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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바다 6. 해상운송의 발달

by 내오랜꿈 2007.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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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싸고 힘센 배 ‘근대의 바다’에 뜨다 

문명과 바다 6. 해상운송의 발달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11-02 


» 이집트의 낙타 대상(위)과 곡물을 운송하는 인도의 소(아래).
세계가 서로 접촉하고 교류하기 위해서는 우선 운송 수단이 발달해야 한다. 세계 시장의 형성이든 종교 전도와 문화 교류든 하여튼 서로 떨어져 있는 문명권 간의 소통은 사람과 물자가 안전하고 저렴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근대에 그와 같은 교류가 본격화된 것은 육로보다는 해로를 통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근대 세계는 바다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 해상 운송의 발달이 어떤 의미를 띠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육상 운송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1톤을 옮기는 데 20마리가 필요한 낙타와 ‘풀 뜯어먹는 속도’로 이동하는 소는 배 한 척의 수송력에도 못 미친다. 배가 육상운송의 한계에 돌파구가 된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대부분의 문명권들은 각자의 해양 ‘영역’안에서만 주로 활동했고, 원양항해를 통해 세계를 연결하며 새 시대를 연 것은 결국 유럽인들이었다 

세계가 서로 접촉하고 교류하기 위해서는 우선 운송 수단이 발달해야 한다. 세계 시장의 형성이든 종교 전도와 문화 교류든 하여튼 서로 떨어져 있는 문명권 간의 소통은 사람과 물자가 안전하고 저렴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근대에 그와 같은 교류가 본격화된 것은 육로보다는 해로를 통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근대 세계는 바다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 해상 운송의 발달이 어떤 의미를 띠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육상 운송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북부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원거리 수송 수단의 하나는 낙타 대상이었다. 낙타에는 두 종류가 있다. 단봉낙타(dromedary, Arabian camel)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더운 사막 지역에서 쓰이고, 쌍봉낙타(camel, 정확하게는 Bactrian Camel이라 한다)는 아시아의 스텝지역과 추운 지역에서 쓰였다. 아나톨리아와 이란을 경계로 해서 갈리는 세계적인 ‘낙타의 분업’은 대략 8세기 경에 고정되었다. 어느 여행자가 말했듯이 “두 종류의 낙타가 있어서 하나는 더운 지역을 위해서 있고 다른 하나는 추운 지역을 위해서 있다는 것은 신의 섭리와도 같다.” 쌍봉낙타는 200kg의 짐을 지고 하루 50km까지 이동할 수 있는 반면, 단봉낙타는 시원한 야간에 이동할 경우 최고 100kg의 짐을 지고 하루 60km를 이동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최적의 조건일 때 이야기이고 통상적인 경우에는 이보다 효율성이 떨어져서 단봉낙타의 경우 대개 50kg의 짐을 지고 하루 10시간을 걸어서 35~40km를 이동한다. 그래서 1톤의 화물을 가지고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경우 20마리의 단봉낙타를 이용하여 8~10주간의 여행을 해야 했다. 낙타 대상은 사막을 횡단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으나, 수십 마리의 낙타를 거느린 대상이라 해도 실은 배 한 척의 수송력도 안 되는 것이다. 

무굴제국 시대 인도의 사정은 더 열악하다. 이곳에서는 목축과 수송 업무를 동시에 담당하는 반자라(Banjara) 카스트가 곡물 수송을 맡고 있었다. 한 집단이 대략 만 마리 정도의 소를 끌고 다녔는데, 인도 전체로 보면 이 카스트가 거느린 소가 약 9백만 마리에 달했다고 한다. 소들은 스스로 풀을 뜯어먹으며 움직이기 때문에 비용이 거의 안 들지만, 능히 상상할 수 있듯이 말할 수 없이 느린 속도로 이동했다. 이 방식을 통해 어쨌든 제국의 수도로 곡물을 운송하는 역할을 완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소 풀 뜯어먹는’ 속도로 근대 세계 경제를 이루어낼 수는 없는 일이다. 분명 어떤 돌파구가 필요하였다. 그것을 제공한 것이 다름 아닌 해상 수송이었다. 소떼나 ‘사막의 배’(중동 지역의 시(詩)에서 낙타를 가리키는 말)가 아니라 바다의 배가 근대 세계의 형성을 추동한 것이다. 

