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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넬슨 만델라, 인간의 여정

by 내오랜꿈 2013.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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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인간의 여정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59호] 2013년 08월 06일 (화) 17:07:28
브루스 클라크
  info@ilemonde.com



 



 
 
오대주에서 칭송받는 그의 이름은 저항·해방·보편성과 동의어다. 
노련하면서도 끈질긴 투쟁가인 넬슨 만델라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의 조각상 아래서 한탄할 거라는 생각 자체가 그를 격분시킬 것이다. 
그는 “나아가라, 그리고 거대한 해방의 과업을 계속하라”고 말했다.

넬슨 만델라가 사라졌으니, 우리는 20세기가 끝났다고 선언할 권리가 있다. 만델라가 20세기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피델 카스트로를 예외로 치면, 만델라가 죽을 운명인 위대한 사람들 중 마지막 인물일 것이다. 그만큼 우리 시대는 전설적 인물들이 이미 많이 죽었다. 

만델라는 자신이 결코 성인인 적이 없다고 단언했지만, 성인 이상으로 그는 기나긴 감금생활 전에도, 감금생활 중에도, 감금생활 이후에도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만들어진 것은 우연한 지리적 사건이지만, 스스로 개념을 만들려 애쓰는 과정에 있는 남아공에 만델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해줄 것이다. 남아공이 결코 서둘러서 전설과 결별하지 않은 것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 정책) 시대가 끝난 뒤 삶의 공동체 존속에 전설이 없는 사회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델라 자신이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했던 것처럼 그가 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가 평범한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싫어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인 형태의 식민지배 혹은 인종차별적 억압과는 확연히 다른 아파르트헤이트는 역설적으로 범상치 않고 두려움도 없는 일군의 여성과 남성을 출현하게 만들었고, 이들은 유례없는 희생의 대가를 치르면서도 아파르트헤이트 폐지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 모든 사람 중에서 만델라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그가 때론 상황의 압력에 의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아무도 예기치 않은 여정에 접어들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몇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출발지에서 끊임없이 기회를 엿보고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전혀 예기치 않게 기적적으로 귀환했는데 이것이 그를 더욱 신화화하는 데 기여했다. 

굴복당하지 않는 삶에 도전하다

신화의 밑바탕에는 성스러운 것에 대한 갈망과 불가사의에 대한 갈증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신화는 우선적으로 출발과 이별의 원초적 형태인 죽음 주변에서 개화한다. 만델라의 아버지 가들라 만델라(Mphakanyiswa Gadla Mandela)가, 아주 좋아하는 담배마저 잦아들게 하지 못한 억제할 수 없는 기침을 하면서 입에는 파이프를 물고 만델라의 바로 눈앞에서 사망했을 때, 어린 만델라는 죽음을 경험했다. 그리하여 그 최초의 출발이 또 다른 출발을 재촉했다. 어머니를 따라 젊은 만델라는 어린 시절과 초기 청소년 시절을 보낸 장소인 쿠누를 떠났다. 만델라는 자서전에서 쿠누를 끝없이 달콤하게 묘사하고 있다. 석방되기 바로 전까지 갇혀 있었던 마지막 감옥과 아주 똑같은 집을 쿠누에 지은 뒤, 기나긴 투옥 생활이 끝났을 때 그는 그곳으로 돌아가 살고 싶어 했다. 관습에 순응하길 거부한 그는 청소년 시기가 끝날 무렵 두 번째로 고향을 떠났다. 도망에 이골이 난 만델라는 자신의 원래 종족인 템부족 족장 곁에서 경력을 쌓으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그는 당시 활발하게 번성하고 있던 광산도시 요하네스버그로 도망갔다. 요하네스버그는 1948년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이름과 모양새로 구체화된, 자본주의와 인종차별주의의 기묘한 결합에 의해 탄생한 사회적·문화적·정치적 모순으로 가득 찬 역사적 명소였다. 관습의 명령에 따라 족장이 돼야 하는 만델라는, 다른 사람들이 종교를 개종하는 것처럼, 자신의 종교를 민족주의로 개종했다. 이 금광도시는 만델라가 자신의 운명과 조우하는 중요한 무대가 될 것이다.

