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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바다 5. 디아스포라: 이란인의 사례 - 아시아를 누빈 “술탄 국가의 오만한 인간들”

by 내오랜꿈 2007.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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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를 누빈 “술탄 국가의 오만한 인간들” 
문명과 바다 5. 디아스포라: 이란인의 사례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0 26


» 홍해와 인도 사이에서 몬순(계절풍)을 이용해 빠르게 항해했던 아랍선박(맨 위). 페르시아만의 국제적인 교역 중심지 호르무즈로 가는 상인들( 위 왼쪽)과 인도에서 아편을 피우는 영국 상인(위 오른쪽).

디아스포라(Diaspora)는 고대 그리스 어 dia(너머)와 speiro(씨뿌리다)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이며, 우리말로는 ‘이산(離散)’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리스에서는 원래 이주와 식민화를 뜻했지만, 유대인, 아프리카 흑인 노예, 팔레스타인인 등의 경우에는 외세에 의한 ‘강제 집단이주’를 나타낸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처럼 자국민의 해외 진출이라는 적극적 의미 혹은 강제이주의 정신적 상처(트라우마)와는 거리가 있는 중립적인 용어로서, 외국에 살면서도 집단적인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규정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그리고 이 말을 발전시킨 ‘교역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해외팽창의 역사를 설명한다. 

세계의 여러 문명권들은 아주 제한적인 교류에 그치거나 아예 단절되어 있다가 근대 이후 서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계 각 지역이 서로 조우했다고 하지만 사실 첫 만남은 문명 간 혹은 국가 간 대규모 교류나 전면적인 대결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기껏해야 몇몇 점과 같은 아주 제한된 공간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상이한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낯선 사람들 사이의 교류와 교역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방인은 예측하기 어렵고 위험하며 신용하기 힘든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문화(異文化) 간의 접촉과 교역은 양쪽이 상호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특별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방식은 양쪽을 중개하는 특수 집단에게 교역을 맡기는 방식이었다. 곧, 외국 사회 속에 뚫고 들어간 이방인들이 그들만의 거류지를 형성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자신의 출신 지역과 현재 거주지역(host society, 곧 그들을 받아들인 사회) 사이의 교역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류지들이 여러 곳에 만들어져서 네트워크를 이루면 더욱 강력하고 효율적인 교역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소위 ‘교역 디아스포라(trading diaspora)’다. 근대 초에 있었던 세계 각 지역 간 접촉과 소통은 흔히 이런 작은 접점을 통해 이루어졌다. 

디아스포라는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그 가운데 특히 잘 알려진 사례로는 아시아 각지에 뿌리를 내린 중국인 화교 공동체, 에스파한 근처의 줄파를 중심지로 하여 서쪽으로는 암스테르담으로부터 동쪽으로는 중국에까지 이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상업망을 구축한 아르메니아 상인 네트워크 등을 들 수 있다. 사실 유럽인들이 아시아와 아메리카에 진입해 들어간 것 역시 교역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예를 들어 16세기에 에스파냐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했다고 할 때 우리는 통상 멕시코 전체 혹은 남아메리카 전체를 지배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작 수천 명 정도의 인력으로 그 넓은 영토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실상은 단지 중요한 거점 지역들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이다. 영국인들의 인도 지배 역시 초기에는 몇 개의 거점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몇 개의 ‘점’의 지배가 확대되어 광활한 영토 지배가 완수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근대 초의 해외 팽창을 설명하는 데에는 ‘제국의 팽창’보다는 ‘디아스포라의 확산’이 더 알맞은 개념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 현상은 아시아 해상세계에서 널리 퍼져 있던 일이었다. 서아시아와 인도로부터 중국 복건(푸젠)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상업 민족들이 해외 지역에 상업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활기찬 교역 활동을 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아시아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띠지만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현상이 이란인들의 해외 팽창이다. 

이란인들은 일찍이 12~13세기부터 인도 방향으로 이주해 가서 데칸 지방에 강대한 술탄 국가들을 여럿 건설하였다. 이와 함께 상인들이 인도 각 지역 내에 자리 잡고 활발한 교역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페르시아 만을 통해 중동 지역, 동아프리카와 인도를 연결하였고, 더 나아가서 동남아시아 지역으로도 팽창해 갔다. 질라니(Khwaja Mahmud Gawan Gilani)라는 상인에 대한 연구 사례를 보면 그의 가족과 사촌형제들이 이집트, 메카, 인도 여러 지역에 주재원으로 자리 잡은 다음 그들 간에 말과 무기 거래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문명권 사이 접촉과 교역은 외국 사회 속을 뚫고 들어간 이방인들의 거류지를 접점으로 이루어졌다. 근대 초 해외팽창은 이러한 접점, 즉 ‘교역 디아스포라’의 확산이라 할 수있다. 12~13세기 이란인들은 페르시아만에서 중동·동아프리카·인도·동남아까지 디아스포라를 확장했다. 상품 교역과 더불어 페르시아 문화·제도가 아시아에 전파됐다. 

이란계 상인들은 아시아 각지로 퍼져갔다. 유럽인들이 아시아에 들어와서 교역 관계를 트려고 시도할 때 자주 부딪힌 인물들이 이란 상인들이었다. 유럽인들의 기록에는 “술탄 국가의 궁정을 꽉 잡고 있는 페르시아인”, “다른 어느 인도 사람들보다도 오만한 인간들”이라는 식으로 이란인들이 많이 묘사되어 있다. 이란 상인들은 인도의 유명한 다이아몬드 산지인 골콘다(Golconda)에서 궁정 세력의 비호를 받으며 다이아몬드 사업을 독점하였고, 미얀마와 아유타야(태국)에 거류지를 형성하고는 이란과 이 지역 사이의 교역을 확대시켰다. 타이에서는 이들이 주석 생산과 수출을 담당했는데, 이들의 영향력이 어찌나 큰지 불교 국가인 이 나라의 국왕이 이슬람 사원을 지어주면서까지 이란 상인들을 유치하려고 했다. 

이란인들의 팽창은 단지 교역 관계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이란계 행정가·군인·학자·문인들이 인도와 동남아시아 각국으로 퍼져가서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인도 북부를 장악한 무굴 제국에서는 페르시아어가 궁정과 지배층의 문화 언어가 되었고 페르시아 미술과 문학이 고급문화로서 자리 잡았다.

»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따라서 15~18세기 동안 대규모로 지속되었던 이란인들의 이주는 아시아의 역사에서 실로 중요한 의미를 띠는 현상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시기가 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형성기이자 동시에 해외 교역이 크게 팽창했던 시기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역사가들은 흔히 국가 건설은 무력에 의해 이루어졌고 내륙 지향적이며, 상업 활동과는 무관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이와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예컨대 무굴제국도 상업에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자국 상인들이 해외로 많이 진출해 갔을 뿐 아니라 제국 정부도 재원 마련을 위해 국제 교역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전에는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국가’와 ‘상업’이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곧, 디아스포라는 정치와는 거리를 둔 영역으로서 경제 행위만 이루어지는 부문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란인들의 사례를 보면 상업과 정치, 군사, 문화 등의 여러 부문이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디아스포라는 아시아 각 지역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변화가 촉발되는 중요한 창구였다. 

후일 유럽인들이 아시아의 기존 교역망에 끼어 들어가서 거점을 확보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점차 정치·군사·문화적 지배력을 확대해 간 것은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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