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크랩/기타

문명과 바다 4. 화교 공동체의 발전과 핍박 - 16세기 마닐라서 시작된 피와 눈물의 ‘화교사’

by 내오랜꿈 2007. 10. 20.
728x90
반응형


16세기 마닐라서 시작된 피와 눈물의 ‘화교사’
문명과 바다 4. 화교 공동체의 발전과 핍박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0 19


» 필리핀에 최초로 도착한 유럽인 마젤란의 ‘빅토리아호’와 현지 주민들을 기독교도로 개종하려다 전투 끝에 죽은 마젤란(위부터).
1960년대만 해도 중국 사람이 살던 집을 사서 집수리를 하려고 담벼락을 부수는데 벽 사이에서 금덩어리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떠돌곤 했다. 사연인즉, 원래 집주인인 중국 사람이 열심히 모은 돈으로 금을 사서 가족도 모르게 벽 속에 감추어 두었는데, 늘그막에 병이 들어 자기 아들에게 미처 그 사실을 알려 주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워낙 핍박을 많이 받은 화교들로서는 믿을 건 금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질 만하다. 우리나라에서도 화교들이 사회적으로 혹은 정책적으로 꽤 심한 압박을 받아서 기를 못 펴고 살았다고 알려져 있고,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는 최근까지도 종종 화교에 대한 약탈과 학살이 벌어지곤 했다. 화교 공동체들이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많이 발전하면서도 동시에 심한 핍박을 받게 된 역사적 계기는 무엇일까? 

정화의 원정 뒤 중국은 해상교역을 금하고 해외 거주민들을 외면했다. 마닐라의 대규모 화교공동체는 정부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는 에스파냐인들과 경쟁하면서 두 차례나 대학살을 겪었다. ‘국가’의 개입 여부와 정도가 근대 해외팽창의 관건이 되었다 

명대 이전에 중국은 대단히 활기찬 해상 교류를 하고 있었다. 연안 지역 주민들이 아시아 각지로 퍼져갔다가 때로 자신들이 살던 곳에 눌러 앉아서 화교 사회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15세기 초반 정화(鄭和)의 남해 원정 이후 중국 정부는 해상 교류를 철저히 금지하고 국가 전체를 아예 바다와 절연시키는 강력한 해금(海禁) 정책을 폈다. 이렇게 해서 본국과 관계가 단절된 해외 화교 공동체들은 끈 떨어진 연처럼 외로운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해금 정책은 실로 가혹한 것이어서 허가 없이 바다로 나갔다가 발각되면 사형을 면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인들이 정말로 해상 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연안 지역 주민들은 기회만 닿으면 해외로 눈을 돌렸고, 또 해외 거주 화교들과 비밀리에 교역을 계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중앙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새로운 소규모 화교 공동체가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억압된 상황에서 비밀리에 교역 활동을 수행했기 때문에 실체를 명확하게 보여줄 문서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이 역사가들에게는 큰 문제이다. 

16~17세기에 예외적으로 큰 화교 공동체가 형성된 곳으로는 마닐라를 들 수 있다. 이곳의 역사는 아시아의 바다에서 중국 세력과 유럽 세력 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예시하는 특이한 사례이다. 