 궁핍, 반복적 구금, 무례하게 괴롭히기, 반복된 법정 출두, 고문과 일상적인 모멸, 연장된 도망자의 삶, 낮과 밤의 뒤바뀜, 어쩔 수 없는 변장, 붕괴된 가정, 황폐화된 집으로 상징되는 아주 멀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이 이때 시작된다. 투쟁하고 쫓기는 인간으로서, 언젠가 귀환할 날이 있을 거라는 신념만을 믿으며 출발지에서 끊임없이 도망자 신세가 된다.

만델라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했다. 모든 것을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그 매번의 시작이 마지막인 것처럼 강렬한 삶을 살았다. 가족을 포함해 다른 모든 것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족은 필연적으로 그의 참여와 신념의 대가를 엄청나게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가족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고, 이 빚을 결코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그의 죄책감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간신히 사형을 면했다. 그때가 1964년이었다. 같이 기소당한 동료들과 함께 그는 사형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감옥에서 나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아흐메드 카트라다와의 대담에서 그는 다음 사실을 확인해준다. “우리는 사형을 각오했다. 만약 우리가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영예롭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우리의 죽음이 국민과 우리 조직에게 바치는 마지막 제물이 될 거라는 사실에 기뻤다.”(1) 그러나 최후 만찬 때의 예수 제자들처럼 순교자가 되려는 욕망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루벤 움 니오베(카메룬 반(反)식민투쟁 전사)에서 아밀카르 카브랄(기니비사우 민족해방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를 거쳐 파트리스 루뭄바(콩고 독립운동가)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운명과는 반대로 그는 죽음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가 강제노역의 한계에서 삶에 대한 욕망, 죽음, 유배에 대해 진정으로 경험하게 되는 곳은 ‘로벤 아일랜드’라는 도형장(徒刑場) 같은 감옥에서다. 감옥은 극단적 시련의 장소, 즉 독방 감금의 시련, 인간의 가장 원초적 상태로 돌아가는 시련을 겪는 장소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극단적으로 결핍된 그 장소에서, 20년 이상을 보내야 할 감방에서, 만델라는 살아 있지만 죽은 자처럼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2)

미칠 것같이 길고 잔혹한 고독의 시간 속에서 그는 침묵과 사소한 것들 속에 존재하는 본질을 다시 발견할 것이다. 모든 것이 그에게 다시 말을 걸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빨리 기어가는 개미, 죽었다가는 정원의 환상을 심어주면서 다시 솟아나는 뿌려진 씨앗, 모든 조그마한 것들, 지나가는 기색 없이 서로 닮은 음울한 날들의 침묵,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 느리게 흘러가는 나날과 매섭게 추운 밤, 아주 드물어진 말, 속삭이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담 밖의 외부 세상, 로벤 아일랜드라는 심연, 고통이 새겨진 얼굴, 석영(石英)에 굴절하는 태양빛에 의해 시력을 잃어버린 눈, 더 이상 눈물이 아닌 눈물, 귀신 같은 환영으로 변해버린 얼굴, 폐와 발가락에 쌓인 먼지, 즐겁고 눈부신 모든 미소, 꼿꼿하게 선 의연한 자세, 다시 세상을 맞이해 태풍을 일으킬 준비가 된 꽉 쥔 주먹 너머에 남아 있는 감옥의 흔적, 이 모든 것이 말을 걸 것이다.

해방이 가져온 모순과도 싸우다

거의 모든 것을 박탈당했음에도 그는, 간수들이 어떻게든지 그에게서 빼앗아 최후의 전리품으로 흔들려는 나머지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절약하는 법을 배우고, 성생활의 즐거움을 포함해 세속적 삶의 모든 것에 대해 초연해지는 법을 배운다. 두 개의 벽과 반쪽짜리 벽 사이에 갇힌 사실상의 죄수임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의 노예도 되지 않기 위해서다.