» 유럽의 선박 제조 모습. 오늘날에 비하면 배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다.

사실 해양문명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대서양, 지중해, 홍해와 페르시아만, 인도양, 말라카 해협과 남중국해, 그리고 동아시아의 바다를 통해 태평양 연안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영토 전체의 바닷길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었다. 중간에 수에즈 지협이 바닷길을 가로막고 있지만 이곳에 운하가 개통되기 이전에도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여러 방안이 강구되어 있었다. 고대 이집트 시대에는 나일강 지류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파기도 했고, 그 이후 이 수로가 막히자 배를 여러 조각으로 분해해서 낙타를 이용해 이 지역을 넘어가서 다시 조립하여 바다에 띄우는 극단적인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각 해양 문명권 간에 경계 지역에서 서로 ‘접촉’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양 문명권이 총체적으로 교류하지는 않았다. 내륙의 문명권들이 자기 영역을 고수하려는 관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해양 세계에서도 문명의 경계는 오랫동안 고착되어 있었다. 일찍이 페니키아 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회항하고 바이킹들이 한때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것처럼 자신의 해상 경계를 넘어가는 일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일이었을 뿐 후대에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바다를 통해 세계를 연결하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은 결국 유럽인들이었다. 

자신에게 익숙한 해양 세계 너머로 항해하는 일이 그처럼 어려운 일이었을까?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점을 말해주는 몇 가지 사례들이 있다. 

바스코 다 가마와 함께 항해했던 포르투갈의 수로안내인인 페로 달렘케르(Pero d'Alemquer)가 귀국하여 국왕 주앙 2세를 만난 자리에서 자기는 어떤 작은 배로도 기니아 해안까지 갔다 올 수 있다고 자랑하자 국왕은 그에게 입을 다물라며 꾸짖었다. 그 후 국왕은 그를 따로 불러서 외국인들이 포르투갈의 경험을 이용하여 이익을 보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부러 그랬노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원양항해가 생각보다 쉽다는 사실 자체가 적국에게 알려져서는 안 될 국가 비밀이었던 것이다! 에스파냐 인들은 1610년에 일본에서 멕시코의 아카풀코까지 일본 범선을 타고 태평양을 항해한 적도 있었다. 비교적 최근의 사례로는 1851년 오사카에서 교토로 향하던 범선이 돛대와 키를 잃은 채 17개월 동안 표류한 사건이 있다. 이때 17명의 선원 중 세 사람이 생존해서 캘리포니아의 산타바바라 연해에서 미국 선원들에게 구조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구조의 배로도 태평양을 건널 수 있으며 따라서 기술적 요인이 원양항해의 결정적인 조건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 준다. 

여기에서 한 가지 특기할 사실은 이른바 ‘대항해 시대’에 다른 대륙을 탐험한 선박들은 그 시대의 기준으로도 작은 배였다는 점이다. 원래 해외 탐험은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위험한 사업이어서 처음부터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에 자본 부족으로 작은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점도 있지만, 낯선 해안에 상륙해야 하는 배들은 너무 크면 해안에 좌초할 우려가 있어서 오히려 작은 배가 유리한 점도 작용하였다. 탐험에 사용된 배는 오늘날 한강 유람선만한 크기였다. 근대 초 유럽의 원양항해는 비유하자면 한강 유람선을 타고 인천을 떠나 인도양과 희망봉을 거쳐 유럽까지 항해하고 돌아오는 행위에 해당한다. 유럽의 해양 탐사를 설명하면서 ‘진취적인 용기’ 운운하는 것이 순전히 헛된 수사만은 아닌 것이다. 이런 작은 배를 타고 육지가 보이지 않는 먼바다로 나아가서 다른 대륙으로 항해해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죽음의 공포를 넘는 용기가 필요했다. 

선박과 항해술의 발달이 근대 해양 세계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항해 기술이 발달한 결과 자연히 세계로 팽창해 나갔다는 식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기술 요소 외에도 유럽인들을 세계의 바다로 나아가게 만든 데에는 정치적, 사회·경제적 그리고 심리적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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