» 유럽에서 1605년에 제작된 지도로 중국(명), 필리핀, 한반도가 자세히 나와 있다.
필리핀(Philippines)이라는 이름 자체가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에스파냐 인들은 필리핀을 아시아 식민화의 전초 기지로 삼으려고 했다. 1560~70년 대에 에스파냐 인들이 필리핀에 본격적으로 밀려왔을 때 이 지역에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집단이 형성되어 있지도 않았고, 동남아시아의 다른 무슬림 공동체와도 비교적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강한 저항을 하지도 못한 채 쉽게 정복당했다. 에스파냐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중국과 교역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인 상인과 선박의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적극적으로 중국인들을 마닐라로 불러들였다. 중앙 정부의 눈을 피해 해외 교역을 하려고 했던 연안 지역 주민들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져서 30년 정도의 짧은 기간 안에 마닐라에는 수많은 중국인들이 유입되어서, 이 당시 가장 큰 화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와 같은 자국민의 해외 거류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중국 정부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왜구에 대한 정책을 보면 알 수 있다. 1570년대에 들어서 왜구의 피해가 다시 극심해졌고, 일부 왜구들은 마닐라 정복을 시도할 정도였다(‘왜구’라고는 하지만 일본인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고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섞여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가장 유명한 수괴인 리마홍 또는 린펭(林風)이라 불리는 자는 중국인 해적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관리들이 마닐라를 방문하여 에스파냐 관리들과 해적에 대한 대응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다. 이때 중국 쪽은 오직 해적 진압을 위한 공조만 논의할 뿐 화교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해외 거주 중국인들이 급증하고 있으므로 에스파냐 인들이 자신의 구역 내에서 중국인들을 잘 통제·관리할 것을 부탁하였고, 중국 상인들을 이용해서 중국과 필리핀 사이, 혹은 필리핀과 다른 동남아시아 지역 사이의 교역에서 어떤 방식으로 수익을 올리더라도 간여치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하였다. 이렇게 자국 정부의 보호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외국 거류민들은 자연히 본국과의 관계가 멀어졌고 그 결과 때로 큰 위험에 몰리기도 했다. 1580년대 이후 중국과의 견직물 교역이 크게 증가하면서 필리핀 거주 중국인 수도 크게 늘었다. 1600년 경에는 중국과 마닐라 사이를 오가는 선박 수가 30척이 넘게 되었으며, 마닐라가 있는 루손 섬에 거류하는 중국인 수가 2만5000명을 상회하였다. 중국인의 세가 과도하게 커지자 에스파냐 인들과 갈등이 일어났고 결국 1603년에 이 지역의 중국인 거의 대부분이 학살되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다. 화교 2만5000 명 중에 500명 정도가 살아남고 500명이 중국으로 돌아갔을 뿐 나머지 거의 전원이 살해당한 것이다! 

놀라운 일은 이 사건 이후 복건성(푸젠성) 주민들이 다시 필리핀으로 향했다는 점이다. 중국 상선이 도착하고 현지에 정착하는 중국인들도 늘어서 2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화교 수는 다시 3만 명이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여전히 본국 정부는 무관심했고, 화교들은 에스파냐 인들의 관리와 통제를 받아들여야 했다. 양쪽 간 갈등이 폭발하여 1639년에 필리핀에 거주하는 중국인 약 2만 명이 학살되는 사건이 다시 발생했다! 

»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중국 정부는 필리핀에서 중국인들이 두 번 연속 대학살을 당하게 될 정도로 해외 거주 화교들을 방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유럽 출신 상인·사제·군인 들과 경쟁하지 못했다. 왕권의 강력한 후원을 받는 에스파냐 인들, 국가와 자본의 긴밀한 결합을 통해 조직적인 활동을 펼치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 앞에서 중국 상인들은 다만 위험을 피해가는 개인적인 조심성과 노하우로 버텨야 했다. 친척 간의 협력이라든지 화교 자치체의 보호망 정도로는 거대한 근대 자본주의 세계에서 제기되는 위험에 대처할 수 없었으며, 하물며 광범위한 해역을 포괄하는 상업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는 힘들었다. 중국 상인들 중 일부가 큰돈을 만지기는 했지만 그들이 주도적으로 근대적인 체제를 운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만든 체제에 참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근대 해외 팽창의 관건은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어느 만큼 개입하느냐에 달린 문제가 되었다. 해외 거류민을 방치한 중국이 아니라 국가 권력과 자본이 긴밀히 결탁한 유럽 각국이 세계의 바다를 연결하는 주체가 되었다. 역사의 교훈을 뒤늦게 깨달은 것일까, 오늘날 중국 정부는 전세계의 거대한 화교 자본과 긴밀한 연관을 맺으려 하고 있다. 


728x90
반응형