개념들은 통상 그것을 펼치기 위해 그것과 관련된 새로운 개념들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이 새로운 개념은 이전에 사용하든 단어조차 새로운 의미로 사용할 것을 요구하게 마련이고 이것이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는 새로운 사유가 난해한 이유라는 것이고 그것이 『천의 고원』의 난해함은 물론 그 중에서도 특히 새로운 개념들을 나열하는 이 3번째 고원이 특히 더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라는 것이다.


유머러스하게도 들뢰즈/가타리는 3장의 시작을 ‘고통-기계’로 지구를 울부짖게 했던 챌린저 교수(코난 도일 소설의 주인공)의 강연 형식을 빌려 설명하고 있다. 어렵다는 것이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반대로 희망의 이유가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는 게 『노마디즘』 저자의 해석이다. 곧 누가 읽어도 어려울 수밖에 없으니, 어렵다고 스스로 자책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다 그려려니” 하며 희망을 가지라고 충고한다.*)


1. 지층화와 이중분절


1) 지층과 지층화

지층이란 땅이 일정한 층상을 이루면서 분절된 것이다. 그런데 지층화되기 이전의 상태를 상정할 수 있다. 수정란과 같이 순수한 잠재성의 상태, 잠재적 에너지의 순수한 흐름이 그것이고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기관 없는 신체’라 부른다. 기관 없는 신체인 지구를 일정한 형태로 고정하거나 일정한 코드에 따라 분할해 포착하는 것이 지층화, 분절이다.


“지층은 질료에 형식을 부여하고, 공명과 잉여성의 체계 속에 강밀도를 가두거나 특이성을 고정시키며, 지구의 신체 위에 크고 작은 분자들을 생산하고 그것들을 몰적 집계로 조직화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층은 포획이다. ··· 지층은 지구 위에 코드화와 영토화를 동시적으로 작동시킨다. ··· 지층은 신의 심판이다. ··· 그러나 지구 또는 기관 없는 신체는 항상적으로 이 심판을 벗어나 탈주하여 탈지층화, 탈코드화, 탈영토화된다.”(I, 47)

eg.1) 다양한 소리의 흐름 → 언어적 지층으로 포착 → ㄱ, ㅋ, ㄲ (음운)

→ 음악적 지층으로 포착 → 미, 파 (음고, 길이, 음색)

eg.2) 빛(무지개)의 흐름을 색깔 지층에서 지층화하기 ; 방식에 따라 5개(독일어) 혹은 7개(한국어), 12개(아프리카의 어느 부족)로 층으로 분절.

eg.3) 서양의 조성음악에 익숙한 우리는 중모리 12박자를 3박자로 지각하고, ‘궁상각치우’ 다섯 음을 각각 평균율화된 ‘도레미솔라로’ 지각한다.


이렇게 흐름을 분절하고 지층화하는 것은 소리의 흐름을 채취하여 사용하기 위한 전제이기 때문에 필요하면서도 유익한 것이다. 여기서 유익함이란 어떤 것도 지층화하는 방식으로 강렬도의 흐름을 채취할 수 있기 때문이고, 거기에 부여되는 일정한 형식을 통해서 그 순수 흐름은 안정적인 어떤 ‘생산물’로 생산되기 때문이다(eg. 소리의 흐름은 어떤 형식을 통해서만 음악적 소리, 언어적 소리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소리의 흐름이 갖는 다양한 잠재성을 하나로 제한하고 가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지층은 포획이다. 그런데 그것이 유감스런 것은 그 순수 흐름을 어떤 하나의 형식에 가두고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포착과 동시에 벗어날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cf) 이른바 노무현 식의 코드정치의 유용함과 그 한계:


ㄱ/ㅋ/ㄲ/ 같은 소리의 흐름을 분절하고 채취하기 위해선 한국어의 코드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어의 코드에 고정되고 매여있는 한, 다양한 다른 종류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다. 이 경우 코드의 유익함은 그 반대물로 전화. 지층화라는 불가피한 현상의 유감스러운 일면성을 알고 있다면 이런 코드에서 벗어날 가능성, 다시 말해 탈코드화의 가능성을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결집하고 이를 통해 하나의 지층화를 이루었다면, 다른 종류의 다양한 흐름들을 채취하고 절단하기 위해선 기존의 코드에서 벗어나는 시도가 필요하다. 이를 망각하면 유용함은 한순간에 그 반대물로 전화한다. 칵테일 잔을 높이 쳐들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비장함에 몰두하고, 자기를 ‘대통령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억하심정을 가지고 백날 울분에 사무치는 한 이미 그것은 ‘타도해야할 대상’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2) 이중분절