뼈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서 만델라는 재앙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다시 말해 인종과 인종이란 이름의 지배와 무관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삶의 야음 속에서 지옥에 가장 가까운 곳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자신의 선택 때문에 그는 절벽 끝에 몰리게 될 것이다. 쇠락하는 세기가 저물어가고 더 이상 꿈이 없는 어둠의 나라에서 용솟음치는 힘으로 그가 살아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그는 세상을 매료시킬 것이다.

19세기의 노동운동이나 여성들의 투쟁처럼, 우리의 현대성은 노예들이 예전에 구상했을 차별 폐지에 대한 꿈으로 다듬어질 것이다. 20세기 초 식민지 해방투쟁이 이런 꿈을 연장해 꾸게 해줄 것이다. 만델라의 정치활동은 인간 해방을 위한 아프리카의 위대한 투쟁에 대한 특별한 역사 속에 기록된다.

이 투쟁은 원래부터 지구적 차원의 성격을 띠고 있다. 투쟁의 의미는 결코 국지적 측면에 한정된 게 아니라 항상 보편성을 띠고 있었다. 비록 이 투쟁이 어떤 나라 혹은 한정된 국가 영토에서 현지 활동가들을 결집시켰을지라도, 그것은 초국가적 그리고 지구적 차원의 연대성을 끌어내는 출발점이었다.

매번 이런 투쟁에 의해 당시까지 한 인종의 전유물이던 권리가 확장되거나 보편화됐다. 현대 노예민주주의가 드러낸 모순이 종말을 고한 것은 바로 19세기의 차별폐지운동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이루어진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의 해방과 시민권 획득 투쟁은 평등과 시민정신의 이념과 실천을 강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반식민주의운동에서도 똑같은 보편성을 다시 보게 된다. 스스로 서 있고, 공동체를 만들고,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타고난 고유 권한을 얻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면, 반식민주의운동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세계적 투쟁의 상징이 된 만델라는 이런 의미들을 연장시킨다. 목표는 인종을 넘어선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인종차별주의가 기묘한 형태로 귀환하고 있으니, 보편적 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프로젝트는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꼭 달성해야 할 사명이다.

만델라의 뒤에 남겨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해 내가 한마디 해야겠다. 통제사회에서 소비사회로의 이행은 만델라의 석방과 아파르트헤이트의 종말 이후 드러난 가장 결정적인 변화들 중 하나다. 아파르트헤이트하에서 통제는 흑인의 이동을 제한하고, 흑인을 짐승처럼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통제의 목표가 흑인을 일자리에서 되도록 많이 쫓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통제는 흑인이 함께하는 공간에 대한 규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미세 환경이 설정됐는데 그것은 때론 담장에 의해, 때론 보호구역이란 방식으로 설정됐다. 개인들 사이의 접촉은, 특히 개인들이 다른 인종에 속할 때, 법에 의해 엄격히 금지되거나 통제받았다. 결국 통제는 권력이 엄격히 지키려 했던 인종의 혈통에 따라 폭력을 조절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아파르트헤이트하에서 폭력은 세 가지 기능을 발휘했다.

우선 폭력은 흑인의 사회적 재생산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식량·교육·주택·건강에 관계되든 혹은 더 심하게 시민의 기본 권리에 관계되든 간에, 흑인은 삶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꼭 필요한 수단을 갖출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폭력은 신체적 차원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 폭력은 육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마비시키고, 필요하면 박살내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결국 이 폭력은, 신경체계를 공격해 희생자 자신의 고유한 상징체계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메마르게 했다. 흑인은 반복된 방식으로만 자기 삶을 살아야 했다. 이것이 바로 인종차별주의가 완수하려고 한 임무였다.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보다 더 심하게 이런 형태의 가혹 행위와 폭력을 내재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런 유의 가혹 행위와 폭력은 1994년부터 공적이고 평범한 삶의 수준에서 미세한 방법으로 재생산됐다. 가혹 행위와 폭력은 삶의 은밀한 영역이든, 욕망과 성욕의 구조에 관계된 것이든, 더 심하게는 모든 종류의 상품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갈망에 관계된 것이든, 모든 수준의 일상적·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드러난다.

