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과 공포 | ||||||
한 ‘사찰대상자’의 슬픔과 위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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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민간인 사찰 파문은 민주주의자와 전체주의자를 감별하는 리트머스시험지다. 누가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세력인가? 누가 거짓 자유민주주의자들인가? 지난 3월 29일 폭로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사찰 문건 가운데 하나인 '1팀 사건 진행 상황'에서 '한겨레21 박용현 편집장'이라는 아주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내가 공권력에 의해 사찰당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느낀 감정은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분노? 공포? 불안? 그 혼란스러운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은 "그것은 공포를 넘어선 것, 실존의 심연을 덮는 슬픔이다"(<한겨레> 4월 2일치 31면 '사찰당한 자의 슬픔')라는 흐릿한 문장이었다. 좀더 선명한 설명을 구하고 싶었다. 1. 사찰당한 자의 슬픔 불법사찰로 인해 침해되는 것, 그 대립항은 프라이버시다. 그런데 프라이버시(사생활)란 개념은 익숙하지만 (또는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적 권리 인식 속에 단단하게 자리잡지는 못한 것 같다. 이 개념의 유래 역시 뿌리가 깊지는 못하다. 인권학자 앤드루 클래펌은 이렇게 진단한다. "그 기원을 추적해보면 사생활 보호란 전통적인 헌법상 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8세기 혁명에서 사생활 보호에 대한 요구는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사생활 보호는 필요에 따라 임시변통으로 개발된, 다시 말해 사생활을 침해당하면 누구나 당혹감과 분노를 느끼기 때문에 이에 대응해 만들어낸 개념인 것 같다."(<인권은 정치적이다>) 2. '홀로 남겨질 권리' 프라이버시가 법적인 권리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다. 훗날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가 된 루이스 브랜다이스 변호사와 새뮤얼 워런 변호사가 공동 집필한 법학논문 '프라이버시권'(The Right to Privacy)이 하버드대학 로스쿨의 법학논문집에 발표되면서부터다. 워런 변호사 딸의 결혼 소식이 원치 않게 언론에 보도된 것이 이 논문을 쓰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브랜다이스는 프라이버시를 '홀로 남겨질 권리'(right to be left alone)로 규정하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보장돼야 할 자유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20세기 들어 프라이버시는 유엔이 제정한 세계인권선언(1948)과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1966), 미주인권조약(1969), 유럽인권조약(1950) 등 국제 인권규범에 당당한 보편적 권리로서 이름을 올리고, 우리나라(제5공화국 헌법)를 비롯한 각국 헌법의 기본권 항목에도 등장하게 된다. 프라이버시는 왜 이처럼 뒤늦게 급격히 부상하게 됐을까? 20세기에 인류가 나치즘·파시즘 같은 전체주의의 도전을 물리치며 이뤄낸 민주주의·인권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프라이버시는 단지 감정이나 본능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을 떠받치는 개인의 정체성·자유·자율과 직접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왜 자기만의 사적인 공간을 필요로 하는가? "사적 공간인 가정은 가족관계가 이루어지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고독의 장소'다. …우리는 한편으로 대중 속에서 사라져가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독을 찾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독 속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복원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의미를 발견한다."(이진우, <프라이버시의 철학>) 사적 공간은 그저 사회와의 단절을 위한 도피처가 아니라, 개인이 사회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 위해 개성과 정체성을 찾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인격적 정체성이 없다면 의사소통이 불필요한 획일화된 형식적인 인간에 지나지 않"게 되고, "전체주의 정권이 온 힘을 다해 프라이버시를 파괴하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누군가 우리를 엿보거나 도청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도 자율과 자유의 맥락에 가닿는다. 우리는 자신의 내밀한 정보를 아무한테나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정보를 털어놓고 싶은 상대방을 선택하고, 그렇게 비밀을 공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 프라이버시는 이렇게 "누가 우리에 관해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가를 우리 스스로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통제권을 상실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예측할 수 없고, 따라서 나의 행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게 된다. 이와 관련해 이진우 교수는 세 가지 프라이버시 유형을 제시한다. 첫째,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처럼 노출된 공간에서 이뤄지는 감시의 경우 우리는 감시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이에 동의한다. 둘째, 주민등록번호 같은 개인정보의 경우 우리는 유출될 가능성을 인식하는 반면 유출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셋째, 엿보기나 도청의 경우 우리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며 물론 동의하지도 않는다. 