분절은 어떤 질료의 흐름을 기본적인 구성단위(실체)로 분할하고, 그 실체들을 규칙(형식)에 따라서 결합하는 것이다. 이중분절이란 분절이 두 층위 각각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1) 1차 분절과 2차 분절 (B-A, BA) : 마르티네 스타일의 정리


1차 분절에서나 2차 분절에서나 분절은 기본적인 구성단위(실체)로의 분할과 그것의 결합(형식)을 통해서 진행된다.


① 실체와 형식의 구별 : 실체는 형식화된 질료다. 형식이 코드를 포함한다면, 실체는 영토성에 관련된다.( I, 48)


· 실체 : 단지 형식화된 질료일 뿐 무언가의 근저에 있는 불변적인 것이 아니다. 형식화된 질료. 영토성, 영토화 및 탈영토화의 정도를 나타낸다.

eg.) 소리의 흐름이라는 질료는 음고에 따라 포착되면 음악적 소리(음)가 되고, 음운적 변별자질로 포착되면 언어적인 소리(음소)가 된다(음악으로의 영토화; 언어로의 영토화). 노래에서 일차적인 것은 ‘피치’고, 정확한 발음은 이차적이다. 반면 외국어 학원이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음소로서 변별자질이며, 피치는 중요하지 않다. 언어적 소리의 ‘실체’로서 음소는 언어적 규칙의 코드에 따라 연결되고 배열된다. 영어와 한국어는 그런 연결과 배열을 규제하는 상이한 코드다. 그것은 음소를 결합하고 배열하는 상이한 방식을 지시한다. 그런데 그러한 규칙은 이미 처음부터 음소를 변별하는 형식으로 관여한다. 즉 영어에서 b/v, p/f 등은 상이한 소리(실체)로 구별되지만, 한국어에서는 그렇지 않고, 한국어에서 ㅍ/ㅃ, ㅋ/ㄲ 등은 변별자질을 갖지만 영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음성학에서 음운론을 구별하게 하는 이유다.


· 형식 : 절단된 것들이 결합되는 규칙=코드이므로 규칙의 변형과 새로운 규칙의 형성. 코드, 코드화 및 탈코드화를 내포한다. (‘guest’ 는 1음절인데 탈코드화 되어 한국어코드로 재코드화 된 ‘게스트’는 3음절이다.)

형식은 이 실체들을 연결하거나 연관시키는 방법이다. 선법이나 평균율은 이 실체(음악적 소리)를 연결하고 계속의 질서를 부여하는 상이한 방식(코드)이다. 근음을 중심으로 하나의 스케일이 각각 만들어진다. 여기서 평균화된 소리는 근음에 의한 스케일 자체의 코드를 벗어나 다른 조(調)로 이동할 수 있다(탈영토화). 이는 평균율이 음을 실체로서 형식화될 때 이미 선법과는 다른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즉 선법의 ‘실체’로서 음과 평균율의 ‘실체’로서 음은 상이한 영토화 계수를 갖는다. 하지만 長調와 短調라고 불리는 음들의 배열형식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점에서 조바꿈이 곧 탈코드화를 뜻하는 건 아니다(그러나 어떤 조 안에서 조바꿈이 발생할 때, 그것은 국지적인 탈코드화를 뜻한다. 그것은 기능화성을 포함하는 조성 안에서 조라고 하는 상이한 코드의 섞임이요 코드의 변환이기 때문이다.).


② 1차분절과 2차분절의 구별 : 분자적 내지 유사분자적 단위 및 그것의 연결과 몰적 화합물과 그것들의 기능적이고 안정적인 구조의 구별.

1차 분절 : 의미를 갖는 최소단위인 형태소로 분절되는 것. (의미론적 분절)-몰적인 것.