소비의 광적인 욕망이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실제와 본질로 간주됐다. 통제사회에서 소비사회로의 이행은 대부분의 흑인에게 다양한 형태의 결핍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극단적인 넘침과 극단적인 결핍이 동시에 존재한다. 두 가지 상태를 나눠놓는 격차는 점점 더 폭력과 다양한 형태의 독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만델라 이후의 민주주의는 대부분 일자리 없는 흑인과 취업할 수 없는 또 다른 흑인으로 구성될 것이다. 이들은 소유권을 행사할 소유물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남아공의 긴 역사 자체가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와 ‘가진 자들의 법’이라는 두 가지 원칙에 의해 현저하게 대립하고 있다.

최근까지 가진 자들은 대부분 백인이었다. 그래서 흑인의 투쟁에 인종적 투쟁이라는 의미가 내포됐다. 이제 더 이상 꼭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신흥 흑인 중산층은 최근에 획득한 소유권을 안전하게 즐길 처지가 아니다. 신흥 흑인 중산층은 대출로 산 집을 폭력이나 좋지 못한 경제 상황에 의해 내일 다시 뺏길지 모른다는 사실에 불안해한다. 이런 유의 불안감이 중산계층의 머릿속에 박혀 있다.

오래된 해방운동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모순된 변화의 올가미에 빠져 있다. 권력에 있는 계층과 자본 소유자들은 엄청난 빈곤과 높은 불평등 비율이, 어떤 상황에서 골치 아픈 문제, 간헐적 파업, 수많은 폭력 사건을 낳을 수 있다고 계산한다. 그럼에도 정치권력을 ANC에 이양하고 소수 백인의 경제적·문화적 주도권을 인정한 1994년의 타협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반동맹이 생겨나지는 않을 것이다.

남아공은 역사의 새로운 시기에 진입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재산 축적 방식이 19세기의 몰수 전쟁 때처럼 직접적 수용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재산 축적 방식은 공공재산의 노획과 착복, 변신한 폭력, 혼란의 상대적 도구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인종의 신흥 지배계층은 러시아 모델, 중국 모델, 아프리카의 포스트식민주의 모델을 뒤섞은 합성물을 통해 형성된다.

그 사이 대중의 공간은 점차 다시 세분화되고, 남아공의 인구 지도는 분할된다. 수많은 백인들이 항구의 배후지를 포기하고 해안 쪽으로, 특히 서부 케이프 지방으로 모일 것이다. 백인들은 남아공이 서서히 아프리카화(아프리카인이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할까봐 두려워하며 아파르트헤이트의 낡은 옷을 벗어버린, 그러나 예전의 특권을 보호해주는 백인공화국의 근거지를 여기에 다시 건설하길 꿈꾼다.

이런 인종분리 시대의 사고틀에 대한 역설적인 애착은 남아공이 무장한 시민들의 국가로, 다시 말해 완전히 부패하고 군대식으로 조직화된 경찰을 가진 일종의 주둔군-국가로 변화되고 있는 과정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부자들은 정계의 거물과 그의 심복들이 일부 소유한 수천 개의 민간 보안회사와 감시회사들에 돈을 주고 구매한 허울뿐인 보호 혜택을 받고 있다.(3)

인종주의로부터 진정한 해방의 길은…

보안의 상품화를 통한 새로운 통제체제는 폭력자원을 강력히 재분배함으로써 공고해진다. 그런데 무장한 사회는 시민사회가 전혀 아니다. 무장한 사회는 더더욱 진정한 공동체가 아니다. 무장한 사회는, 민주사회의 작동에 필수불가결한 훈련된 조직을 만들기보다는, 공포와 의심 때문에 정부권력에서 떨어져나와, 선동가나 자경단의 엄격한 감시망에 들어가기 급급한, 원자화된 개인들의 집단이다.