나에 대한 정보의 통제권과 이에 기반한 행동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세 번째 유형이 가장 심각한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할 수 있다. 사찰이 바로 이 유형에 해당한다. 결국 "프라이버시가 전제하는 것은 개인의 비밀과 독립 '이상의 것'"이며 "프라이버시는 공적 영역과의 관계에서 개인의 자유와 차이가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다. 따라서 "프라이버시가 없다면 자유도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불법사찰은 이처럼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고독의 공간'에 누군가 허락 없이 들어오는 침입이자, 내가 나에 관한 정보를 통제함으로써 내 뜻대로 타인과 관계 맺는 자유를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간섭이다. 그러니 사찰을 당한다는 건 자유로운 존재의 소멸, 실존의 심연을 덮는 슬픔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프라이버시가 절대적인 권리인 것은 아니다. 다른 사회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경우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범죄 수사를 위해 가택을 압수수색하고 전화 통화를 감청하는 게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이 예에서도 알 수 있듯, 불가피한 프라이버시 침해라도 절차와 방식에서 엄정한 제한(법원의 영장 발부 등)이 필요하다. 유럽인권재판소의 접근법이 좋은 본보기다. 3. 개인보다 사회의 가치를 우선할 이유 유럽연합 국가의 국민은 유럽인권조약에 보장된 권리를 침해당할 경우 자기 나라를 유럽인권재판소에 제소할 수 있다. 이때 유럽인권재판소는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적용해, 국가의 인권침해 행위가 정당한 것이었는지 여부를 판단한다. 첫째, 국가의 인권침해 행위가 정당한 목적을 갖고 있는가. 둘째, 그 행위가 명백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법률에 의해 규정돼 있는가. 셋째, 그 행위가 앞서의 정당한 목적을 이루는 데 비례하는 조처이며 민주사회에서 필요한 일인가. 루마니아정보국(RIS)이 안보상 목적을 위해 개인에 관한 비밀파일을 작성해 보관한 데 대해 피해 당사자가 제기한 소송(로타루 대 루마니아·2000)에서 유럽인권재판소는 국가 안보라는 목적의 정당성과 비밀파일 작성이 법(RIS 설치·운영에 관한 법)에 규정돼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유럽인권조약 제8조(프라이버시 권리)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국가의 권한 행사(비밀파일 작성·보관)에 제약을 가하는 조항, 예를 들어 비밀파일에 기록될 수 있는 정보의 종류, 감시할 대상의 범주, 그런 감시 수단을 써도 되는 상황, 그 과정에서 지켜야 할 절차 등이 법에 전혀 규정되지 않았다. 또한 행정부가 개인의 권리를 제약할 경우에는 사법부의 실질적인 감독 아래 놓여야 하는데, 그런 법 규정이 없다." 즉, 두 번째 기준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은 어떤가? 우선 정당한 목적이 있느냐는 점부터 문제가 된다. '정권 보위' 차원의 사찰은 정당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공무원 감찰이라는 표면상의 목적을 액면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두 번째 기준을 충족하지는 못한다. 정부는 공직자의 비위 행위를 감찰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민간인도 사찰할 수 있다는 판례를 들어 정당화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법률'상의 규정이 아니다. 유럽인권재판소가 '로타루 대 루마니아' 사건 판결에서 밝힌 것과 같은 세세한 안전장치 규정은 더더구나 찾아볼 수 없고, 사법부의 감독 작용 역시 배제돼 있다. 이렇게 허술한 법 규정으로 인해,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이 자행돼도 적발하지 못하고 적발해도 제대로 처벌조차 할 수 없는 황당한 상황이 연출된다. 만약 공직자 감찰 과정에서 그와 연루된 민간인 사찰이 불가피하다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범위까지 할 수 있는지 명백한 법 규정을 만들어야 하고, 이 과정을 사법부가 감독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할 것이다. 물론 이보다 더 바람직한 방안은 공직자 감찰 과정에서 민간인 연루자가 등장하는 순간 감찰기관은 즉시 손을 떼고,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을 가진 수사기관에 사건을 넘기는 것이다. 4. 가짜 자유민주주의자들의 정체 프라이버시 침해는 자유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며, 전체주의의 망령을 떠올리게 한다. 21세기 들어 서구 선진국들에서도 '테러와의 전쟁' 등 안보상 목적을 이유로 통신에 대한 감시체제를 강화하는 각종 법률을 만들고, 이로 인해 시민사회에서 전체주의의 발호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번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도 현 정부 들어 시민의 입을 틀어막고 감시를 강화해가는 '파시즘적 경향' 속에서 나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단지 사찰의 전모를 밝히고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것을 넘어, 철저한 재발 방지 대책을 제도적으로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자와 전체주의자를 감별하는 리트머스시험지가 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세력의 실체가 드러났고, 말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 이런 세력을 옹호하는 거짓 자유민주주의자들의 정체가 폭로된 점은 그나마 잘된(?) 일이다. 이로써 깊은 슬픔에 한 가닥 위안을 찾는다. * 글•박용현 전 <한겨레21> 편집장. 현 <한겨레> 오피니언넷 부장. <정당한 위반>(2011)과 <정봉주는 무죄다>(공저·2012)를 썼고, <인권은 정치적이다>(2010)를 번역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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