2차 분절 : 형태소를 이루는 음운론적 최소단위인 음소로 분절되는 것. (음운론적 분절)-분자적인 것.

(들뢰즈/가타리는 이것을 역순으로 사용)

eg.1) 조성의 기초로서 평균율은 평균화된 음(실체)과 그것의 연결/계속으로서 調(조마다의 스케일)라는 코드(형식)를 통해 분절된다. 반면 이것만으로는 소리를 음악적으로 형식화할 수 없다. 각 조의 스케일 안에서 어울리는 소리들로서 화음(몰적 화합물)과 그러한 화음을 연결하고 배열하는 안정적 구조로서 기능화성(I-V-I)을 통해서 조성은 음악적 소리를 형식화하는 하나의 안정된 지층을 형성한다. 조성이란 이처럼 1차 및 2차에 걸친 이중분절을 통해서 서양 근대 음악의 기초적인 지층을 형성한다.

eg.2) 대수학에서 단위수와 자연수, 혹은 대수적 수 ; 연산과 연산의 체계로서 대수적 구조

eg.3) 언어에서 음소와 음운론적 표현규칙 ; 형태소와 기호적 표현규칙


(2) 내용과 표현의 차원에서의 분절(I, 50) : 흐름 내지 질료를 내용의 층위 및 표현의 층위에서 실체/형식에 따라 분절하는 것. -->옐름슬레브 스타일의 정의.


· 형식화된 질료의 선택으로서 내용(선택되는 것이란 점에서 실체; 특정한 질서에 따른 선택이란 점에서 형식), 기능적 구조로서 표현(화합물로서 실체와 그것의 고유한 형식). 하지만 “일차분절은 내용에 관한 것이고 이차분절은 표현에 관한 것”(I, 50-51)이라는 점에서 앞의 정의와 다르지 않다.

eg.1) 서양 근대음악에서 내용의 분절에 해당하는 평균율의 각각의 소리들은 내용의 실체이다. 그 소리(음)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선별되어 만들어진 음계는 내용의 형식이다. 평균율은 중세의 전법의 코드를 탈코드화하여 재코드화된 것이다. 표현의 분절에 해당하는 조성은 음악적 형식을 구성하는 규칙(코드)이고 구조이며 표현의 형식이다. 조성 안에서 음정, 화음이 표현의 실체를 이루는 단위이고 이것들이 표현의 형식에 따라 짜여져 몰적 화합물이 된다. 이때 2차분절인 조성(표현)은 음악에 쓰이는 선율이나 화성이 하나의 음(으뜸음)을 중심으로 종속적으로 관련하고 있는 현상이어서 2차분절의 특징은 중심화, 일원화, 총체화 등등의 현상을 생산한다.


· 내용과 표현 구별의 상대성, 각 분절의 이중성 : 내용과 표현의 구별은 실재적이지만 상대적이다. 그것은 내용의 분절이나 표현의 분절 자체가 또한 이중적이기 때문이고, 내용과 표현의 분절이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내용과 표현 사이에 매개적 상태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I, 51)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표현의 역할을 하는 내용의 형식 및 실체와 그 반대 경우. 이런 점에서 내용과 표현 사이에는 매개적 상태들이 존재한다.

eg.1) 가치화를 강제하는 ‘권력 형성체’로서 화폐와 그것이 노동력에 작용할 때 그것의 표현으로서 실업화 압력에 대해 내용의 역할을 한다; 동일한 聖畵의 내용(성스러움, 대속의 고통···)과 그것의 양식화된 표현이 근대 종교화의 이중적 지층을 구성한다면, 성화의 내용과 그것의 상징적 내지 기호적 표현형식에 주목하는 도상학이 내용 안에서 다시 이중분절을 만들고, 지각방식과 그것의 양식적 표현형식에 주목하는 양식론이 표현 안에서 다시 이중분절을 만든다. 도상학의 지층은 다시 단순한 상징적 기호들에서 의미를 읽는 도상학(Iconography)과 복합적인 표현형식을 통해 상징적 표현의 복합물에 대한 이차적 의미를 추적하는 도상론(Iconology)라는 이중분절을 포함한다.

eg.2) 카프카의 소설의 숙인 고개와 쳐든 고개는 내용의 차원에서는 대립적 형식이지만, 숙인 고개는 그림이나 사진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반면에 쳐든 고개는 음악적인 소리로 표현된다.