그 외에 만델라의 실천과 삶에서 두 가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 첫 번째는 적어도 현재 단 하나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하나의 세계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공통적인 것은 평등한 인간 존재가 되려는 욕망 혹은 느낌이다. 인간성으로 충만해지고 싶은 욕망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그 어떤 것이다.

우리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역사에서 사물화되고 제외돼버린 사람들에게, 도난당한 그들의 인간성을 되돌려줘야 할 것이다. 극단적인 궁핍의 상황에 빠졌던 사람들이 삶 이하의 어둠 속에 그들을 가둔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공동의 세상에 대한 인식이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만델라의 사상에서 화해와 보상은 세상에 대한 공통 인식을 건설하는 데, 다시 말해 보편적 정의를 완수하는 데 필수적인 요인이다. 만델라는 자신의 감옥 생활 경험을 통해, 각각의 인간에게 얼마간의 내재적 인간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가 이 얼마간의 축소될 수 없는 인간성을 갖고 있다. 이 얼마간의 인간성 때문에 우리는 서로 다르면서도 동시에 유사한 것이다. 화해와 보상의 윤리학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타인의 몫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 타인의 몫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내 것이 아니지만 내가 그것의 보증인인 것이다. 나는, 최후의 목표가 실제적으로 그런 것이라면, 자신, 정의, 권리, 심지어 온전한 인간성의 개념을 위해 혹은 보편 프로젝트를 위해 타인의 몫을 대수롭지 않게 빼앗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조건하에서 볼 때, 경계선을 만들고, 담과 울타리를 쌓고, 우리와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우리와 닮지 않고, 우리가 경멸하고, 우리가 무시할 사람들을 나누고 분리하고 제외시키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단 하나의 세상이 존재할 뿐이고, 우리 모두가 이 유일한 세상의 공동상속인이다. 비록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똑같지 않다고 해도 그렇다. 그래서 살아가는 방식과 문화가 현실적으로 다양한 것이다. 사람과 국가의 만남에 여전히 만연해 있는 폭력과 냉소주의를 숨겨보아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냉정한 자료를 즉시 상기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자료의 기원은 현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화, 사람, 국가가 뒤섞이고 엉기는 과정이 현대 초기에 진행된 것을 이 자료는 보여준다.

구별의 욕망은 때때로, 가장 강렬하게 배제된 경험을 당한 곳에서 부상한다. 이때 구별의 요구는 인정과 포함의 욕망을 뒤집어놓은 언어다. 식민지배를 겪은 사람이나 역사의 한순간에 인간성을 도난당한 사람에게 이런 인간성의 몫에 대한 회복은 흔히 구별의 요구로 이어진다. 그러나 일부분의 현대 아프리카 비평에서 보는 것처럼, 구별의 요구는 더 큰 프로젝트의 한순간에 벌어질 뿐이다. 더 큰 프로젝트는 그 목표가 보편성을 공유하는 앞으로의 세상, 우리 앞에 다가올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 세상은 인종의 무거운 짐, 모든 인종주의 상황이 초래하는 복수에 대한 욕망과 감정이 없는 세상이다. 
 

글·브루스 클라크 Bruce Clarke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조형예술가로, 개념예술의 강요와 냉소주의와는 무관하게 작업한다. 예전의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전사로 동시대 역사 작품들 속에서 기억의 전달과 기억의 글쓰기에 대해 논한다.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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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넬슨 만델라: 나와의 대화>(Nelson Mandela: Conversation avec moi-même), 쇠유, 푸앵 컬렉션, 파리, 2011.
(2) <넬슨 만델라, 자유로 향하는 긴 여정>(Nelson Mandela, Un long chemin vers la liberté), 르 리브르 드 포시, 파리, 1996.
(3) 사빈 세수(Sabine Cessou), ‘하루에 세 번씩 봉기가 발생하는 남아공’,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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