· 내용과 표현은 서로 환원불가능하며 상대적인 것 : 이때 분절의 이중성을 규정하는 두 차원은 스피노자의 ‘실재적 구별’에 따른 것이고, 각각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실체와 형식의 구별은 ‘양태적 구별’에 해당한다.(I, 51)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내용은 사유이고 표현은 연장인데 이들 두 속성 간에는 상이한 질을 가지고 있어서 환원 불가능한 이질성과 구별이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실재적 구별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양태적 구별, 양적 구별(실체와 형식 간의 구별)을 제시한다. 실체는 형식화된 질료이므로 형식화를 내포하기에 실체와 형식은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없다.) 덧붙여 내용과 표현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각각이 내용 층위에서 대립하더라도 표현 층위에서는 대립하지 않는 표현의 형식을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하나로의 환원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결정적인 것은 질적 구별, 실재적 구별로서 내용/표현 간 구별이지, 실체와 형식 간 구별이 아니다. 이 구별은 뒤(예컨대 제4장)에 가면 종종 신체적인 것/비신체적인 것의 구별로, 기계적인 것/ 언표적인 것의 구별로 이어지지만(이는 <의미의 논리>에서 중요한 주제였다), 내용과 표현의 관계는 이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내용과 표현의 상대성, 각 분절의 이중성.


2. 지층과 추상기계

3. 내용과 표현 : 구별의 유형들

4. 내용과 표현의 관계

5. 지층과 배치, 추상기계



*)

경제학자들은 '수요 공급의 원리' 하나 설명하기 위해서 졸라 많은 조건들을 가져다 붙입니다. 종속변수에 상수에 다른 조건은 동일하다고 가정한다는 둥 별 지랄을 다 하죠.

언젠가 동대문 시장에서 알바 아닌 알바 비슷한 걸 할 때 경헙했던 것입니다.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에선 이른바 지게꾼들이 있습니다. 좁은 시장 골목에서 무거운 원단들을 옮기기엔 지게 만한 운송수단이 드물죠. 그런데 세상살이가 팍팍해서 그런지 무작정 지게 하나 들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다보니 수요공급의 원리에 의해서 한번 지게짐의 가격이 1,000원대로 추락하는 사태가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래서야 하루에 3,40번을 지지 않고선 기본적인 생활비도 벌기가 만만찮아진 거죠. 이에 지게꾼들이 담합을 한 게 한데 모여서 순번을 정해 짐을 지기로 하고 가격을 3,000원으로 통일했다고 하더군요. 이른바 '수요 공급의 원리'를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경우죠.

이 지게꾼들에게 미시경제학에서 설명되어지는 '수요 공급의 원리'는 할 일 없는 먹물들의 시간낭비에 다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미 몸으로 체화하고 있는 걸 별 요란한 가정들을 들먹이며 이론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꼴이니까요. 

그러나 이 지게꾼들은 당장의 생계에는 자신들이 체화한 원리를 써먹지만 그들을 둘러싼 제반 생계조건에 대해서는 이 수요 공급의 원리를 써먹지 못합니다.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선 어떤 삶의 태도를 견지해야 하고 그건 결국 사회, 국가라는 확장된 삶에서 그들 자신들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벌어들이는 '1번=3,000원'의 수입이 10번이냐, 15번이냐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지게지러 가는 동안 술을 마시며 화투를 치는 등의 방법으로 수입을 늘이는 걸 기대하는 차원으로만 사고의 방향을 밀고 나가게 되는 것이죠.

장황하게 이야기 하지만, 어떤 사유체계를 습득하는 문제는 이처럼 삶의 모든 문제, 사고의 모든 문제로 뻗어나갈 '일관성'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원에서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까꽁님의 농담성의 발언은 일면 삶에 대한 하나의 태도이면서 일면 사유의 일관성이라는 면을 놓칠 수도 있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는 것이죠. 들뢰즈의 사유체계는 들뢰즈 속으로 들어와야만 '일관성의 구도'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 언젠가는 까꽁님이 들뢰즈의 사유체계 속으로 들오오시기를 기대하며.... 후후 그냥, 농반, 진반의 잡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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